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이 변했다고 믿을 바엔 차라리 내일이 지구 종말이라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너 같이 단순한 사람 마음이 변한다고?”
사도한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마저도 내 마음이 변했다고는 믿지 않으니 그녀도 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기다린다고?”
사도한은 술 한 잔을 더 주문하며 말했다.
“영국 황실 발레단에서 영국으로 와달라고 요청을 보냈어. 그리고 비행기 오르기 직전에 나한테 말하더라. 5년만 기다리라고.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
사도한은 머리를 들어 정찬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예리하면서도 차가웠다. 하지만 정찬성은 그의 눈빛에서 슬픔을 읽어냈다. 사도한과 조윤진은 소꿉친구였고 연애를 시작 한 지는 1년 여 되는 커플이었다. 정찬성은 자신의 친구가 조윤진에게 청혼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친구에게 돌아온 건 조윤진의 출국 소식이라니, 정찬성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윤진이 말은 그만하고 우리 술이나 마시자. 우리 둘이 술 안 마신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냐?”
정찬성이 바텐더에게 손짓하자 그가 아껴왔던 와인 한 병이 그들의 테이블에 올라왔다.
사도한은 술잔을 들고는 다 마셔버렸다.
정찬성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술 마실 때에는 그래도 이쁜 여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저 여자 봐봐. 괜찮지 않냐?”
사도한의 시선이 정찬성의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그는 금방 자리에 앉은 하율을 보았다. 하율은 이미 다른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이 그녀의 가슴 앞에 머물렀다. 그 남자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도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윤진이 말고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 없어.”
정찬성은 음흉한 눈빛으로 그의 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조윤진 영국에 5년 있어야 한다며. 너 5년 동안 부처로 지낼 거야? 너는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거기는 참을 수 있대?”
사도한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입을 떼려던 그때, “짝!”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하율이었다. 하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그 남자한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친놈. 어딜 만져? 너 오늘 죽었어!”
정찬성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순한 양인 줄 알았더니 뭐 앙칼진 고양이였네? 재밌네.”
사도한은 천천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별 관심이 없는듯했다.
정찬성은 사도한에게 심심함을 달래줄 여자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 반응 없는 사도한을 보며 그는 왠지 아쉬웠다. 정찬성은 계속해서 취해서 비틀거리는 하율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때,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도한은 몇 잔 마시지 않은 채 취해버렸고 정찬성은 그를 VIP 룸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구석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술을 깨고 있는 하율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저희 가게에서 매일 저녁마다 행운의 당첨자를 한 분씩 뽑아서 호텔 룸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데 오늘 아가씨께서 그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하율은 술이 좀 깬듯 했다. 자리로 돌아가 동료를 찾으려던 그녀는 오늘 그 행운의 당첨자가 되었다는 말에 멍해있더니 말했다.
“난생처음이네요. 이런 이벤트에 당첨되는 거… 고맙긴 하지만 필요 없어요. 제 친구들이 다 188번 방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저 돌아가야 해요.”
“제 생각에는 지금 같은 상황이면 먼저 호텔 룸에 들어가서 쉬시다가 다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하율은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조금 전 취해있을 때 자신이 어떤 사고를 쳤었는지 떠올랐다. 지금 이 헝클어진 머리와 옷차림으로 돌아간다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
“그래요. 그럼 저 대신 가서 말씀 좀 해주실래요?”
정찬성은 웃으며 승낙했다. 그리고 VIP 룸의 마스터키를 주며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즐거운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하율은 그의 서비스에 감탄하며 정찬성의 음흉한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율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전등은 고장이 났는지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봐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짜로 누리는 거라는 생각에 그녀도 그냥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신발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트리스의 부드러운 촉감 대신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그 딱딱한 것을 만지며 그 촉감을 느꼈다. 그녀의 손에 닿은 건 사람의 가슴팍 같았다. 심지어 살짝 튀어나온 듯한 그 두 개의…. 하율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갔다. 이게 무슨 일일까? 침대 위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하율은 너무 놀란 탓에 한순간에 술이 다 깨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와인바의 서비스는 과도하게 친절했다. 당첨자를 위해 호스트까지 제공해 주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