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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역겨워

  • 촬영이 시작되면 윤혜성은 김씨 집안 사람이나 이세준과는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이세준은 매달 그녀를 보러 찾아왔다.
  • 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를 관심해 주면서 김서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인정하지 않았다.
  •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과 김서윤에 대한 배려는 늘 그녀의 마음에 가시처럼 남아있었다.
  •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이세준과 김서윤에 대한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 이어 혜성이 출연한 영화는 개봉한 지 며칠 만에 큰 인기를 끌면서 국내 영화제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됐다.
  • 감독님은 그녀가 이 상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는데 영화제 시상식에 참석하기도 전에 김서윤과 함께 납치되고 말았다.
  • 그날 김씨 집안사람과 이세준은 두 사람을 찾아냈다.
  • 협상 끝에 납치범이 한 명만 풀어줄 수 있다고 하자 이세준과 김씨 집안사람 모두 김서윤을 풀어주기를 원했다.
  • 가족들이 김서윤을 선택한 것은 놀랍지 않았지만, 이세준도 서윤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혜성은 충격을 받았고,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다.
  • 당시 윤혜성은 죽마고우인 남자 친구가 김서윤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 그녀의 머릿속에는 살아서 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가족들과 이세준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애쓸 때,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하던 납치범이 그녀에게 총을 쐈다.
  • 쓰러질 때 가족들과 이세준이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갔다.
  • 이번 생에서 이미 김씨 가족들과 연을 끊었으니, 자연히 이세준과도 끝내야 했다.
  • 이세준은 윤혜성이 서윤을 언급하면서 더욱이 그런 말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헛소리 그만해. 첫사랑 따위 없으니까.”
  • 그리고 계속 말을 이어가려 할 때 귓가에 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세준, 우리 헤어져.”
  • 이세준은 깜짝 놀라며 혹시 잘못들은 건 아닌지 자기 귀를 의심했다.
  • “뭐?”
  • 윤혜성이 절대 먼저 이별을 고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 “헤어지자고.”
  • 그러자 이세준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방금 그 말 취소해.”
  • 거의 명령조로 얘기하는 이세준의 말투에 혜성은 눈을 흘겼다.
  • “지금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 헤어졌으니까, 앞으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 세준은 그녀의 단호한 말투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이유가 뭐야?”
  • 윤혜성도 숨기지 않고 바로 얘기했다.
  • “이세준, 김서윤을 좋아하면 가서 고백하지 그래? 나랑 만나면서 나더러 기회를 양보하라고 하고, 뒤에서 김서윤을 챙겨주는 걸 보면 정말 구역질 나니까.”
  • 만약 이세준이 처음부터 김서윤을 좋아한다고 얘기하거나 특별한 감정이 있다고 얘기해줬다면 아무리 그가 좋아도 사귀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일은 더욱 없었을 것이다.
  • 하지만 세준은 그러지 않았고, 혜성이 죽기 전에 그녀의 등에 칼을 꽂았기 때문에 정말 그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
  •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
  • 윤혜성은 할 말을 다 하고 전화를 끊은 뒤 이세준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전화기 너머로 신호음이 들려오자 이세준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는 윤혜성이 자신과 김서윤이 몰래 연락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세준은 참지 못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고, 계속 들려오는 신호음에 그제야 자신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전화를 끊고 윤혜성에게 영상통화를 걸려고 했지만, 이미 대화방을 나갔다는 알림이 뜨면서 카톡마저 차단당하고 말았다.
  • 이세준은 도무지 믿을 수 없었고 조금은 허전한 느낌에 김성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 결과 윤혜성이 김서윤에게 기회를 넘기지 않으려고 김씨 집안과 연을 끊고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놀라고 말았다.
  • 같은 시각.
  • 집에서 챙겨 온 물건을 정리하던 윤혜성은 가방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꺼냈다.
  • 사부님이 그녀를 입양한 후, 사주를 봐준 적이 있었다.
  • 그리고 이미 사망한 사람을 찾아 관계를 통해 그녀를 호적에 올렸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후환이 없을 거라고 말이다.
  • 그래서 지금의 호적등본에는 그녀 혼자였다.
  • 김씨 집안으로 돌아간 뒤, 그들은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고 성을 바꿔주지도 않았다.
  • 윤혜성은 손끝으로 가족관계증명서를 그으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 당시 사부님이 그녀에게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던 말씀이 맞았다. 그런 가족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다.
  • 기왕 다시 시작하기로 한 이상 차라리 가족이 전부 사망한 고아로서 살아가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 정리를 마친 혜성은 연예계의 친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혜성이 연예계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다고 알려줬다.
  • 킴앤씨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로드 매니저가 절대 혜성과 계약하지 말라고 엄포했기 때문이다.
  • 윤혜성은 두 쓰레기 오빠가 한 짓에 놀랍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그녀를 압박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 잘못을 인정하길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혜성은 분명 피를 나눈 혈육인데, 피도 섞이지 않은 남을 위해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대하는 그들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 따윈 하지 않았으니까.
  • 그들에 대한 가족애도 이미 지난 생에 전부 사라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 윤혜성은 먼저 감독님에게 전화를 걸어 게스트를 확인했고 상대방은 아주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 이어 인터넷으로 기획사를 등록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 킴앤씨 엔터테인먼트는 국내에서 3위 안에 드는 기획사이기 때문에 큰오빠와 둘째 오빠가 출연을 금지하겠다고 하면 이익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연예기획사와 매니저는 두 사람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녀와 계약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 그녀는 진작에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다. 다른 사람과 계약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직접 기획사를 차리면 되니까.
  • 직접 본인의 매니저가 될 수도 있고, 직접 연예인을 양성하면 된다.
  • 그렇게 직접 키운 연예인이 점점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녀도 신앙의 힘을 얻어 수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알고 지내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 다음 한 주 동안, 윤혜성은 연예기획사를 만들고 사업자 등록도 마쳤다.
  • 아직 기획사 사무실도 구하지 못했고 직원도 고용해야 하므로 이번 예능프로그램이 끝나면 이 일들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 그다음 윤혜성은 제작진을 찾아가 계약을 체결했다.
  •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오는 길에 김성훈과 김시우가 김서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 웃고 떠들며 걸어오던 세 사람은 윤혜성을 발견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 김서윤은 윤혜성을 보자 왠지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윤혜성, 너도 계약하러 온 거야?”
  • 윤혜성은 서윤의 말뜻을 알아채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 “다들 계약하러 왔어?”
  • 그러자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내가 이 예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지? 그래서 둘째 오빠가 감독님이랑 상의해서 시우 오빠랑 내가 함께 나가는 것에 동의하셨거든.”
  • 김성훈은 윤혜성을 보며 거들먹거리며 잘난 체했다.
  • “네가 양보하지 않아도 서윤이가 원하는 걸 들어줄 방법이라면 아주 많거든.”
  • 혜성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 “그러니까 분명 나갈 방법이 있는데도 나한테 그렇게 양보하라고 강요한 거야? 이런 게 가족이라니 정말 다시 보게 되네.”
  • 김씨 집안엔 형제가 다섯이었는데, 첫째인 김유준은 기획사 대표였고, 둘째 김성훈은 연예계에서 유명한 로드매니저였다.
  • 그리고 셋째인 김하준은 인기가 많은 실력파 가수에, 넷째 김지호는 천재 신예 감독이고, 다섯째 김시우는 알아주는 아이돌이었다.
  • 비록 사람을 한 명 더 데리고 나온다고 해도 김시우 같은 톱클래스가 자발적으로 예능에 합류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 인기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김씨 집안의 인심도 살 수 있으니 감독님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물론 그중에 김서윤의 암시와 부추김도 있었을 것이다.
  • 분명 그녀의 신분과 가족, 그리고 인생까지 빼앗아 간 건 김서윤인데 가족들은 그녀가 돌아온 탓에 김서윤이 양녀로 전락하고 그녀가 명분을 차지했다고 여겼다.
  • 신분에서 김서윤이 불리해졌으니 그녀가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윤혜성이 집으로 돌아온 뒤, 대부분 재벌가 집안에서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김씨 집안에서는 대외적으로 그녀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 그들이 아끼는 공주님은 여전히 김서윤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김씨 집안에서 아끼는 딸은 김서윤으로 알고 있었다.
  •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녀가 김서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도무지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두 형제가 웃음을 거두고 불쾌한 표정을 내비치자 혜성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당신들과 연을 끊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구역질 나서 죽었을 거야.”
  • “너!”
  • 김성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곁에 있던 김시우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윤혜성, 말이 너무 심하잖아.”
  • 여동생의 말이 듣기 거슬릴 정도로 심하다고 생각할 때, 윤혜성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 “심한 게 대체 누군지 모르겠네. 한때 그래도 일 년간 가족으로 지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역겨워.”
  • 표정이 어두워진 두 형제와 남몰래 기뻐하는 김서윤을 혜성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그냥 지나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