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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내가 죽으면 슬퍼할거야?

  • “됐어.”
  • 신지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틀어 올리며 짤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그냥 말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희망이라면 차라리 안 주는 게 더 나아.”
  • 진호의 뜻은 그녀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누가 살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건강한 신체를 갖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신지수는 오른손에 힘을 실었다. 그 힘에 누렇게 메말라버린 그 잎사귀가 그녀의 손안에서 부서져 손 틈 사이로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신지수의 눈빛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속에는 생기라고는 담겨있지 않았다. 그 눈빛은 진호를 더없이 두렵게 만들었다.
  • “지수야, 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거야?”
  • “내가 원하는 거라.”
  • 신지수의 눈빛이 순간 텅 비어버렸다. 표정 또한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물기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진호야, 이번 생에 엄마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 빼고 내가 부족한 게 뭐가 있었어? 돈, 권력, 내가 좋아하는 사람까지도 그렇게나 오랜 시간 내 곁에 있었잖아.”
  • 그녀가 원하는 것들은 전부다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듯하면서도 갖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 신지수는 그와 더 이상 이 화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돌려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해서 서류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 진호가 오늘 이곳까지 찾아와 그녀를 설득했던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지금의 신지수는 스스로를 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 가둔 채 그 누구도 들여보내 주지 않고 있었다.
  • “강우현 씨는 네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 “그 사람은 몰라. 알게 하고 싶지도 않고.”
  • 아프든 아니든 그녀는 여전히 그 오만한 신지수였다. 종래로 아프다는 이유로 동정을 받는 것에 대해 하찮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 게다가 강우현은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기껏해야 살아있는 혈액 창고인 그녀가 더 이상 한예은에게 피를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 뿐일 것이다.
  • 이에 침묵하던 진호는 끝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가방 안에서 약을 두 병 꺼내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 병은 강한 진통제였고 한 병은 항암제였다.
  • “커피 마시지 말고, 약 잘 챙겨 먹어. 제때 밥 챙겨 먹고…”
  • 진호는 주의해야 할 것들을 한가득 당부하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떠나갔다.
  •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신지수는 시선을 들어 올려 티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약 두 병을 쳐다보았다.
  • 그러고는 또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수신함에는 일로 온 메시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강우현은 그 뒤로 또 반 달 동안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동안 신지수는 예전 습관들을 하나하나 지워버렸다.
  • 더 이상 그를 위해 불을 켜두지 않았고 더 이상 음식을 차려놓고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 하지만 매일 늦은 밤이 되면 휴대폰을 확인하는 버릇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 그녀는 강우현에 대한 감정을 단번에 지워버릴 수 있을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마치 독을 품은 새싹처럼 일단 마음속으로 파고들면 그 독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것은 하늘 높이 뻗어나간 커다란 나무가 되어 모든 빛을 가려버린 상태였다.
  • 그만두고 싶다면 그 나무를 잘라내고 뿌리까지 뽑아내는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자라난 것이라 가장 여린 살점과 엮여있었기에 그것을 잘라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이 가슴에 사무쳤다.
  • 신지수는 연락처를 열었다. 그곳에는 강우현 한 사람의 연락처만이 덩그러니 저장되어 있었다.
  • 그녀는 그것을 꾹 눌렀다. 연속으로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늘 있는 일이었기에 딱히 실망할 것도 없었다. 마음이 조금 시린 것만 빼면 남은 것은 그저 저릿할 뿐이었다.
  • 신지수는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이토록 고수하는 것은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뚜… 뚜…”
  • 네 번째 통화연결음이 그렇게 한참을 울리더니 그녀의 계속된 전화에 짜증이 났던 것인지 강우현이 끝내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일이야?”
  • 수화기를 너머 신지수의 귀에 전해져오는 강우현의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 못지않게 차가웠다.
  • 그래도 17일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것에 좋은 점도 있었다. 적어도 감정은 진정이 되어 그녀는 강우현을 향해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 신지수는 조금은 갈라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 “모레 주말에 잠깐 시간 내서 집에 돌아와 줄 수 있어?”
  • “왜? 반달정도 널 건드리지 않으니까, 안달이 나서 나한테 들러붙으려고? 신지수 너 정말 천하다.”
  • 그 말에 신지수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 먼저 사랑한 사람은 그녀였고 더 깊이 사랑했던 사람 또한 그녀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감정은 어떻게든 공평할 수가 없었다.
  • 게다가 강우현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지수는 감정을 참으며 말했다.
  •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당신이 항상 원했던 일에 대한 건데, 정말 안 돌아올 거야?”
  • 강우현은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잡음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그것이 한예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달콤했다.
  • 신지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확실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강우현이 매력적인 목소리로 한마디 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다.
  • “얌전히 자. 내가 곁에 있을게.”
  • 창문을 깜빡하고 닫지 않은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추울 리가 없었다.
  • 신지수는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져 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에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마치 뭍으로 끌려 나와 죽음을 앞둔 물고기처럼.
  • 신지수는 숨을 내뱉었다. 순간 위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목을 타고 피가 한 웅큼 넘어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서서히 조용해지더니 강우현이 그녀를 향해 한마디 답했다.
  • “무슨 얘긴데?”
  • 신지수는 입안의 피를 다시 삼키고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 “우현 씨, 만약 내가 당신한테 내가 곧 죽을 거라고 말한다면 날 조금은 안타까워해 줄 거야?”
  • “허.”
  • 강우현은 비웃음을 터트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신지수,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네 몸 상태가 어떤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네가 무슨 병에 걸릴 수 있겠어? 정신병? 아니면 망상 장애?”
  • 신지수는 심장 한구석이 칼에 의해 가차 없이 도려내지는 듯 끊임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그가 잘 알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어쩌면 그녀의 초췌함은 강우현에게는 언급할 가치 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다만 정신병에 걸린 것은 사실이었다. 정신병에 걸렸으니 그를 16년 동안이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