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잘해야 할 거다. 우리 집안이랑 연을 끊겠다면 회사에서도 지원해 줄 생각 없으니까.”
첫째 김유준도 한 마디 보탰다.
“심지어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수도 있어.”
두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윤혜성더러 앞날을 위해서라도 고집부리지 말고 그만 양보하라는 뜻이다.
윤혜성은 갑자기 소리 내 웃었다.
“일 년 동안 지원을 많이 해준 것처럼 얘기하네.”
“내가 킴앤씨 엔터테인먼트로 이직한 뒤로 얻은 지원은 예전에 나를 착취하던 그 작은 소속사보다 적었어. 지원이 적고 형편없을뿐더러 네티즌들의 악플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회사에서 해명조차 하지 않았잖아. 내가 직접 따낸 계약마저 김서윤에게 양보하라고?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걸로 나를 협박할 수 있어? 뻔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뻔뻔한 건 또 처음이네.”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고 혜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여기로 이직했을 때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게 참 다행이지 뭐야? 굳이 계약 해지할 필요도 없으니까.”
당시 김유준과 김성훈은 어차피 다 가족이니 귀찮게 계약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절대 혜성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그녀도 김씨 집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여유를 두고 싶어 그들의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어야 했을 테니까.
만약 위약금을 물어내지 못하면 혜성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분명 연예계에서 매장시켰을 인간들이었다.
“오늘부터 수발드는 일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해.”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두 사람이 내 신분을 공개한 적 없으니 나도 굳이 연을 끊은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겠네. 다시는 보지 말자!”
혜성은 또다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캐리어까지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집을 나선 혜성은 가방에 있는 휴대폰 녹음을 일시 중지했다.
김씨 집안사람들은 단호하게 떠나는 혜성의 뒷모습을 보니 화가 나기도 하면서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서주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저렇게 간다고? 정말 말도 안 돼.”
김성훈도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두고 보고 싶네요. 김씨 집안을 떠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겁니다.”
그는 윤혜성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그가 기회를 서윤에게 양보하라고 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성훈은 유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형, 다른 기획사에 얘기해서 절대 윤혜성과 계약하지 말라고 해.”
성훈의 말에 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분고분하던 여동생이 갑자기 반항하기 시작하자 고집을 피운 대가가 어떤지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김성훈은 형도 자기 말에 찬성하자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이 컸네. 그래도 저런 식이면 멀리 갈 수 없을 거야. 머지않아 곧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올걸?”
성훈도 연예계의 매니저들한테 절대 윤혜성과 계약하지 말라고 얘기해 둘 것이다.
김서윤은 두 오빠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는 기뻐하면서 얼굴엔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입을 열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혜성이가 화나서 떠난 거지? 오빠들 혜성이한테 너무 그러지 마. 화가 풀리면 내가 가서 사과할게. 오빠들도 혜성이를 달래주면 다시 돌아올 거야.”
서윤이 이럴수록 가족들은 윤혜성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거슬려했다.
그때 김유준이 입을 열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혜성이 만족할 줄 몰라서 그래.”
김씨 집안의 다른 형제들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분명 김씨 집안 딸이라는 신분을 얻었으면서 여전히 너랑 맞서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우리도 달래줄 생각 없으니까 너도 사과하지 마.”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또 집안 시끄럽게 이런 식으로 소란 피울 거야.”
서윤에 비하면 윤혜성은 너무 철이 없었다.
서주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서윤을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너 착한 거 다들 알고 있으니까 이런 일엔 상관하지 마. 네 오빠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래야 윤혜성도 돌아와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아버지 김태수도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고생을 해봐야 잘못을 인정하고 집에 돌아올 거라 믿고 반대하지 않았다.
서윤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혜성은 전에 세 들어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여기는 그녀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맡았던 아파트인데 김씨 집안에 들어간 뒤에도 방을 빼지 않았고, 가끔 가족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며칠 동안 이 집에 머물렀다.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순간 혼란스러웠고, 눈빛엔 약간의 조롱마저 내비쳤다.
한때 윤혜성이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자 남자 친구인 이세준이었다.
혜성은 사부님에게 입양된 뒤로 이세준 할아버지 옆집에 살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들끼리 사이도 무척 좋았다.
그때 인신매매범에게 구타당한 기억 때문에 감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사람은 바로 이세준이었다. 그때의 그는 마치 한 줄기 햇살처럼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윤혜성은 인신매매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뒤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세준은 혜성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가족들이 세준을 서울로 데려갔다.
혜성은 세준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월반까지 하며 서울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고, 그가 연예계에 데뷔하고 2년 뒤에 그녀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예계에 진출했다.
그리고 김씨 집안에 들어간 뒤 먼저 이세준에게 고백했고 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혜성은 세준도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생에서 배신의 아픔이 뭔지 톡톡히 느끼게 해줬다.
이번 생에는 다시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혜성은 싸늘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이세준은 오늘따라 혜성의 태도가 조금 쌀쌀맞다고 느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하지 않기로 한 거야?”
“누가 그래?”
혜성은 세준도 그 기회를 김서윤에게 양보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떠보기 위해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네가 그 기회를 양보했다고 성훈이 얘기해 주던데?”
“그런 일 없어. 누구한테도 양보하지 않으니까.”
세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네 둘째 오빠 말을 안 듣는다고?”
그 말에 혜성은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그 자식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세준과 김성훈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지난 생에 이세준이 자신을 찾아와 프로그램을 포기하라고 설득했을 때도 김서윤을 의심하지 않고 정말 그녀를 위하는 줄만 알았다.
세준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성훈은 네 매니저니까 분명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멋대로 굴지 마.”
세준의 말에 혜성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뭘 제멋대로 굴었는데? 그저 김서윤이 원하는 걸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제멋대로에 소란 피우는 거야?”
이어서 그녀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양보하면 김씨 집안 식구들은 나를 눈치 있다고 여기고, 너도 첫사랑이랑 맘껏 사랑할 수 있겠지.”
혜성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지난 생에 윤혜성은 식구들과 이세준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기회를 양보했다.
김씨 집안의 마케팅과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세준의 도움으로 김서윤은 요정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고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김성훈이 혜성에게 가져다준 기회라곤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은 조연에 불과했고, 결국 그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인성 문제로 방영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세준이 진작에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면서 혜성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첫 회를 보면서 알고 보니 세준이 바로 베일에 싸인 고정 게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세준이 김서윤을 티 내지 않고 챙겨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고, 서윤에 대한 세준의 감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첫 시리즈 방송을 시청하기 전에 혜성은 드라마 제작팀에 합류해 폐쇄식 촬영에 들어갔다.
그녀가 촬영을 마쳤을 땐 이미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김씨네 집안 식구들이랑 이세준과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연히 소규모 영화의 여주인공 역할을 얻게 되어, 지방의 외진 지역에서 촬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