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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썩어 문드러진 이성운

  •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손정아는 유기견을 품에 안고 동물 병원으로 달려갔다.
  • 방금 그녀가 몸을 날려 강아지를 구했지만 강아지의 앞다리는 결국 차에 부딪혀 다치고 말았다.
  • 시간을 보니 틀림없이 지각이었다.
  • 손정아는 잠시 생각하다 최성운에게 전화했다.
  • “무슨 일이야?”
  • 전화기 너머 남자의 나지막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이 있어서 오전에 출근 좀 늦게 해야 할 것 같아요.”
  • 손정아가 휴가를 쓰려고 말했다.
  •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 “그런 사소한 일은 나한테 얘기할 필요 없어.”
  • 말을 마치자 전화는 어느새 툭 끊겨 있었다.
  • 손정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참 도도한 남자라니까, 그녀와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하다니.
  • 어차피 반차도 썼으니 손정아는 의사더러 유기견을 자세히 검사하도록 했다. 다행히 찰과상일 뿐 큰 문제는 없었다.
  • “입원시키고 관찰해도 될까요?”
  • 손정아는 여전히 걱정되는 듯했다.
  •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 “그럼요.”
  • 손정아는 40만 원을 선불하고 강아지를 병원에 맡겨놓았다. 며칠 지나서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양 보낼 생각이었다.
  • 손정아가 급하게 마무리를 하고 최씨 그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 “출근하러 오는 거 잊지는 않았어요? 지금이 몇 시 인지 두 눈으로 잘 봐요!”
  • 손정아가 막 비서실 문을 들어서자마자 하여름이 노기등등해서 그녀에게 달려왔다.
  • “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요.”
  • 손정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일이 있어서 늦었다고요?”
  • 하여름은 냉소를 지으며 비웃음 가득한 눈길로 손정아를 바라보았다.
  • “이봐요, 손정아 씨. 출근 두 번째 날부터 무단결근을 하다니 정말 자신이 사모님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 하여름의 비난에도 손정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 “첫째, 난 지각이지 무단결근이 아니에요. 둘째, 나는 반차를 썼으니 지각한 것도 아니에요.”
  • “아직도 감히 변명을 늘어놔요? 당신이 언제 나에게 휴가 신청했어요?!”
  • 손정아에게 삿대질까지 하는 하여름의 눈에는 화가 더욱 넘실거렸다.
  • “손정아 씨, 당신은 무단결근했어요. 당신 해고예요!”
  •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짙은 적의를 느낀 손정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밀어내고 약간 비웃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나 최 대표님에게 반차 냈는데, 하 비서장님이 무단결근이라고 해고하는 건 최 대표님이 내 휴가를 수리할 권리가 없다고 무시하는 건가요?”
  • 손정아의 반박에 부끄러워진 하여름은 손정아의 손을 잡고 대표님 사무실로 걸어갔다.
  • “헛소리하지 마요! 우리 지금 최 대표님 앞에 가서 똑똑히 얘기해요!”
  • “그래요.”
  • 손정아는 흔쾌히 동의했다.
  • 어젯밤 일까지 같이 따질 생각이었다.
  • 하여름은 손정아를 끌고 대표 사무실 앞에 도착해서 손으로 머리와 옷을 정리한 뒤 화장까지 한바탕 디테일하게 수정한 뒤에서 손을 내밀어 노크했다.
  • 하여름과 반대로 손정아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 유기견을 구하느라 깔끔하고 단정하던 정장 치마는 주름이 가득 생겼고 앞섶에는 강아지 몸에 있던 흙이 묻어 어지러워져 있었다.
  • 하여름 얼굴에 저도 모르게 드러난 쑥스러움과 존경 가득한 표정을 본 손정아는 하여름이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히는지 알 수 있었다.
  • 하여름은 최성운을 좋아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녀는 마침 최성운의 이름뿐인 약혼녀였다,
  • 어쩐지 하여름이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더라니.
  • “들어와.”
  • 최성운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리자 하여름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하여름 얼굴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 손정아는 최성운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 밤색 웨이브 머리를 하고 빨간 짧은 치마에 정교한 메이크업을 한 그녀는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분위기가 있었다.
  • 아침에 하마터면 유기견을 칠 뻔하고 그녀에게 욕지거리까지 뱉던 여자 아냐?
  • “최 대표님, 이건 다음 시즌에 출시될 메인 제품들입니다…”
  • 최성운 옆에 바싹 붙어있는 그녀의 매혹적인 눈에는 알아채기 힘든 매료된 기색이 스쳤다.
  • 그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또 최성운의 추종자 같았다.
  • 이 남자, 대체 얼마나 많은 썩어 문드러진 이성운을 갖고 있는 거야?!
  • 손정아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약간 불만스레 도도한 남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 검은색 아르마니 수작업 양복은 그의 완벽한 몸매를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짙은 눈썹과 오뚝 솟은 콧날, 얇고 섹시한 입술은 마치 하느님의 가장 완벽한 행운아처럼 온몸에서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 확실히 멋있고 돈도 많으니 많은 여자를 빠져들게 하는 자본은 갖고 있었다.
  • 하지만 손정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 그녀는 이렇게 여기저기서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잘난 체하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됐어, 어차피 그와는 겨우 3개월의 도박 같은 약속에 불과하니 3개월이 지나면 그들의 혼약은 파기될 수 있었다.
  • 그가 얼마나 많은 썩어 문드러진 이성운이든 말든 그녀와 무슨 상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