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아는 서류를 분류대로 나눠놓았다. 기억력이 아주 좋았던 그녀는 한 번 본 내용은 절대 잊지 않았다. 속으로 서류 내용을 대충 이해한 다음 최종 필요한 데이터를 확인하고서야 입력을 시작했다.
과정이 번잡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난이도가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곧 손에 익었고 속도도 갈수록 빨라졌다.
빠르게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에 주의를 끌린 다른 직원들이 작은 소리로 의논했다.
“손정아 씨 타자소리가 얼마나 빠른지 봐봐요, 내 속도가 충분히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절대 비교가 안 되겠어.”
“시골에서 와서 이런 건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아주 깔끔하게 할 줄을 몰랐어.”
“맞아, 그거 봤어? 오늘 오전에 일할 때도 아주 효율적이었어. 비록 시골에서 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어. 아니면 어떻게 최 대표님의 약혼녀가 될 수 있었겠어. 게다가 이 혼약은 최 어르신이 정한 거라고 하던데 최 어르신이 바보도 아닐 거잖아.”
“그러면 또 어때? 최 대표님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못 봤어? 그녀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지금은 비서장한테 미움까지 샀어. 오늘도 일부러 저런 힘든 일을 맡겼으니 앞으로 절대 편히 지내지 못할 거야. 그녀가 얼마나 버티는지 봐야지.”
“에휴, 몰라몰라. 우리가 신경쓸 일도 아니고 부주의해서 우리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되지…”
“…”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나지막하게 귓속을 파고 들었지만 손정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너무 힘들게 일할 생각하지 않고 배 고프면 간식을 먹고 목이 마르면 차를 한 잔 마시고 피곤하면 화장실에 가면서 스트레스를 완화했다.
저녁 퇴근시간이 됐지만 오늘 업무량이 많았던 탓에 대부분 사람은 퇴근을 서두르지 않았다. 손정아는 먼저 저녁을 먹고 다시 천천히 돌아와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절대 배를 곯으면 안 되는 성격이었기에 밥은 꼭 제시간에 먹어야 했다.
하여름은 그녀가 돌아오자 화가 나서 책상을 탕 쳤다.
“손정아 씨! 일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어디 함부로 싸돌아다녀요! 내일 필요하니까 오늘 반드시 이 데이터 통계를 마쳐야 한다고 내가 얘기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간식 먹고 물 마시고 또 조금 지나서는 함부로 나가고 대체 어쩌겠다는 거예요! 하기 싫으면 대놓고 얘기해요, 내가 다른 사람한테 맡길 거니까. 당신 때문에 일이 지체돼서 내일 회사에 손실을 입히면 책임질 수 있겠어요?”
하여름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손정아는 손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렸다.
“오늘 안에 완성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아직 7시도 되지 않았고 나도 생각이 있어요.”
“여기서 큰소리치지 말아요. 당신은 일을 얼마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하여름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손정아가 한 마디 외쳤다.
“그만 해요!”
하여름은 바로 입을 다물었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손정아는 평소에 시끄러운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하여름은 하필이면 한 번 또 한 번 성가시게 굴었다.
“지금 이런 말 내일 내가 완성하지 못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 이제 일을 시작해야겠으니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떠나줘요. 나한테 영향 주고 있다고요, 알겠어요? 당신이 계속 여기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마지막에 업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이 나한테 영향 줬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때문에 최종 책임은 내가 아니라 당신한테 있는 거예요.”
하여름은 손정아의 카리스마에 깜짝 놀랐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 달갑지 않은 마음에 화가 치밀어서 더욱 화가 났다.
“아주 잘났어… 벌써 나한테 책임을 떠넘긴다 이거예요? 그래요! 내일 완성하는지 두고 볼 거예요!”
하여름은 잔뜩 화난 얼굴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손정아에게 화풀이를 하지 못했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일 다 끝내지 못하면 아무도 퇴근할 생각하지 마요!”
손정아는 냉소를 지을 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일했다.
다른 직원들이 하나둘 떠나고 사무실에는 손정아 혼자 남았다.
저녁 9시 반이 되자 손정아는 마지막으로 키보드를 탁 누르며 모든 일을 마무리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오늘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쉴 새 없이 10시나 11시까지 서둘러야 완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효율적으로 시간을 계획했기에 홀가분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