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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결혼 전에 마음을 거두다

  • 만약 벼랑 끝까지 몰린 게 아니었더라면 그녀가 이곳으로 그를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 유희는 무리하게 말을 꺼냈다.
  • “3분만 내줘요. 용건만 얘기하고 갈 거니까.”
  • 반서준은 다소 인내심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 여자가 지금 밀당이라도 하려는 걸까 싶었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한 척하더니 이제는 또 직접 제 발로 찾아오기까지 하니. 그는 이런 여자를 수도 없이 봐온 사람이었다.
  • 반서준은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 “이미 10초 지났어.”
  • 유희는 주위를 살피더니 답했다.
  • “사람 너무 많아서 얘기하기 불편해요. 일단 저 사람들한테 자리 좀 피해달라고 하면 안 돼요?”
  • 반서준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요구가 참 많네.”
  • 그가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흩어졌다.
  • 유희가 입을 열려던 찰나 반서준의 손목이 내려졌다.
  • “이제 30초 남았어.”
  • 유희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 “그쪽이 나한테 줬던 수표는 진짜더라고요. 제가 낚인 거였어요. 전 억울해서 이대로 못 둘 것 같아요. 그 수표가 그 사람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제가 하려던 말은 이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 유희는 제일 빠른 속도로 시시콜콜하게 전부 다 설명했다.
  • 반서준은 표정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 “얘기 끝났어?”
  • 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 “대충 그런 뜻이에요. 30초라서 이 정도로 밖에 얘기가 안 되네요. 혹시 시간 조금만 더 줄 수 있어요?”
  • 반서준은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그의 미소는 다소 차가웠다.
  • “그래서, 수표를 다시 받아내는 걸 도와달라는 거지?”
  • 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서 이해 능력이 뛰어났다.
  • 그녀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난 널 도울 의무 같은 것도 없고 돕고 싶은 생각도 없어. 장사를 하려면 등가교환을 해야 하는 거야. 내가 도와주면 넌 뭐로 바꿀 건데?”
  • 유희의 마지막 희망은 이대로 꺼질 듯했다.
  • 우중충한 날씨는 그녀의 기분과 똑같았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공기 중에도 축축한 습기가 돌고 있었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떨궜다.
  • “죄송합니다 반서준 씨, 제가 온 적이 없는 걸로 쳐주시죠. 제가 바꿀 만한 물건이 없는 건 사실이네요.”
  • 유희는 더 이상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 악마와 장사를 논한다는 건 뼈까지 모조리 빼앗기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 반서준은 그 자리에 서서 유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그는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메리어트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 저녁에 거기로 와.”
  • 유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리고 속으로 반서준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까지 굶주렸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높이 흔들었다.
  • “안녕히 계세요. 멀리 안 나갑니다.”
  • 반서준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 아니 여자애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는 여자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가 이토록 단호한 거절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 이 여자는 남자의 퍽퍽한 삶에 한줄기 낙일뿐이었다. 옆에 남겨두어도 별다른 가치가 없을 것 같았다.
  • 그는 회사로 돌아가 비서에게 유희의 신상정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시켰다. 상세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다.
  • “유희가 누구야?”
  • 한다은이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고 마침 반서준이 한 말을 듣게 되었다.
  • 몇 개월 만에 만난 한다은을 바라보는 반서준은 여전히 냉담했다.
  • “누가 들여보냈어?”
  • 한다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 “만약 내가 오지 않았으면 우리 약혼남께서 비서한테 다른 여자 정보를 조사하게 하는 것도 몰랐겠지.”
  • 반서준은 눈썹을 치켜 올렸고 다소 불쾌한 얼굴로 한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 “우리 얘기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한다은, 선 넘지 마.”
  • 한다은의 촉촉한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반서준 옆으로 걸어가 그의 셔츠 카라를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 “반서준 그거 잊지 마. 네 엄마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를 빼면 너한테 시집갈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거야. 곧 있으면 결혼식인니까 마음 좀 거둬. 밖에 여자가 있는데 떼어내기 힘든 거면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