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8화 빌려쓰다

  • 하율은 울먹이며 자신의 손등을 치더니 왜서 손버릇이 나쁘게 명함을 주었냐고 자신을 자책하였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도착하였고 그녀는 문이 열리기도 전에 밑도 끝도 없이 홀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사람들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갑자기 속도를 줄일 수 없었던 그녀는 넓은 가슴에 들이박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펼쳐진 것은 흰 셔츠 검은 슈트에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잔머리 너머로 보이는 날렵한 턱 선에 긴 앞머리를 뚫고 흐르는 희미한 눈빛을 소유한 한 남자였다.
  •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으세요? 네?”
  • 그분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목소리와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으며 하율이을 부축여 일으켰다.
  • “죄… 죄송합니다!”
  • 하율은 황급히 부축을 받던 자신의 팔을 거두고는 허둥지둥 주의를 살폈다.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대표님 전용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과 함께 경호원 두 명을 거느리고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사도한을 발견했다. 도망치기엔 늦었다는 것을 감지한 하율은 다급히 이 남성분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가로채 자신의 몸에 걸쳤다. 그러면서 조급한 어투로 말했다.
  •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가 꼭 보답할게요!”
  • 사도한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다급해진 하율은 이 남성의 의사 따윈 물어볼 겨를도 없이 그의 품에 덥석 뛰어들었다. 그분의 허리를 꽉 껴안고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은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품을 한 번만 빌려 쓸게요. 제발….”
  • 남자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경직돼 있었다. 그러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 말했다.
  • “빌려는 드릴게요. 대신 아까 하신 말 잊으면 안돼요.”
  • 하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얼굴을 더 깊숙이 숨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슴은 또 조이기 시작하였다. 사도한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더니 이어서 자신이 껴안고 있는 남자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었다.
  • “형, 오랜만이야.”
  • 형이라는 소리에 하율은 놀라운 마음을 추스르며 하나님이 자신과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사도한은 무표정으로 동생 사도운을 힐끗 흘겨보았다.
  • “금방 귀국한 사람이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엔 무슨 일이니?”
  • 사도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였다.
  • “형, 우리 못 본 지 삼 년이 넘었어. 밤낮 가리지 않고 형 생각하느라 힘들었단 말이야. 봐봐, 비행기에서 내리기 바쁘게 형 만나러 왔잖아.”
  • 사도한은 동생을 믿는 자신이 바보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더니 시선을 그의 품속의 여인에게 옮겼다.
  • “이 여자는 누구냐?”
  • 사도운은 하율의 긴장함을 감지하고 감싸 안고 있던 오른손으로 허리를 토닥거리며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형 언제부터 내 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 “돌려세워봐.”
  • 사도한의 냉정함에 사도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경박한 웃음을 지었다.
  • “방금 차에서 불타오르게 놀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자기 지금 아마 형을 보기에 좀 쑥스러울 거예요. 안 그래, 우리 자기?”
  • 하율은 재빨리 발을 동동 구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베이비가 지금 이 모양으로 사람을 만나기 쑥스럽단 말이야.”
  • 사도운은 그러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 “그렇다면 우리 자기 정리가 필요한 거 같은데 화장실 다녀올래? 형이랑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 “자기 문 앞까지 바래다주면 안 돼? 우리 자기 옆에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
  • 하울은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도한이 옆에서 호시탐탐하게 지켜보고 있었기에 고개만 쳐들어도 모든 것이 들통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율은 사도운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잘 지켜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사도운은 가늘고 긴 두 눈을 깜빡이며 마치 귀여운 강아지를 어루만지듯이 하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이렇게 귀여운 우리 자기 부탁인데 들어줘야지. 형, 아무래도 내가 함께 가줘야 될 것 같아. 나중에 일 다 보고 형 찾으러 갈게.”
  • 사도운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하율이를 둘러싸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도한은 경호원에게 잘 감시하라고 명하고 비서 육지호에게 말했다.
  • “회사 로비의 CCTV를 내 사무실로 돌려놔.”
  • 사도한은 하율의 감쪽같은 사라짐에 대해 의혹이 갔고 사도운의 말 또한 믿고 싶지가 않았다. 사도한은 명함을 손으로 구겨 쥔 채 하율이가 가령 사라졌다 해도 꼭 찾아내고 말겠다고 이를 갈았다. 한편 화장실 문 앞에서 사도운은 하율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고 달싹 붙은 그녀와 사도운 사이에서는 애매모호한 기류가 흘렀다.
  • “어떻게 보답할 거예요?”
  • “밥 사 드릴게요.”
  • 하율은 긴장한 몸을 움츠리며 사도운을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사도운의 마른 몸에서 나오는 괴력에 두 팔 사이에서 벗어나기는커녕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저랑 결혼하실래요? 그걸로 보답하면 되겠네요.”
  • 사도운은 흥미진진하게 하율이를 보았고 하율은 퉁명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큰 도움을 주신 건 진심으로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런 황당한 요구를 들어 주지는 않을 거예요.”
  • 당황한 하율이을 보면서 사도운은 픽 웃더니 하율의 통통한 볼살을 꼬집었다.
  • “화났어요? 그쪽 참 보면 볼수록 귀엽네요. 저는 단지 농담을 한 것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