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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싫다고 말할 자격 없어

  • 병원에 도착하자 강우현은 신지수의 손을 잡아 그녀를 차 안에서 끌어냈다. 이에 신지수는 미처 제대로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지도 못한 채 강우현에게 끌려 휘청거리며 그를 뒤따라갔다.
  • 그런 신지수를 곧바로 채혈실로 데리고 간 강우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한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
  • “이 여자의 피를 뽑으세요. 검사는 필요 없습니다. 어서요.”
  • 신지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현은 그녀보다 그녀의 피를 더 신뢰하고 있었다.
  • ‘검사조차도 성가시다고 생각하다니, 내 몸 안의 암세포가 한예은의 몸에 들어갈까 걱정도 안 되나보지?’
  • 이에 신지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 “우현 씨, 나 몸이 좀 안 좋은데, 오늘은 안 하면…”
  • 그 말에 강우현의 찌푸린 두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는 몸을 굽혀 한 손으로 신지수의 턱을 움켜잡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너한테 싫다고 말할 자격 같은 건 없어. 4년 전에 우린 계약했고, 신지수 넌 계약서에 명백하게 적혀있는 대로 네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기나 해.”
  • ‘그렇지… 4년 전에 했던 계약. 한예은이 과다출혈인 상황일 때 무상으로 헌혈한다. 계약서에 똑똑히 적혀있지.’
  • 그것이 바로 당시 그녀가 그와 했던 거래였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한예은에게 피를 나누어 주는 것. 이는 그녀가 강우현에게 진 빚이었다.
  • 4년 전 그때, 한예은은 a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제때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해 상처의 출혈이 심해져 급히 rh- 혈액이 필요했었다.
  • 한예은의 사고 소식을 들은 강우현은 굉장히 초조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었고, 이에 당시의 신지수는 귀신에라도 들린 듯 한 가지 조건을 걸었었다.
  • “당신이 내 남자가 되는 거야. 나와 결혼해 주면 한예은을 살려줄게.”
  • 당시 강우현의 두 눈에 가득 차 있던 경악과 눈빛 속에 서서히 차오르던 그녀를 향한 혐오를 그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 그 순간부터 신지수는 이제 더 이상 그와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 그녀는 강우현이 가장 곤란하고 가장 그녀를 필요로 할 때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듯 그에게 자기 말에 따르도록 강요했던 것이었다.
  • 그 대단한 강씨 가문에서 태어난 강우현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는 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성격이 거만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자본이 있었기에 가장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고 주변 사람들도 다들 그를 우선으로 하며 평소 심한 말 한마디조차 들어본 적 없던 그에게는 그렇듯 누군가에게 협박과 강요를 받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 그리고 신지수는 강우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에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렇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인신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강우현을 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았다.
  • 한예은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질투심에 마음이 쓰려왔다.
  •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우선 결혼을 한 뒤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고 정이 들면 사랑도 생겨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어쩌면 강우현도 시간이 지나면 한예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신지수는 자신의 업보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졸지에 시한부가 되어 버리다니, 정말이지 쌤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 피부를 파고든 바늘을 따라 붉은 피가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신지수의 안색은 고통으로 인해 더욱더 창백해졌다.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위내시경을 받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 채혈을 해주던 간호사는 여태껏 그녀처럼 마르고 허약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 이에 그녀의 새하얀 팔뚝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간호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 “더 버틸 수 있으시겠어요?”
  • 신지수는 어질어질해져 오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뽑으세요. 전 괜찮아요.”
  • 간호사는 그녀에게서 총 600cc의 피를 뽑아낸 뒤, 차마 계속하지 못했다. 여자의 손은 이미 정상적인 사람의 체온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 하지만 정신을 잃던 순간 신지수가 마지막으로 들은 한마디는 간호사를 향해 묻는 강우현의 한마디였다.
  • “충분합니까? 부족하다면 계속 뽑으셔도 됩니다.”
  • 지난 몇 년 사이에 강우현은 어쩌다 이렇게 모질게 변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