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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조금의 희망이라면 차라리 주지 않는 게 더 낫다

  • “투자 프로젝트라고요?”
  • 신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창규의 말에 대해 우선 들어나 보자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에게 정말 그 분야의 경영 감각이 있었다면 할아버지도 신우 그룹을 그녀의 손에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알아들었으면 돈이나 보내. 지금 급히 써야 하니까.”
  • 이에 신지수가 말했다.
  • “돈은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그 투자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를 저한테 보내 제가 한번 살펴보게 해주셔야 해요.”
  •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이토록 통제를 받는단 말인가? 이에 창피함을 느낀 신창규는 수화기에 대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 신지수를 밑지는 물건이라고 욕하면서 애초에 임신했을 때 진즉에 지워버렸어야 했다는 둥 몇 마디 심한 말들을 하더니 또 인정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 뺨 한 대 갈기고는 사탕을 건네는 수법을 신지수는 이미 신물이 날 만큼 당했었다. 이에 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그녀는 담담히 한마디 답했을 뿐이었다.
  • “다른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 바빠요.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끊을게요.”
  • “끊지 마, 끊지 마! 보여주면 되잖아!”
  • 신창규는 행여라도 그녀가 생각을 바꾸어 돈을 받지 못하게 될까 다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 그렇게 전화를 끊고, 신지수는 컴퓨터 앞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자, 신창규가 서류를 보내왔다.
  • 그녀는 그 서류를 비서에게 보내며 한 부 프린트해서 가져오라고 하고는 겸사겸사 커피도 한 잔 부탁했다.
  • 이내 비서가 서류를 가져다주자, 신지수는 시선을 내리고 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한잔이 책상 위에 올려지고 나서야 그녀는 서류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멈추었다.
  • 커피에서는 그윽한 향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신지수는 한 손을 비우고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 커피는 최상품 블루 마운틴 원두로 내린 것으로 끝맛에 특유의 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썼다.
  • 단것을 좋아하고 쓴 것은 싫어했던 그녀는 예전에만 해도 약 한 알을 먹더라도 사탕 한 알을 삼키곤 했었다.
  •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쓰디쓴 커피에 의지해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 신지수는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고 다시 수중의 서류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했다.
  • 신창규가 투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부동산개발 프로젝트였다. 제대로 된 기획안도 있었고, 관련 증서와 부서까지, 보기에는 믿을 만해 보였다.
  • 신지수가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한 지 채 30분도 안 되었을 때 신창규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와 돈을 재촉했다.
  • 비서가 문을 두드리자, 신지수는 한쪽으로 전화를 받으며 한쪽으로는 비서를 불러들이고는 말하라는 듯 비서를 향해 눈짓했다. 이에 비서가 입을 열었다.
  • “신 대표님, 아래에 진 선생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진호가 왜 찾아온 거지?’
  • 깜짝 놀란 신지수는 더는 신창규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황급히 알겠다고 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 “내려가서 데리고 올라와. 사람 하나 시켜서 차 한 잔 내오라고 하고.”
  • 비서가 진호를 데리고 올라오는 동안 신지수는 신창규의 계좌로 4억을 송금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하지만 휴대폰 화면이 꺼질 때까지도 신창규에게서는 고맙다는 한마디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 이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결국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
  • “신 대표님, 진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 닫혀 있지 않은 사무실 문 너머로 진호가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옆에 있는 비서를 향해 손짓으로 나가보라는 뜻을 전했다.
  • “이쪽으로 앉아.”
  • 그녀는 진호를 향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녀의 사무실을 굉장히 널찍했고 통유리창 옆에는 특별히 손님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 그녀는 진호를 그곳으로 이끌고 가 소파에 앉았다. 진호는 사무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짙은 커피향을 맡을 수 있었다.
  • 그 향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역시나 반쯤 마신 커피 한잔이 보였다. 이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 “왜 아직도 커피를 마시는 거야?”
  • “마시면 안 돼?”
  • 신지수는 티테이블 위의 찻잔을 그쪽으로 밀어놓으며 되는대로 한마디 물었다.
  •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 진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보아하니 내가 어젯밤 너한테 했던 말들은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네.”
  • 그 말에 신지수는 뻗었던 손을 순간 멈추었다. 그러더니 손을 거두어들이고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같이 병원에 가야 해.”
  • 신지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진호를 보는 것이 아닌 옆쪽에 이미 시들어버린 화분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 “가서 뭐 하게?”
  • “자세히 검사해 보고, 치료 방안 확정하고, 입원해야지.”
  • 진호는 신지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과 한 달 만나지 못했을 뿐인데 신지수는 이토록 여위어 있었다.
  • 그는 예전에만 해도 감기에 걸려 주사 하나 맞는 것도 무서워 눈물을 보이던 그녀가 위암으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참겠다는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신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마에 흘러내려와 있는 잔머리가 그녀의 두 눈에 담겨있는 감정을 가려주었다.
  • “진호야, 내 병은 마치 이 화분 같아. 이미 뿌리까지 썩어버려서 더는 어떤 치료도 소용없을 거라고.”
  • “지수야, 시도도 안 해보고 치료가 될지 안될지 네가 어떻게 알아? 밤낮없이 일도 하고 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한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 쏟아부으면서 왜 네 몸에는 조금의 시간도 투자하지 않는 거야?”
  • 진호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고작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다.
  • 그녀는 건강했어야 했고, 행복했어야 했으며, 생기발랄한 모습이었어야 했고, 가장 빛나는 인생을 누렸어야 했다.
  • 그녀가 살아가야 했던 건 메말라 버린 결혼생활에 만족한 채 스스로를 일에 묶어두는 인생이 아니었고, 암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고통을 참아내는 인생은 더더욱 아니었다.
  • 진호는 신지수의 옆으로 다가가 예전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이제는 의학도 많이 발전했으니까, 네가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치료받고 수술을 받기만 한다면, 그러면…”
  • 그는 말하다 말고 순간 더는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 붉어진 신지수의 눈시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지수는 오른손으로 누렇게 메말라 버린 잎사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 “그럼 네가 한번 말해봐. 수술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데? 50%? 아니면 20%? 그것도 아니면 0.1%라도 가능성이 있긴 한 거야?”
  • 그 말에 진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