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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한 이혼

절박한 이혼

김하연

Last update: 2024-05-13

제1화 시한부 판정

  • “신지수 씨, 가족분들은 같이 안 오셨나요?”
  • 신지수는 어리둥절했다. 건강검진 검사 결과 하나 가지러 왔을 뿐인데 왜 누군가와 함께 왔어야 했는지 말이다.
  • 게다가 가족이라니… 그녀에게 가족이라고 칭할만한 존재들이 있었던가?
  • 어머니는 난산으로 인해 그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녀를 돈벌이 도구로 취급했다.
  • 더욱이 그녀의 오빠는 어머니의 죽음이 그녀의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죽도록 증오했고 애인은… 그녀가 다른 여자에게서 빼앗아 온 사람이었다.
  • 눈앞의 의사가 ‘가족’이라는 두 글자를 언급하기 전까지, 그녀는 그 단어의 의미조차도 거의 잊고 있었다.
  • 잠깐동안 멍하니 있던 신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 혼자뿐이에요.”
  • 의사는 눈살을 찌푸린 채 코끝에 걸려있던 안경을 밀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난처한 듯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한 뭉치의 검사 결과지를 신지수에게 건넸다.
  • “신지수 씨, 검사결과가 나왔는데 위암 말기입니다.”
  •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젊은 나이에 시한부가 되어버린 여자를 동정하고 있는 듯, 그의 말투와 동작은 꽤 조심스러웠다.
  • 신지수는 숨이 턱 막혀왔다. 검사결과지를 건네받은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 위에 적혀있는 각종 수치를 바라보았다.
  • 의학에 문외한인 그녀도 자신의 몸안에 들어있는 그 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알 수 있었다.
  • 사실 위내시경을 할 때부터 은연중에 느껴지는 바가 있긴 했지만, 그저 차마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 의사가 사진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있었지만 신지수는 그저 멍하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 대충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고 최대한 빨리 입원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하지만 위암 말기 환자에게 시간이 얼마 정도 남아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지수는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그녀의 할아버지가 바로 그 병으로 병상에서 2년을 고통받다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 의사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 “신지수 씨, 최대한 빨리 입원하셔서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입원하면… 나을 수는 있는 건가요?”
  • 신지수는 혼잣말을 하듯 갈라진 목소리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에 의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난처한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그럼 그냥 치료 안 받을래.’
  • 신지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진단서들을 전부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의사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뒤 고개를 돌려 진찰실을 떠났다.
  • 병원을 나서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랑비와 함께 불어오는 시린 바람이 칼날처럼 아프게 그녀의 두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 신지수는 가방에 넣어두었던 우산을 꺼내 펼쳐 들었다. 하지만 비스듬히 내리는 가랑비에 우산도 한기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 3월의 날씨는 춥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신지수가 느끼는 추위는 뼛속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이었다.
  • 혈액을 타고 끊임없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한기에 손가락이 빨갛게 얼어버린 탓에 그녀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호주머니 속에 찔러넣었다.
  • 하지만 얼어버린 손은 어떻게 해도 따뜻해지지 않는 것만 같았다.
  • 신지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 그녀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날씨는 정말이지 빠르게 변해갔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봄이 되어있었다.
  • 하지만 만물이 생기를 띠는 계절이었어야 할 봄에,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 신지수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차가 길가에 멈추어 설 때까지 기다린 뒤, 느릿하게 우산을 거두고 몸을 숙여 뒷좌석에 올라탔다.
  • 그러자 기사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물었다.
  • “어디로 모실까요?”
  • “한남동 c번지요.”
  • 신지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차가 한참을 달리던 중, 신지수는 참지 못하고 가방을 열어 진단서 위의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 사진 속에 나와 있는 위는 그것이 그녀의 몸속 일부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추하게 뒤틀려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위암은 굶어서 생겨난 병이었다.
  • 강우현과 결혼한 뒤 4년 동안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성심성의껏 그의 입맛에 맞추어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었었다.
  • 집에 돌아온 그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자신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감동하여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면서.
  • 하지만 강우현은 그녀와 단 한 끼의 식사조차도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매일 식사를 차려 시간 맞춰 그에게 문자를 보낸 뒤 그를 기다렸다.
  • 그 기다림 끝에 그녀가 맞이하게 된 건 그가 아닌 위암이었지만 말이다.
  • 결국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신지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수많은 풍파를 견뎌냈었다.
  • 하지만 오늘, 거짓으로 꾸며낸 그녀의 모든 굳건함이 깡그리 무너져 내렸다.
  • 위에서 전해져오는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신지수는 몸을 웅크렸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고 꽉 깨문 이빨 사이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 그 흐느낌 소리를 들은 기사가 시선을 들어 룸미러를 쳐다보았다. 룸미러에 비친 여자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의 깡마른 등은 연신 떨리고 있었고 차 안의 공기마저 전부 그녀가 빼앗아 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 누군가가 이토록 절망에 찬 모습으로 울고 있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 “왜 그러세요, 아가씨? 실연을 당하셨어요? 아니면 일이 뜻대로 안 풀리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 뒤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다 지나갈 겁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울어도 해결되는 건 없잖아요. 그러니 돌아가서 푹 쉬어요. 내일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거예요.”
  • 그 말에 신지수는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고맙습니다.”
  • 그녀는 시한부가 된 자신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처음 보는 낯선 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 기사는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말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남동에 도착한 그는 주차할 만한 곳을 찾아 차를 세웠다.
  • 30분의 주행거리에 택시요금은 총 20,000원이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린 신지수는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진단서를 찢어서 쓰레기통 안에 던져넣었다.
  • 불어오는 한줄기 차가운 바람에 그녀는 두 볼에 말라붙어있는 눈물자국을 닦아냈다.
  • 그리고는 다시 평소와 같은 흔들림 없는 평온한 표정의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만 눈가가 조금 붉게 부어올라 있고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