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4억
- “네 몸에 예은이랑 같은 혈액형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널 거들떠보기나 했을 것 같아? 하지만 너도 이제 곧 이용 가치가 사라지게 될 거야.”
- ……
- 신지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곁에 이미 강우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그녀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려가자 그녀의 어깨와 목에 있는 흉측한 상처가 드러났다.
- 신지수는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왔다. 두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순간 머리가 어질해져 오더니 잠깐 눈앞이 캄캄해졌다.
- 신지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욕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상처로 가득한 몸을 보고 있자니 꽤 가여웠다.
- 신지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도 스스로가 가여웠다. 얼마 되지도 않는 마음속 공간 속에 강우현으로 가득 채운 채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4년을 노력했지만 끝내는 안녕이라는 그 한마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그녀는 세면대 앞에 서서 세수를 하고 칫솔질을 했다. 원래부터 통증이 있었던 목이 어젯밤 울며 용서를 빌었던 탓에 더욱더 아파왔다.
- 칫솔질을 하던 그녀는 순간 구역질이 몰려와 몸을 움찔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렇게 뱉어낸 치약 거품 속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 신지수의 적응력은 굉장히 강했다. 하다못해 피를 토해내는 일마저도 적응이 되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게 된 그녀는 물을 틀어 세면대 안의 피 섞인 거품을 깨끗이 씻어냈다.
- 정리를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이미 일곱시 반이 지나 있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뱃속의 그 기형적으로 뒤틀려있던 위가 생각난 그녀는 우유 한잔을 데워서 마셨다.
- 회사로 간 신지수는 서류들을 처리하며 신우 그룹의 지난 몇 달간의 이윤을 살펴보았다. 수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신지수는 신우 그룹이 무너지는 그날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 강우현이 암암리에 신우 그룹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을 신지수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듯했다.
- 강우현은 종래로 원수는 꼭 갚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번개 같은 일 처리로 고작 몇 년 만에 주식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던 신우 그룹을 현재의 자리까지 끌어내렸다.
-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는 당해낼 수 없는 건가…’
- 강우현의 그 날카로운 수단은 그녀는 평생을 가도 터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서류 하나를 다 살펴보고 난 뒤, 신지수는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며 책상 위의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쓴맛이 서서히 목 안의 피비린내를 씻어내려 주었다.
- 썩어도 준치라고, 신지수는 몸을 일으켜 통유리창 앞에 서서 눈앞의 고층빌딩들을 바라보았다.
- 뒷일을 준비할 때가 된 것이다. 그저 크기만 한 기업이 아닌 몇십 년의 피땀이었다. 그런 회사를 그녀가 죽고 난 뒤엔 누구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아버지? 아니면 그녀의 오빠?
- 하지만 그 두 사람 다 그저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신우 그룹을 그들에게 맡긴다면 아마 몇 년 못가 가문 전체를 말아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에 생각을 굴리던 신지수는 주변 사람 중 신우 그룹을 맡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법적 남편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우 그룹을 파산시킬 생각뿐인 그 강우현 말이다.
- 침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신지수의 두 눈은 지금 이 순간 그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 그건 마치 한 방울의 먹물이 섞여든 듯 풀어질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차가운 유리 위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움직여 한기에 의해 새하얘진 손끝으로 규칙적으로 유리창을 두드렸다.
- 고요한 사무실 안에 울려 퍼지는 그 미세한 두드림 소리가 유달리 또렷하게 들려왔다.
- 드물게 머릿속을 비울 짬이 생길 때면 신지수는 멍때리기를 좋아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잠시나마 현실이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듯, 그녀는 잠깐 멍한 상태에 잠겨있곤 했다.
- 그러던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갑작스레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지수는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음에도 화면에 떠 있는 ‘아버지’ 세 글자는 똑똑히 보였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원래는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단어 중 하나여야 했지만 신지수에게는 그저 하나의 차디찬 칭호에 불과했다.
- 그녀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 “신지수, 내 계좌로 4억 이체해라.”
- 신창규는 조금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이에 신지수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 “아빠, 단지 돈 때문에 저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 신창규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 “딸이 아비한테 돈을 주는 건 당연한 이치지. 네가 신씨 가문을 도맡아 관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나라고 너한테 돈 달라는 연락을 하고 싶은 줄 알아? 나한테 돈을 주는 게 싫으면 신씨 가문의 주식을 나한테 나눠주던지.”
- 신지수는 ‘딸’이라는 글자를 되뇌었다. 감사하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차가운 ATM 기계가 아닌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왜 한 번도 그녀를 신경 써주지 않는 걸까.
- 그녀는 신창규가 자신에게 대단히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몇 마디 문안, 밥은 먹었니? 요즘 몸 상태는 좀 어때?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니? 그거면 되는데…
- 사실 그녀를 구슬리기란 굉장히 쉬운 일이었다. 그저 조금의 별것도 아닌 관심, 그 정도면 충분했다.
- “듣고 있는 거냐!”
- 신창규가 수화기 너머에서 호통쳤다. 이에 신지수는 감정을 억누른 채 입을 열었다.
- “지난주 방금 2억 보내드렸잖아요. 고작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다 쓰셨어요?”
- “고작 그만한 돈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 신창규는 조금 제 발 저린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신지수가 그토록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때때로 하루 수입만 해도 수억 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는 또다시 배짱이 생겨났다.
- “얼른 돈이나 보내. 그렇지 않으면 바로 너희 회사로 찾아가서 달라고 할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쪽팔리는지, 아니면 네가 쪽팔리는지 한번 보자고.”
- “돈은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전에 그 돈으로 뭘 하시려는 건지 말씀해 주세요.”
- 4억이라는 돈은 절대로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신지수가 고집을 꺾은 듯 하자 신창규도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 “최근에 한 투자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있는데 딱 4억이 모자라. 나중에 돈이 생기면 더는 너한테 달라고 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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