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열한 시가 다 됐는데 손정아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어디서 돌아다니는지 모르겠네.”
목이 말라서 물 마시러 내려온 최성운의 귀에 최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사모님이 이어 말했다.
“역시 시골에서 온 것답게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지 행동거지가 신중하지 못해. 이렇게 늦게 어디서 싸돌아 다니느라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겠어!”
최성운은 들을수록 이상했다. 하지만 어제 자신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떠올리니 이상한 기분이 바로 사라졌다.
어차피 그녀가 뭘 하든 크게 상관없었다.
최 사모님은 일부러 최성운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성운아, 손정아 그 여자 혼자 행동가짐이 바르지 않은 건 괜찮아. 하지만 소문이라도 나서 네 이름에까지 먹칠하면 큰일이야. 어쨌든 이제는 적지 않은 사람이 그녀를 본 적 있고 그녀가 네 약혼녀라는 거 알잖아. 내 생각엔 하루빨리 이 혼약 물리고 그녀를 우리 집에서 내보내는 게 좋겠어. 계속 이대로 이어가다가 언젠가는 무슨 일이 생길 거야. 나중에 우리 최씨 가문더러 책임지라고 하면 우리가 너무 억울하잖아.”
최성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3개월 뒤면 혼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했어요.”
“3개월을 더 기다려야 해?”
최 사모님이 소리를 질렀다.
“이제 겨우 며칠째인 것도 이미 참을 수 없단 말야. 너 할아버지랑 얘기해서 빨리 손정아 쫓아버려.”
“그럼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얘기하세요.”
최성운은 최 사모님을 슥 훑어보았다.
최 사모님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혼약 파기 얘기를 꺼내면 틀림없이 된통 혼날 것이다.
최성운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에 도착하자 책상 위에 놓은 휴대폰 액정이 켜지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메시지를 누르자 단 세 글자가 보였다.
“살려줘.”
낯선 번호인 것을 보고 장난 문자일 거라 생각한 그는 무시하고 계속 마지막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계속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
어느새 새벽이 되고, 최성운은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어디 간 걸까?
최성운은 눈을 감았다. 됐어, 그녀가 어디 가든 무슨 상관이야!
몇 초 뒤, 그는 다시 몸을 뒤척였다. 정상적이라면 그녀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구조 문자를 떠올린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서 최 어르신과의 문자 기록을 뒤적였다.
전에 어르신이 그에게 손정아의 번호를 보냈지만 저장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아까 구조 문자가 손정아가 보낸 것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고?
최성운은 벌떡 일어나서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
그는 순간 당황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옷을 입은 최성운은 빠르게 밖으로 나가 차에 탔다. 생각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먼저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 적어도 회사에 가면 경비원에게 손정아가 언제 회사를 떠났는지 물을 수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최성운이 칠흑같이 어두운 건물을 발견하고 묻자 경비원이 답했다.
“전기회로에 문제가 생겼는데 새벽에 수리하는 기사가 올 테니 직원들 출근에는 영향이 없을 겁니다.”
손정아의 행방을 묻자 경비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본 적이 없습니다.”
최성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출근을 안 했어요?”
“아침에 출근하는 건 봤습니다만, 퇴근할 때 나오는 건 못 봤네요.”
경비원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절대 잘못 기억했을 리 없습니다.”
최근 손정아는 회사에서 핫한 인물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그녀를 주시했다. 만약 손정아가 눈앞에서 지나갔다면 경비원이 못 봤을 리 없었다.
그 말은 손정아가 아직도 건물 안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왜 그에게 구조 문자를 보냈을가?
경비원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참, 오늘 몇몇 직원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비서장이 손정아 씨에게 아주 많은 일을 맡겨서 오래 야근해야 할 거라고 하던데 혹시 야근하다 힘들어서 잠든 게 아닐까요?”
더 짐작할 겨를 없이 최성운은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경비원도 그를 따라 함께 올라가서 불을 비춰주었다.
“손정아?”
“손정아!”
최성운이 몇 번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손정아 책상 앞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가방이 책상 위에 놓여있고 밑을 내려다보니 두 다리가 보였다.
최성운은 다급하게 몸을 쪼그렸고 경비원의 불빛도 따라 밑을 비추었다.
불빛 아래, 최성운은 손정아가 창백한 얼굴로 웅크리고 앉아 온 몸을 덜덜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