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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도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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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주머니

Last update: 2025-03-05

제1화 잔인하게 죽다

  • 4급 바이러스 연구소, 음압 병실 내부.
  • 서예지는 온몸에 주삿바늘을 꽂고 병상에 누워 있다. 심각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는 몰골이 보기 힘들 정도로 흉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고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고 있다.
  • “A-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다들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더니만, 너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염성도 없다니. 정말 이토록 완벽한 살아있는 실험체를 본 적이 없군. 이 3년 동안 구차하게 하루하루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아간 느낌이 어때? 꽤 괜찮지 않아?”
  • 그녀를 보러 온 자는 얼굴에 띠고 있는 환한 미소와 상반되는 모질고 독한 말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은 병문안을 하러 오지만, 서예림은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것이다.
  • 서예림은 말하면서 주사기 하나를 꺼냈다. 주사기 안에는 투명한 노란색 액체가 담겨 있다.
  • “야, 이게 바로 어제 금방 성공적으로 연구해낸 항독성 혈청이야. 네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가 이걸 갖고 싶어서였지? 네가 그동안 고생했다는 의미로 글쎄 항체 혈청이 나오자마자 바로 너를 위해서 하나 준비해둔 거 있지? 이걸 몸에 주입하기만 하면 그 병을 고칠 수 있어! 언니, 갖고 싶어?”
  • 갖고 싶어! 아주 갖고 싶어!
  • 서예지는 절망감을 감추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 그녀는 당연히 갖고 싶었다. 하지만 혈청이 그녀의 착한 여동생 손에 들어갔으니 아마 오늘이 바로 그녀의 제삿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A-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유가 바로 서예림 때문이었으니깐.
  •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한평생을 서예림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살았다! 서예림은 의학에 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서예림이 지금처럼 세간의 주목을 받는 미녀 의학 천재가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그녀의 것을 훔친 덕분이었다.
  • 매번 그녀가 어떤 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서예림의 디딤돌로 전락되었는지를 떠올리면 지금 당장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죽으면 안 된다, 아직 복수를 하지 못했으니깐!
  • 바이러스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그녀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을 보며 전 세계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했다.
  • 빌어먹을 놈의 정의는 집어치워!
  • 그녀는 그저 그 연구원들이 한시라도 빨리 항독성 혈청을 연구해내기를 바랐을 뿐이다. 3년 동안 고통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 그리고 드디어 바로 어제, 연구진들은 항독성 혈청의 연구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던 그 물건은 지금 이 순간, 서예림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 서예림을 향한 원한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숨 막힐 정도로 용솟음 치고 있다. 그토록 나약하던 그녀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었다니!
  • 서예림은 그녀가 눈을 감고 못 들은 척 하자, 결국 자기가 이곳에 찾아온 진정한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언니, 난 언니가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 그리고 언니가 기사회생할 거라는 두려움도 없어. 어차피 이제 와서 언니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깐. 이렇게 하자, 언니의 실험실 보안 코드만 나한테 알려주면 이 항독성 혈청을 놓아주고 언니를 외국으로 보내줄게. 어때?”
  • 서예지는 동생의 말에 눈을 뜨고 불안정한 호흡을 내쉬며 간신히 한마디 내뱉었다.
  • “난 처음으로…사람이 이토록…뻔뻔할 수도 있다는 걸…알았어!”
  • 그녀의 일생을 억압한 것도 모자라 그녀를 죽이기 전에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가치마저 빼앗아가려고 하다니! 꿈도 야무지네!
  • “싫어?”
  • 서예림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악랄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주사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그 물건이 목숨보다 더 중요해? 지금까지 버텨온 이유가 이걸 갖고 싶어서 였잖아!”
  • 서예지는 냉소를 터뜨릴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 상대방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서예림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일부러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 “너 그거 알아? 유 도련님이 오늘 약혼하셨어. 그리고 그 약혼녀가 바로 소꿉 친구 신채영이야! 그 미친년! 애초에 나랑 공조해서 너를 상대하겠다고 적지 않은 나쁜 짓을 꾸몄다고! 네가 목숨을 부지하면 돌아가서 복수할 수 있잖아! 그런 생각도 없는 거니?”
  • ‘유 도련님’ 이라는 네 글자에 서예지는 드디어 단단히 자극을 받았다!
  •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성씨가 다시 한번 귓가에 전해지는 순간, 그건 여전히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영원히 나을 수 없는 그 상처를 다시 한번 후벼팠다.
  • 그녀는 서예림의 말에서 후회를 읽어냈다. 왜냐하면 유 도련님한테 시집을 가는 건 서예림의 오래된 꿈이자 소원이었으니깐.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신채영한테 파고들 기회를 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러나 서예지 또한 후회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밤낮으로!
  • 만약 조금이라도 일찍 기선을 꿰뚫어봤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서예림의 본색을 눈치챘다면 절대 이렇게 처참한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 만약 그녀가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모든 걸 신경 쓰지 않고서라도 그와의 결혼식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줄곧 나쁜 마음을 품은 이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몸과 마음을 잃고 심지어 남자들한테 단체로 더러운 짓을 당할 뻔한 위기에 처하는 일은 없었겠지!
  • 또다시 악몽이 떠올랐다. 후회와 원한이 극도로 치닫게 되면 절망이 되어버리는 법이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착한게 죄냐고! 도대체 왜 그녀는 이런 지경에 처했을까!
  • “그냥 죽여…. 이 사기꾼아! 난 알고 있어. 그 주사기 안에 들어있는 게…독약이라는걸!”
  • 자극이 심했던 탓일까, 서예지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악을 썼다.
  • 서예림이 이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요행을 바라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방은 그저 그녀를 속이고 모든 걸 갈취한 다음 그녀를 죽일 것이다!
  • 서예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보안 코드를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서예림은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최근에는 정말 재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녀처럼 잘나가는 부잣집 아가씨가 신채영 따위의 비천한 여자한테 남자를 뺏긴 것은 막론하고, 어릴 때부터 그녀한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던 등신이 지금 감히 그녀 앞에서 언성을 높인다고?
  • “그래,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버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나, 서예림이 못 살 것 같아?”
  • 그녀는 말하면서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서더니 그녀한테 주사기를 꽂으려고 했다! 이 주사를 맞으면 서예지는 단 10초 만에 몸이 “허약”해져 죽어버릴 것이다.
  • 그녀의 두 눈은 온통 음험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서예지만 사라지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그녀의 본색을 들추어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극도의 흥분감에 병상에 누워 있던 허약한 여자의 눈동자에 정체 모를 어두운 빛이 스쳐 지나간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 초주검이 된 서예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 마치 죽기 직전 잠깐 기운을 차리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잇고 있는 주삿바늘이 뽑히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서예림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주사기를 빼앗은 후 그대로 서예림의 어깨에 찔러 넣었다!
  • “안돼!”
  • 서예림은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 순간, 담황색의 액체는 이미 그녀의 몸에 다 주입된 상태였다. 그녀는 구조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 어떻게 이럴 수가…. 서예지, 서예지는 분명 움직일 힘조차 없었잖아!
  • 환자의 주삿바늘이 뽑히자 병동 내부에는 긴박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서예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복수했어!
  • 서예림은 목덜미를 꽉 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최후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선혈이 낭자한 손바닥이 공포로 가득 찬 눈동자에 거꾸로 비쳤다. 이것이 바로 너의 업보이니라!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병약한 몸에서 용솟음쳤다. 서예지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왠지 섬뜩해 보일 정도였다.
  •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그녀한테 기공을 연마할 것을 핍박했던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몸이 이토록 쇠약한 상황에서도 두 손으로 직접 자신의 원수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솟아나도록 도와줬으니까! 그녀는 반항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 머리는 점점 더 어지러웠다. 귀를 찌르는 경보음과 함께 그녀는 다시 한번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 제발 누군가가 와서 그녀를 구해줘!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래,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는 이렇게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싶어.
  • 의식이 흐려가고 있는 와중에 그녀는 왠지 누군가가 허둥지둥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만약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절대 그토록 가소로운 가족 간의 정에 얽매이지도, 또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 사랑할 것이다!
  • 만약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