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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유언장

  • 신지수가 미처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한예은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마디 설득했다.
  • “우현아, 신지수 씨는 네가 보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서 한번 만나봐.”
  • 그 한마디를 신지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에 그녀는 갑자기 역겨움이 밀려왔다.
  • 그녀는 그렇듯 굴욕을 자초하는 질문을 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강우현의 정인까지도 그녀를 불쌍해하며 그녀의 남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강우현은 지난 반 달 동안 한예은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방치해놓은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 신지수는 지난 4년을 생각하며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웃고 있지 않은 채 차가운 한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 신지수는 통화가 언제 끊어졌는지도 모른 채 그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손이 저려올 때쯤이 되어서야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니, 화면은 이미 꺼져있었다.
  • 신지수는 숨을 격하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손을 들어 피를 닦아냈다.
  • 피가 손에 묻어 굉장히 찝찝했지만, 신지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휴대폰을 붙잡고 강우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 “우리 이혼해.”
  • 신지수는 그 뒤로 장장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강우현에게서는 그 어떤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
  •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그는 이미 한예은과 함께 잠들어 있을 것이다. 손에 묻은 피는 이미 말라붙어 역겨울 정도로 끈적이고 있었다.
  • 신지수는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가 손에 묻은 피를 깨끗이 씻어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마음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익숙한 듯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와 진통제와 항암제를 먹었다. 진호가 그녀에게 준 강한 진통제에는 마취제 성분이 들어있었다. 그런 약물은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에만 처방하는 약물로 많이 먹으면 의존증세가 생길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어질 수가 있었다.
  • 그녀는 약을 전부 쏟아내 평범한 병에 넣은 뒤 서랍 안에 던져넣었다.
  • ‘강우현 따위, 이제 더는 아쉽지 않아. 불과 16년을 좋아했고, 6년을 함께 했으며,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을 뿐이잖아… 내려놓지 못할게 뭐가 있겠어.’
  • ……
  • 날이 어렴풋이 밝아올 무렵, 신지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 침대에서 꾸물거리는 습관이 없었던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협의서를 하나 작성해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 이혼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장 변호사는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의문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많은 것들을 묻지 않은 채 그저 이혼 협의서의 내용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예를 들면 재산 분할 같은 것들 말이다.
  • 하지만 그런 상세한 조항들은 얼굴을 보고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신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 “장 변호사님, 오늘 시간 되시나요?”
  • 장 변호사가 답했다.
  • “됩니다.”
  • 이에 신지수가 말했다.
  • “그럼 혹시 제 쪽으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만나서 자세히 얘기하죠.”
  • 그러자 장 변호사가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물건들 챙겨서 바로 가겠습니다.”
  • 장 변호사는 신우 그룹 법무팀장이었다. 그는 당연히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이혼 협의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그에게 유서에 관해서도 말할 생각이었다.
  • 신지수는 그에게 주소를 보내준 뒤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녀는 외출하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화장을 했다. 병세가 완연한 자신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생기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 거울에 비친 매력적인 자신을 바라보며 신지수는 미소 지었다. 오늘이 지나면 그녀에게는 내일이 또 있었다.
  • 장 변호사가 아침을 못 먹었을 것이 걱정된 신지수는 되는대로 두 사람 분의 아침을 준비했다.
  • 그렇게 아침 아홉 시가 막 지났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신지수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대충 벽에 걸어두고는 문을 열러 나갔다. 찾아온 사람은 바로 장 변호사였다.
  • “신 대표님.”
  • “어서 들어오세요. 식사는 하셨나요?”
  • 신지수가 물었다. 그러자 장 변호사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 “이미 먹었습니다.”
  • 이미 아침을 먹었다는 그의 말에 혼자서 아침을 먹기가 쑥스러웠던 신지수는 급히 우유를 한잔 마시고는 차를 준비해 응접실로 향했다.
  • 장 변호사는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하지만 신우 그룹의 대부분 주식을 강우현의 이름으로 돌리겠다는 신지수의 말을 들은 순간,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는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 “신 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신우 그룹은 대표님께서 결혼하시기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라서 남편분께서는 그 재산에 지분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 이혼할 때 재산 분할로 인해 대판 싸우고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가는 경우를 많이 봐왔던 그로서는 결혼 전 소유하고 있던 재산까지 순순히 넘겨주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 더군다나 이는 수백억대의 회사가 엮여있는 문제이기에 신우 그룹의 다른 주주들이 동의할지 말지는 막론하고서라고 그녀의 아버지부터 이를 반대하고 나설 것이었다.
  • 만약 그녀가 이혼을 하면서 회사를 넘기려 한다는 것을 그녀의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아마 엄청난 난리가 날 것이다.
  • “알아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장 변호사님과 상의할 문제가 바로 제 유…”
  • 신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러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누가 찾아왔는지 나가봐야겠어요.”
  • 문이 열리자 검은 인영 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곧이어 그녀를 덮쳐오는 한기에 신지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