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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건 도대체 무슨 팔자야

  • 며칠이 지나도 반서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유희는 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마주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그녀는 밥도 먹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월세를 내고 나니 카드에 잔액이 4만 원도 채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 며칠 동안 빵이랑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촬영팀에서도 그녀에게 오디션을 보라는 통지를 보내는 곳이 없었다.
  • 이진철 일가족은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오늘에서야 돌아왔다.
  • C 중학교 근처의 카페, 유희는 이진철을 이곳으로 불렀다.
  • 보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이진철을 만난 유희는 하마터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 그녀의 남자친구는 엽총을 대포로 바꾼 모습이었다. 그는 최신 버전 아이폰 12를 들고 있었고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출시된 AJ와 아르마니 아우터를 입고 있었다!
  • 게다가 아우디에서 차까지 산 것이었다.
  • 유희는 이 가의 경제 조건을 모르지 않았다. 한 가족 네 식구는 15평짜리 작은 집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 아우디 차는커녕 스쿠터를 사는 것도 온 가족이 모여서 투표로 결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 그때 당시 이진철과 사귀게 된 초반부터 양정순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 아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이진철은 키도 훤칠하고 깔끔한 잘생긴 외모였다.
  • 양정순은 늘 이진철을 설득하곤 했다. 현지에 집 세 채 정도는 있는 집안이 제일 좋은 여자로 찾으라고 했었다.
  • 이제 유희는 반서준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표는 진짜였고 그녀를 속인 사람은 이진철이었던 것이었다.
  • “요 며칠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
  • 이진철은 완전히 회복한 상태였고 봄바람이 깃든 홍조 띤 모습이었다.
  • “그래서 불러냈잖아. 이진철 너 내 돈 빌린 거 언제 갚을 거야?”
  • 유희는 턱을 괴고 웃으며 이진철을 바라보았다.
  • 그녀의 미소에는 풍자가 담겨 있었다.
  • 이진철은 흠칫했다.
  • “내가 언제 너한테 빚졌어? 내가 빚질 만한 돈이 있기나 해?”
  • 유희는 웃음이 점점 굳어버리고 있었다.
  • “내가 바보지. 널 믿고 수표를 줬어. 그리고 네가 가짜라고 하니까 바로 믿어버렸으니.”
  • 이진철은 문득 썩소를 지었다. 이제 진실이 다 드러난 것 같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 “그 돈은 내가 가져도 마땅한 돈이야. 네가 나한테 주는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치는 거지. 네가 날 배신하고 벌어온 돈인데 내 주머니에 들어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 이진철은 새 기계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아이폰 12를 꺼내 앨범을 클릭했다.
  • 그리고 앨범에는 그녀가 엠파이어에서 술을 파는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 유안영이 만약 그에게 이 사진들을 보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제 여자친구가 어떻게 단번에 6억을 내놓을 수 있었는지 끝까지 몰랐을 것이었다.
  • “이진철, 너 진짜 뻔뻔하다. 우리 7년을 만났어. 7개월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 유희는 이를 악물며 얘기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진철을 잘근잘근 씹어버릴 듯한 기세를 보였다.
  • 이진철은 한숨을 내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 “난 너한테 미안한 짓 한 거 없어.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난 없었던 일로 해줄 수 있어. 물론 너랑 결혼은 못 할 것 같아.”
  • 유희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너무 슬프면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 두 사람의 청첩장은 이미 두 달 전에 전부 전달한 상태였다.
  • 그녀는 천당에서 단번에 지옥으로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 유희는 반 컵 정도 남은 밀크티를 이진철이 입은 아르마니에 부어버렸다.
  • “그렇게 쉽게 얘기하지 마. 넌 반드시 돈 갚아야 될 거야. 안 그럼 내가 고소할 거니까.”
  • 이진철은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 티슈로 옷을 닦았다. 그리고 생떼를 부리며 팔짱을 꼈다.
  • “법정에서 어떻게 얘기하려고? 몸 팔아서 번 돈을 남자친구가 먹어버렸다고? 증거 있어? 그 수표가 네 거라는 거?”
  • 유희는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었다. 수표가 그녀의 것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람은 반서준 한 사람뿐이었다!
  • 반서준을 떠올린 유희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그녀는 도대체 무슨 팔자를 타고났길래 앞에는 늑대 새끼가 뒤에는 호랑이 새끼가 버티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