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토록 점잖고 예절 밝아 보이는 이 남자가 그녀의 목을 조를 만한 사람처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율은 점점 그가 사이코같이 느껴졌고 속으로는 이미 그한테 ‘접근금지’라는 딱지를 붙여놨다.
사도한은 하율의 인터뷰에 꽤나 협조적이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하율이가 물었다.
“내일 시간 돼? 촬영해야 돼.”
사도한은 단칼에 거절했다.
“단독 인터뷰만 허락한 거지, 촬영은 안돼.”
하율은 화를 꾸역꾸역 삼켰다.
“촬영도 단독 인터뷰의 일부야. 인터뷰를 동의했으면 촬영도 네 의무고.”
“이미 내 한계야.”
사도한은 꿈쩍도 하지 않고는 밀렸던 서류들을 검토하면서 입을 열었다.
“일 끝났으면 집 가서 짐 싸고 있어. 이따가 집 밑으로 데리러 갈 거야.”
“그래, 알겠어.”
하율은 꾸물거리며 자료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핸드폰 카메라를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때 몰래 그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율은 성호 그룹 빌딩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경호원 두 명이 붙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도망칠까 사도한이 붙여뒀던 것이다.
하율은 경호원과 함께 잡지사에 갔다가는 괜히 시끄러워질 것만 같아서 휴가를 내고 짐 싸러 집으로 향했다.
저녁 8 시쯤, 하율의 핸드폰은 울렸고 모르는 번호가 표시되었다.
“오분 내로 내려와.”
이 익숙한 목소리는 사도한이었다.
하율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렇게 제멋대로야, 진짜 자기가 뭐 세종대왕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진짜 짜증 나!
차에 타보니 사도한도 차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펼쳐보고 있었고 많이 바빠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차에 타서부터 시동을 걸 때까지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녀도 딱히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와 멀리 떨어져 구석에 앉아있었다.
사도한이 서류를 다 검토했을 때 하율은 이미 한쪽 구석에 쪼그라든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버들잎같이 가늘고 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환한 조명 탓이었는지 깊게 잠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은 사도한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더니 갑자기 또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도한은 이미 깬 줄 알고 빤히 쳐다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추웠는지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몸을 더 움츠렸다.
사도한은 결국 에어컨 온도를 높이고 차 안의 조명을 낮췄다. 보고 있었던 서류도 내려놓더니 의자에 기대어 눈 감고 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더니 귓가에는 따뜻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사도한은 깜짝 놀라서 두 눈을 부릅 뜨고는 ‘원흉’한테 시선을 돌렸다. 곤히 잠든 하율은 무방비 상태로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있었다. 너무 가까웠던지라 그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가 잠든 모습에 그는 부득이 그날 밤이 생각나더니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가 다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힘껏 밀쳐냈다.
하율은 그대로 쿵 하고 의자에 머리를 박았다. 의자는 꽤나 부드러운 재질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아팠는지 그녀는 강제 기상을 했다. 부스스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얼굴이 일그러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도한이 눈에 보였다. 그의 눈빛은 어쩐지 상당히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다시는 가까이 붙지 마!”
그 말에 하율은 자기가 모르고 의자에 부딪혔던 게 아니라 그한테 밀려서 의자에 맞았던 것을 눈치챘다.
이 좀생이!
그녀는 그를 흘겨보았다.
“내가 뭐 네 어깨가 좋아서 기댄 줄 아냐? 잠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거 아냐!”
사도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날 밤도? 인격이란 게 너한테 존재하긴 하냐?”
“너….”
하율은 씩씩 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해명 따위 안 해!”
“강한 부정은 곧 강한 긍정이라지.”
참는다, 참아!
차는 교외의 별장 구역에서 좌회전하고 또 우회전하더니 호수가 근처의 럭셔리한 별장 앞에 세워졌다.
들어서자마자 하율은 입이 쩍 벌어졌다.
거실과 2층은 모두 모던한 느낌의 검은색 강화유리로 데코 되어 있었고 계단과 바닥은 웨이브 무늬의 검은색 대리석이었다. 검은색 가죽소파에 검은색 대리석 찻상, 홀은 럭셔리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전반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뽐냈다.
사도한같은 차도남 취향이긴 해.
사도한은 가사도우미를 불러왔다.
“오 씨 아주머니야. 필요한 거 있으면 이분한테 얘기해.”
오 씨 아주머니는 오십 대 중반으로 보였고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율 씨 방은 이층에 있어요. 따라오세요.”
경호원은 그녀의 짐을 2층 동쪽 끝의 손님방으로 옮겼다. 방은 널찍했고 바닥까지 닿는 통유리까지 있었다. 개인 화장실이며 방안은 없는 게 없었다. 베이지색 벽은 고가의 딥칼라 나무 가구의 우아함을 더 했다. 그리고 핑크색 미니 소파에 흰 옷장, 전체적인 칼라는 핑크였고 침구까지 죄다 핑크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