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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젠 지긋지긋해

  • 윤혜성의 말에 김시우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 비록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그가 여동생을 잃어버린 탓에 그녀가 재벌 집 아가씨로 편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도 못하고 밖으로 떠돌게 했다.
  • 그때 윤혜성이 또 입을 열었다.
  • “마지막으로 얘기하지만 난 당신들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김서윤과 다투고 싶지도 않아.”
  • 둘째인 김성훈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생각 잘해야 할 거다. 우리 집안이랑 연을 끊겠다면 회사에서도 지원해 줄 생각 없으니까.”
  • 첫째 김유준도 한 마디 보탰다.
  • “심지어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수도 있어.”
  • 두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윤혜성더러 앞날을 위해서라도 고집부리지 말고 그만 양보하라는 뜻이다.
  • 윤혜성은 갑자기 소리 내 웃었다.
  • “일 년 동안 지원을 많이 해준 것처럼 얘기하네.”
  • “내가 킴앤씨 엔터테인먼트로 이직한 뒤로 얻은 지원은 예전에 나를 착취하던 그 작은 소속사보다 적었어. 지원이 적고 형편없을뿐더러 네티즌들의 악플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회사에서 해명조차 하지 않았잖아. 내가 직접 따낸 계약마저 김서윤에게 양보하라고? 어떻게 뻔뻔스럽게 그걸로 나를 협박할 수 있어? 뻔뻔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뻔뻔한 건 또 처음이네.”
  •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고 혜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때 여기로 이직했을 때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게 참 다행이지 뭐야? 굳이 계약 해지할 필요도 없으니까.”
  • 당시 김유준과 김성훈은 어차피 다 가족이니 귀찮게 계약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절대 혜성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 그녀도 김씨 집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여유를 두고 싶어 그들의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위약금을 물어야 했을 테니까.
  • 만약 위약금을 물어내지 못하면 혜성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분명 연예계에서 매장시켰을 인간들이었다.
  • “오늘부터 수발드는 일 없을 테니까 알아서 해.”
  •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였다.
  • “두 사람이 내 신분을 공개한 적 없으니 나도 굳이 연을 끊은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겠네. 다시는 보지 말자!”
  • 혜성은 또다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캐리어까지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 집을 나선 혜성은 가방에 있는 휴대폰 녹음을 일시 중지했다.
  • 김씨 집안사람들은 단호하게 떠나는 혜성의 뒷모습을 보니 화가 나기도 하면서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서주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정말 저렇게 간다고? 정말 말도 안 돼.”
  • 김성훈도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두고 보고 싶네요. 김씨 집안을 떠나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겁니다.”
  • 그는 윤혜성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그가 기회를 서윤에게 양보하라고 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김성훈은 유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 “형, 다른 기획사에 얘기해서 절대 윤혜성과 계약하지 말라고 해.”
  • 성훈의 말에 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 고분고분하던 여동생이 갑자기 반항하기 시작하자 고집을 피운 대가가 어떤지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 김성훈은 형도 자기 말에 찬성하자 눈을 가늘게 떴다.
  • “많이 컸네. 그래도 저런 식이면 멀리 갈 수 없을 거야. 머지않아 곧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올걸?”
  • 성훈도 연예계의 매니저들한테 절대 윤혜성과 계약하지 말라고 얘기해 둘 것이다.
  • 김서윤은 두 오빠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는 기뻐하면서 얼굴엔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입을 열었다.
  •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혜성이가 화나서 떠난 거지? 오빠들 혜성이한테 너무 그러지 마. 화가 풀리면 내가 가서 사과할게. 오빠들도 혜성이를 달래주면 다시 돌아올 거야.”
  • 서윤이 이럴수록 가족들은 윤혜성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거슬려했다.
  • 그때 김유준이 입을 열었다.
  •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혜성이 만족할 줄 몰라서 그래.”
  • 김씨 집안의 다른 형제들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 “맞아. 분명 김씨 집안 딸이라는 신분을 얻었으면서 여전히 너랑 맞서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 “우리도 달래줄 생각 없으니까 너도 사과하지 마.”
  •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또 집안 시끄럽게 이런 식으로 소란 피울 거야.”
  • 서윤에 비하면 윤혜성은 너무 철이 없었다.
  • 서주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서윤을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 “너 착한 거 다들 알고 있으니까 이런 일엔 상관하지 마. 네 오빠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 그래야 윤혜성도 돌아와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 아버지 김태수도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고생을 해봐야 잘못을 인정하고 집에 돌아올 거라 믿고 반대하지 않았다.
  • 서윤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 혜성은 전에 세 들어 살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 여기는 그녀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맡았던 아파트인데 김씨 집안에 들어간 뒤에도 방을 빼지 않았고, 가끔 가족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며칠 동안 이 집에 머물렀다.
  •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하자 휴대폰이 울렸다.
  •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순간 혼란스러웠고, 눈빛엔 약간의 조롱마저 내비쳤다.
  • 한때 윤혜성이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자 남자 친구인 이세준이었다.
  • 혜성은 사부님에게 입양된 뒤로 이세준 할아버지 옆집에 살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들끼리 사이도 무척 좋았다.
  • 그때 인신매매범에게 구타당한 기억 때문에 감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사람은 바로 이세준이었다. 그때의 그는 마치 한 줄기 햇살처럼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 윤혜성은 인신매매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뒤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 이세준은 혜성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가족들이 세준을 서울로 데려갔다.
  • 혜성은 세준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월반까지 하며 서울에 있는 학교에 합격했고, 그가 연예계에 데뷔하고 2년 뒤에 그녀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예계에 진출했다.
  • 그리고 김씨 집안에 들어간 뒤 먼저 이세준에게 고백했고 그도 거절하지 않았다.
  • 혜성은 세준도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생에서 배신의 아픔이 뭔지 톡톡히 느끼게 해줬다.
  • 이번 생에는 다시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혜성은 싸늘한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이야?”
  • 이세준은 오늘따라 혜성의 태도가 조금 쌀쌀맞다고 느꼈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 “그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하지 않기로 한 거야?”
  • “누가 그래?”
  • 혜성은 세준도 그 기회를 김서윤에게 양보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떠보기 위해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 “네가 그 기회를 양보했다고 성훈이 얘기해 주던데?”
  • “그런 일 없어. 누구한테도 양보하지 않으니까.”
  • 세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 “네 둘째 오빠 말을 안 듣는다고?”
  • 그 말에 혜성은 피식 웃었다.
  • “내가 왜 그 자식 말을 들어야 하는데?”
  • 이세준과 김성훈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지금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 그래서 지난 생에 이세준이 자신을 찾아와 프로그램을 포기하라고 설득했을 때도 김서윤을 의심하지 않고 정말 그녀를 위하는 줄만 알았다.
  • 세준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 “성훈은 네 매니저니까 분명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멋대로 굴지 마.”
  • 세준의 말에 혜성은 코웃음을 쳤다.
  • “내가 뭘 제멋대로 굴었는데? 그저 김서윤이 원하는 걸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제멋대로에 소란 피우는 거야?”
  • 이어서 그녀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 “양보하면 김씨 집안 식구들은 나를 눈치 있다고 여기고, 너도 첫사랑이랑 맘껏 사랑할 수 있겠지.”
  • 혜성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 지난 생에 윤혜성은 식구들과 이세준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기회를 양보했다.
  • 김씨 집안의 마케팅과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세준의 도움으로 김서윤은 요정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고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 김성훈이 혜성에게 가져다준 기회라곤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은 조연에 불과했고, 결국 그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인성 문제로 방영되지 않았다.
  • 더 놀라운 사실은 이세준이 진작에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았으면서 혜성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프로그램 첫 회를 보면서 알고 보니 세준이 바로 베일에 싸인 고정 게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리고 이세준이 김서윤을 티 내지 않고 챙겨주는 것을 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고, 서윤에 대한 세준의 감정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그런데 첫 시리즈 방송을 시청하기 전에 혜성은 드라마 제작팀에 합류해 폐쇄식 촬영에 들어갔다.
  • 그녀가 촬영을 마쳤을 땐 이미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김씨네 집안 식구들이랑 이세준과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 그런데 스스로의 노력으로 우연히 소규모 영화의 여주인공 역할을 얻게 되어, 지방의 외진 지역에서 촬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