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수가 미처 무슨 말을 내뱉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한예은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마디 설득했다.
“우현아, 신지수 씨는 네가 보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서 한번 만나봐.”
그 한마디를 신지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에 그녀는 갑자기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그렇듯 굴욕을 자초하는 질문을 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강우현의 정인까지도 그녀를 불쌍해하며 그녀의 남자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강우현은 지난 반 달 동안 한예은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방치해놓은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신지수는 지난 4년을 생각하며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웃고 있지 않은 채 차가운 한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신지수는 통화가 언제 끊어졌는지도 모른 채 그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손이 저려올 때쯤이 되어서야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으니, 화면은 이미 꺼져있었다.
신지수는 숨을 격하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입가에서는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손을 들어 피를 닦아냈다.
피가 손에 묻어 굉장히 찝찝했지만, 신지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휴대폰을 붙잡고 강우현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우리 이혼해.”
신지수는 그 뒤로 장장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강우현에게서는 그 어떤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그는 이미 한예은과 함께 잠들어 있을 것이다. 손에 묻은 피는 이미 말라붙어 역겨울 정도로 끈적이고 있었다.
신지수는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가 손에 묻은 피를 깨끗이 씻어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마음까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익숙한 듯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와 진통제와 항암제를 먹었다. 진호가 그녀에게 준 강한 진통제에는 마취제 성분이 들어있었다. 그런 약물은 고통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에만 처방하는 약물로 많이 먹으면 의존증세가 생길 수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어질 수가 있었다.
그녀는 약을 전부 쏟아내 평범한 병에 넣은 뒤 서랍 안에 던져넣었다.
‘강우현 따위, 이제 더는 아쉽지 않아. 불과 16년을 좋아했고, 6년을 함께 했으며,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을 뿐이잖아… 내려놓지 못할게 뭐가 있겠어.’
……
날이 어렴풋이 밝아올 무렵, 신지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꾸물거리는 습관이 없었던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협의서를 하나 작성해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이혼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장 변호사는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의문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많은 것들을 묻지 않은 채 그저 이혼 협의서의 내용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예를 들면 재산 분할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세한 조항들은 얼굴을 보고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신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장 변호사님, 오늘 시간 되시나요?”
장 변호사가 답했다.
“됩니다.”
이에 신지수가 말했다.
“그럼 혹시 제 쪽으로 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만나서 자세히 얘기하죠.”
그러자 장 변호사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물건들 챙겨서 바로 가겠습니다.”
장 변호사는 신우 그룹 법무팀장이었다. 그는 당연히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이혼 협의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그에게 유서에 관해서도 말할 생각이었다.
신지수는 그에게 주소를 보내준 뒤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녀는 외출하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화장을 했다. 병세가 완연한 자신의 얼굴을 조금이나마 생기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울에 비친 매력적인 자신을 바라보며 신지수는 미소 지었다. 오늘이 지나면 그녀에게는 내일이 또 있었다.
장 변호사가 아침을 못 먹었을 것이 걱정된 신지수는 되는대로 두 사람 분의 아침을 준비했다.
그렇게 아침 아홉 시가 막 지났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신지수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대충 벽에 걸어두고는 문을 열러 나갔다. 찾아온 사람은 바로 장 변호사였다.
“신 대표님.”
“어서 들어오세요. 식사는 하셨나요?”
신지수가 물었다. 그러자 장 변호사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이미 먹었습니다.”
이미 아침을 먹었다는 그의 말에 혼자서 아침을 먹기가 쑥스러웠던 신지수는 급히 우유를 한잔 마시고는 차를 준비해 응접실로 향했다.
장 변호사는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하지만 신우 그룹의 대부분 주식을 강우현의 이름으로 돌리겠다는 신지수의 말을 들은 순간,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는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신 대표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신우 그룹은 대표님께서 결혼하시기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라서 남편분께서는 그 재산에 지분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혼할 때 재산 분할로 인해 대판 싸우고 법정 싸움으로까지 이어가는 경우를 많이 봐왔던 그로서는 결혼 전 소유하고 있던 재산까지 순순히 넘겨주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는 수백억대의 회사가 엮여있는 문제이기에 신우 그룹의 다른 주주들이 동의할지 말지는 막론하고서라고 그녀의 아버지부터 이를 반대하고 나설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혼을 하면서 회사를 넘기려 한다는 것을 그녀의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아마 엄청난 난리가 날 것이다.
“알아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장 변호사님과 상의할 문제가 바로 제 유…”
신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열러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누가 찾아왔는지 나가봐야겠어요.”
문이 열리자 검은 인영 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곧이어 그녀를 덮쳐오는 한기에 신지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