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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깊은 밤 마이바흐의 썸

  • 유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속도로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다시 올라탔다.
  • 반서준은 운전대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고 유희는 괜히 몇 번이고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 그의 손은 너무 예뻤다. 뼈마디가 분명하고 가늘고 긴 손가락과 핏줄이 은근하게 튀어나온 손등이며 전부 남성적인 힘의 상징인 듯했다.
  • 약지에 끼워진 백금 반지는 차가운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 “결혼했어요?”
  • 유희는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 아마 유부남과 잤다는 사실이 그녀가 속으로 느끼고 있던 죄악감을 한 층 더 깊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인 듯했다.
  • “내가 널 집에 데려다주는 거랑은 충돌될 거 없는 일이야.”
  • 반서준은 유희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 유희는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인 채 안전벨트를 했다.
  • 차 안에서는 계속 띠링띠링 소리가 울리며 안전벨트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고 지시음이 울리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워 짜증이 치미는 소리였다.
  • 처음으로 비싼 외제차에 앉은 유희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계속해서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 반서준은 담담하게 허둥지둥하고 있는 유희를 힐끗 쳐다본 뒤 몸을 기울였다.
  • 유희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양손으로 가슴을 가린 것이었다.
  • 그녀는 마치 상처 입은 고슴도치처럼 조금만 기척이 있어도 온몸에 가시를 세웠다.
  • 반서준은 유희의 안전벨트를 제대로 채워주었고 두 사람은 거리가 가까워진 상태였다.
  • 너무 가까워서 그의 따뜻한 숨결과 샌달우드 향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 유희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 반서준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 “나 그렇게까지 굶주리지 않았어. CCTV 아래에서 할 생각 없거든.”
  • 이 남자는 분명 금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내뱉는 말은 시시각각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쑥스럽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뻔뻔한 사람이다.
  • 유희는 차창을 따라 올려다보았고 주차장의 CCTV가 마침 그들을 찍고 있었다.
  • 유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어디서 하든 수술실보다는 낫지.”
  • 이 말은 거의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데시벨이었다. 입도 거의 떼지 않고 한 말이었다.
  • 주차장을 나선 뒤 반서준은 유희가 말한 노선으로 가지 않았다.
  • 유희는 차창을 두드리며 당황하는 말투로 얘기했다.
  • “어딜 데려가는 거야? 이건 집으로 가는 길 아니잖아요. 차 세워……차 세우라고요. 안 세우면 뛰어내릴 거야.”
  • 유희는 차에서 뛰어내릴 기세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로 인해 반서준의 표정에 짜증이 한껏 더해졌다.
  • 이 여자는 왜 늘 이렇게 호들갑인 거야.
  • 그는 버튼을 눌러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뛰어내리든지. 안 막아. 속도 좀 더 올릴까? 그럼 더 멀리 구를 수 있을 텐데.”
  • 반서준은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 유희는 시속이 120킬로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 유희는 배짱이 사라졌다. 만약 정말로 뛰어내린 다면 그녀는 죽지 않아도 장애를 입을 게 뻔했다.
  • “그런 어린애들이나 쓰는 수로 날 협박할 생각하지 마. 많이 봤거든.”
  • 반서준은 다소 비꼬는 말투로 얘기했다.
  • 유희는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혹시라도 날라가 버릴까 봐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마이바흐는 근처 주유소에 멈춰 섰다.
  • 유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유하러 온 거구나.
  • 반서준은 차에서 내려 주유소 편의점에 가서 물을 샀다. 유희도 뒤따라 내렸다.
  • 반서준과 차 한 대를 타는 일은 너무나도 숨 막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숨통이 트이게 바람을 쐬어 주어야 했다.
  • 그녀는 이따가 반서준에게 어떤 말로 진실을 말하게 만들 것인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주유소를 서성거린 탓에 길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 그녀를 향해 남자아이 두 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유희는 미처 반응하기 전이었다.
  • 유희는 남자아이의 손에 들린 반 통이 넘는 페인트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 두 남자아이는 사고를 쳤다는 것을 인지하고 바로 튀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 유희는 패닉이 왔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평범하게 길을 걷다가도 페인트를 뒤집어쓰나 싶었다.
  • 페인트는 초록색이었다. 그녀가 이진철에게 당한 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었을까?
  • 그는 반서준의 차 옆에 서있었고 차에 탈 생각이 없었다.
  • 반서준은 실눈을 뜨고 페인트를 뒤집어쓴 유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괜히 시트에 페인트를 묻히면 어떡해요. 세탁비로 줄 돈도 없는데.”
  • 유희는 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저금으로는 마이바흐의 바퀴 한 쪽도 사기 힘들 것이었다.
  • 반서준은 이미 차 문을 열었다.
  • “지금 그 꼴을 하고 있는데 어떤 택시기사가 널 태워주겠어.”
  • 반서준은 유희의 손목을 잡아 그의 밀어 넣듯이 차에 태웠다.
  • 저녁 무렵인 지금 밖에서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차창 밖에는 한 층 또 한 층의 안개가 껴있었다.
  • 차량용 향수의 냄새는 이미 유희가 뒤집어쓴 페인트 냄새에 묻혀버렸고 기침이 날 정도로 강한 냄새는 머리가 아프게 만들었다.
  • 유희는 차창을 내렸다. 이 정도 도덕은 있는 그녀였다. 본인 때문에 차에 냄새가 배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 반서준은 진작에 차창을 내렸고 축축한 상태의 팔을 차창에 걸치고 있었다.
  • 유희는 도중에 수표에 대한 일을 묻기 위해 입을 반쯤 열었고 그 찰나 반서준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 그는 네이티브한 영국식 영어를 하고 있었고 유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 그녀는 가는 내내 반서준의 통화를 듣게 되었고 그녀가 살고 있는 단지에 도착했을 때 마침 통화가 끝났다.
  • 모든 것은 마치 계산이 된 상황 같았다.
  • 두 사람은 차에 앉아있었다. 관계를 가져본 적이 있기까지 한 독신 남녀 두 사람은 깊은 밤 같은 차 안에 나란히 앉아있다.
  • 운전 중이면 그나마 괜찮은데 멈추고 나니 유희는 반서준의 짐승 같은 야생성이 튀어나와 차 안에서 당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졌다.
  • “반서준 씨,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 유희는 가방을 꽉 잡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 “유희 씨, 차 한 잔 대접할 생각 없나?”
  • 매혹적인 낮은 톤의 목소리는 첼로의 선율처럼 귀 호강을 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