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하자 강우현은 신지수의 손을 잡아 그녀를 차 안에서 끌어냈다. 이에 신지수는 미처 제대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지도 못한 채 강우현에게 끌려 휘청거리며 그를 뒤따라갔다.
그런 신지수를 곧바로 채혈실로 데리고 간 강우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
“이 여자의 피를 뽑으세요. 검사는 필요 없습니다. 어서요.”
신지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현은 그녀보다 그녀의 피를 더 신뢰하고 있었다.
‘검사조차도 성가시다고 생각하다니, 내 몸 안의 암세포가 한예은의 몸에 들어갈까 걱정도 안 되나보지?’
이에 신지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우현 씨, 나 몸이 좀 안 좋은데, 오늘은 안 하면…”
그 말에 강우현의 찌푸린 두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는 몸을 굽혀 한 손으로 신지수의 턱을 움켜잡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싫다고 말할 자격 같은 건 없어. 4년 전에 우린 계약했고, 신지수 넌 계약서에 명백하게 적혀있는 대로 네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기나 해.”
‘그렇지… 4년 전에 했던 계약. 한예은이 과다출혈인 상황일 때 무상으로 헌혈한다. 계약서에 똑똑히 적혀있지.’
그것이 바로 당시 그녀가 그와 했던 거래였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한예은에게 피를 나누어 주는 것. 이는 그녀가 강우현에게 진 빚이었다.
4년 전 그때, 한예은은 a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제때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해 상처의 출혈이 심해져 급히 rh- 혈액이 필요했었다.
한예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강우현은 굉장히 초조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었고, 이에 당시의 신지수는 귀신에라도 들린 듯 한 가지 조건을 걸었었다.
“당신이 내 남자가 되는 거야. 나와 결혼해 주면 한예은을 살려줄게.”
당시 강우현의 두 눈에 가득 차 있던 경악과 눈빛 속에 서서히 차오르던 그녀를 향한 혐오를 그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신지수는 이제 더 이상 그와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강우현이 가장 곤란하고 가장 그녀를 필요로 할 때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듯 그에게 자기 말에 따르도록 강요했던 것이었다.
그 대단한 강씨 가문에서 태어난 강우현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는 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성격이 거만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자본이 있었기에 가장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고 주변 사람들도 다들 그를 우선으로 하며 평소 심한 말 한마디조차 들어본 적 없던 그에게는 그렇듯 누군가에게 협박과 강요를 받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신지수는 강우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에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인신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강우현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았다.
한예은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질투심에 마음이 쓰려왔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우선 결혼을 한 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정이 들면 사랑도 생겨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쩌면 강우현도 시간이 지나면 한예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신지수는 자신의 업보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졸지에 시한부가 되어 버리다니, 정말이지 쌤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피부를 파고든 바늘을 따라 붉은 피가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신지수의 안색은 고통으로 인해 더욱더 창백해졌다.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위내시경을 받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채혈을 해주던 간호사는 여태껏 그녀처럼 마르고 허약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이에 그녀의 새하얀 팔뚝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간호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더 버틸 수 있으시겠어요?”
신지수는 어질어질해져 오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뽑으세요. 전 괜찮아요.”
간호사는 그녀에게서 총 600cc의 피를 뽑아낸 뒤, 차마 계속하지 못했다. 여자의 손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의 체온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정신을 잃던 순간 신지수가 마지막으로 들은 한마디는 간호사를 향해 묻는 강우현의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