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지는 온몸에 주삿바늘을 꽂고 병상에 누워 있다. 심각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는 몰골이 보기 힘들 정도로 흉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고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고 있다.
“A-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다들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더니만, 너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염성도 없다니. 정말 이토록 완벽한 살아있는 실험체를 본 적이 없군. 이 3년 동안 구차하게 하루하루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간 느낌이 어때? 꽤 괜찮지 않아?”
그녀를 보러 온 자는 얼굴에 띠고 있는 환한 미소와 상반되는 모질고 독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은 병문안을 하러 오지만, 서예림은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
서예림은 말하면서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주사기 안에는 투명한 노란색 액체가 담겨 있다.
“야, 이게 바로 어제 금방 성공적으로 연구해낸 항독성 혈청이야. 네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가 이걸 갖고 싶어서였지? 네가 그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로 글쎄 항체 혈청이 나오자마자 바로 너를 위해서 하나 준비해둔 거 있지? 이걸 몸에 주입하기만 하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어! 언니, 갖고 싶어?”
갖고 싶어! 아주 갖고 싶어!
서예지는 절망감을 감추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당연히 갖고 싶었다. 하지만 혈청이 그녀의 착한 여동생 손에 들어갔으니 아마 오늘이 바로 그녀의 제삿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A-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유가 바로 서예림 때문이었으니깐.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한평생을 서예림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살았다! 서예림은 의학에 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서예림이 지금처럼 세간의 주목을 받는 미녀 의학 천재가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그녀의 것을 훔친 덕분이었다.
매번 그녀가 어떤 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서예림의 디딤돌로 전락되었는지를 떠올리면 지금 당장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죽으면 안 된다, 아직 복수를 하지 못했으니깐!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그녀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을 보며 전 세계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했다.
빌어먹을 놈의 정의는 집어치워!
그녀는 그저 그 연구원들이 한시라도 빨리 항독성 혈청을 연구해내기를 바랐을 뿐이다. 3년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드디어 바로 어제, 연구진들은 항독성 혈청의 연구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던 그 물건은 지금 이 순간, 서예림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서예림을 향한 원한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숨 막힐 정도로 용솟음 치고 있다. 그토록 나약하던 그녀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었다니!
서예림은 그녀가 눈을 감고 못 들은 척 하자, 결국 자기가 이곳에 찾아온 진정한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언니, 난 언니가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 그리고 언니가 기사회생할 거라는 두려움도 없어. 어차피 이제 와서 언니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깐. 이렇게 하자, 언니의 실험실 보안 코드만 나한테 알려주면 이 항독성 혈청을 놓아주고 언니를 외국으로 보내줄게. 어때?”
서예지는 동생의 말에 눈을 뜨고 불안정한 호흡을 내쉬며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난 처음으로…사람이 이토록…뻔뻔할 수도 있다는 걸…알았어!”
그녀의 일생을 억압한 것도 모자라 그녀를 죽이기 전에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가치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다니! 꿈도 야무지네!
“싫어?”
서예림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악랄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물건이 목숨보다 더 중요해?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가 이걸 갖고 싶어서 였잖아!”
서예지는 냉소를 터뜨릴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서예림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일부러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너 그거 알아? 유 도련님이 오늘 약혼하셨어. 그리고 그 약혼녀가 바로 소꿉 친구 신채영이야! 그 미친년! 애초에 나랑 공조해서 너를 상대하겠다고 적지 않은 나쁜 짓을 꾸몄다고! 네가 목숨을 부지하면 돌아가서 복수할 수 있잖아! 그런 생각도 없는 거니?”
‘유 도련님’ 이라는 네 글자에 서예지는 드디어 단단히 자극을 받았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성씨가 다시 한번 귓가에 전해지는 순간, 그건 여전히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영원히 나을 수 없는 그 상처를 다시 한번 후벼팠다.
그녀는 서예림의 말에서 후회를 읽어냈다. 왜냐하면 유 도련님한테 시집을 가는 건 서예림의 오래된 꿈이자 소원이었으니깐.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신채영한테 파고들 기회를 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예지 또한 후회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밤낮으로!
만약 조금이라도 일찍 기선을 꿰뚫어봤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서예림의 본색을 눈치챘다면 절대 이렇게 처참한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만약 그녀가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모든 걸 신경 쓰지 않고서라도 그와의 결혼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줄곧 나쁜 마음을 품은 이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몸과 마음을 잃고 심지어 남자들한테 단체로 더러운 짓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었겠지!
또다시 악몽이 떠올랐다. 후회와 원한이 극도로 치닫게 되면 절망이 되어버리는 법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착한게 죄냐고! 도대체 왜 그녀는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그냥 죽여…. 이 사기꾼아! 난 알고 있어. 그 주사기 안에 들어있는 게…독약이라는걸!”
자극이 심했던 탓일까, 서예지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악을 썼다.
서예림이 이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방은 그저 그녀를 속이고 모든 걸 갈취한 다음 그녀를 죽일 것이다!
서예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보안 코드를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서예림은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정말 재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녀처럼 잘나가는 부잣집 아가씨가 신채영 따위의 비천한 여자한테 남자를 뺏긴 것은 막론하고, 어릴 때부터 그녀한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던 등신이 지금 감히 그녀 앞에서 언성을 높인다고?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버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나, 서예림이 못 살 것 같아?”
그녀는 말하면서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서더니 그녀한테 주사기를 꽂으려고 했다! 이 주사를 맞으면 서예지는 단 10초 만에 몸이 “허약”해져 죽어버릴 것이다.
그녀의 두 눈은 온통 음험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예지만 사라지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의 본색을 들추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극도의 흥분감에 병상에 누워 있던 허약한 여자의 눈동자에 정체 모를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간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초주검이 된 서예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치 죽기 직전 잠깐 기운을 차리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잇고 있는 주삿바늘이 뽑히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예림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주사기를 빼앗은 후 그대로 서예림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안돼!”
서예림은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 순간, 담황색의 액체는 이미 그녀의 몸에 다 주입된 상태였다. 그녀는 구조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서예지, 서예지는 분명 움직일 힘조차 없었잖아!
환자의 주삿바늘이 뽑히자 병동 내부에는 긴박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예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복수했어!
서예림은 목덜미를 꽉 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최후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선혈이 낭자한 손바닥이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에 거꾸로 비쳤다. 이것이 바로 너의 업보이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병약한 몸에서 용솟음쳤다. 서예지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왠지 섬뜩해 보일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그녀한테 기공을 연마할 것을 핍박했던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몸이 이토록 쇠약한 상황에서도 두 손으로 직접 자신의 원수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솟아나도록 도와줬으니까! 그녀는 반항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머리는 점점 더 어지러웠다. 귀를 찌르는 경보음과 함께 그녀는 다시 한번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제발 누군가가 와서 그녀를 구해줘!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는 이렇게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싶어.
의식이 흐려가고 있는 와중에 그녀는 왠지 누군가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만약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절대 그토록 가소로운 가족 간의 정에 얽매이지도, 또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