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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넌 고작 이 정도 가치야

  • “괜찮아, 그 여잔 항상 건강했어.”
  • 그래, 이것이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였다. 연적마저도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아니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강우현이 세심하지 못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생긴 문제들을 단번에 보아낼 수 있었고 한예은에게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챌 수 있었다.
  • 하지만 유독 6년을 알고 지낸 신지수에게만은 조금의 인내심도, 조금의 세심함도 없었다.
  • 신지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 밖에는 빗줄기가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걸어갔다. 가방 안에는 우산도 없었고 어차피 우산을 쓰더라도 금방 다 젖어버릴 터였다.
  • 뼛속에서 스며 나오는 한기에 신지수는 추위를 느꼈다. 원체 파랗던 입술이 이제는 추위로 인해 바짝 말라 갈라져 있었고 새까만 속눈썹 위에도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 신지수는 추위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거기에 위까지 추위로 인해 아파오자 손을 뻗어 위를 감싸던 그녀는 실수로 약지에 끼워져있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버렸다.
  • 이에 신지수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 4년을 낀 반지는 이제는 원래의 광택을 잃은 상태였고 표면이 거뭇거뭇해져 있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해 강우현과 결혼계약을 맺으면서 무심결에 뱉었던 말을 회상했다.
  • “결혼했으면 하다못해 반지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당시 그 말은 들은 강우현은 곧바로 길가 노점상에서 6,000원짜리 반지를 하나 사서 그녀에게 던져주며 조롱하듯 말했었다.
  • “자, 넌 고작 이 정도 가치야.”
  • 당시 신지수는 그저 웃어 보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말 못 할 처량함이 담겨있었다.
  •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있는 작은 반지에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약지가 반지에 쓸려 빨갛게 되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 당시 신지수는 그 반지도 오래 끼고 있다 보면 어느날엔가 맞게 될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커져 버린 반지가 그녀의 손에서 빠져버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 이는 마치 그녀와 강우현 사이의 감정 같았다.
  • 신지수는 굵은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몸을 웅크렸다. 위가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 고통으로 새빨개진 눈언저리를 지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지수는 바닥에 웅크려 앉아 반지를 주워 들고는 품 안에 움켜쥔 채 위가 더 이상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게 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 그렇게 빗속을 떠도는 객귀처럼 휘청이며 걸어가다 누군가와 부딪치게 된 신지수는 부딪친 충격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다급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 상대방은 젊은 모자였는데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 “괜찮아요.”
  •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려 신지수를 쳐다보던 꼬마 아이가 붉어져 있는 그녀의 눈시울을 발견하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 “누나 울어요?”
  • 이에 여자는 꼬마 아이의 머리를 토닥이며 미안한 듯 신지수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이를 이끌고 떠나갔다.
  • 두 모자의 등 뒤로 신지수는 자신의 엄마에게 질문하는 꼬마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누나 왜 우는 거지? 무서워서 우는 거야?”
  • “다 큰 누나가 뭐가 무서워서…”
  • 쏟아지는 빗소리에 점차 두 모자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자 신지수는 가볍게 위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들어 올려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 ‘무섭다고?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어.’
  • 혼자서 병원에 갔을 때도 무서웠고 위내시경을 받을 때도 무서웠으며 의사가 단독으로 그녀를 진찰실로 불렀을 때도 무서웠다.
  • 그렇게 결국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을 때는 무섭다 못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고,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신지수를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곁에 아무도 없이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