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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반항해도 소용없어

  • 사도한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아주 간단해. 낙태하면 널 믿어 줄게.”
  • 하율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 그를 화나게 한다면 일은 더 꼬여버리고 말 것이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 “아니, 난 그냥 너랑 대화를 하는 것뿐이니까 절대 마음에 두지 마. 어쩌면 난 임신이 아닐 수도 있어.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 “그런 거면 제일 좋고.”
  • 사도한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 “넌 이제 가봐도 돼.”
  • 하율은 손가락을 꼽으며 보름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기다려온 건 보름이 아닌 사도한의 불같은 화였다.
  • 사도한은 새파란 얼굴색으로 뷰티 잡지사의 월간호를 하율의 면전에 던지며 물었다.
  • “표지 사진 어떻게 된 거야?”
  • 표지에는 양복과 구두를 쫙 빼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열일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앞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 속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 성숙한 매력은 감춰지지가 않았다.
  • 하율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나 사진 찍는 스킬 괜찮지? 봐봐, 네 얼굴 하나도 노출 안 됐잖아.”
  • “닥쳐!”
  • 사도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내 사진을 잡지에 실어? 너네 잡지사 문 닫고 싶어서 그래?”
  •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진행한 거야. 잡지사와는 절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잡지사에 화풀이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사과할게!”
  • 하율은 두 손을 맞잡고 불쌍한 눈망울로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였다. 잠깐의 희생은 감수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가 뱉은 말은 꼭 실행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잡지사가 망하면 그녀는 출국할 방법도, 또 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 “형, 왜 화가 이렇게 많아졌어? 조윤진이 없으니까 성욕 배출할 데가 없어서 그래? 형, 내가 좋은 마음으로 얘기하는 건데 너무 참으면 안 돼. 그렇게 참고 있다가 나중에 정작 쓰려고 하면 기능이 감퇴된다고.”
  • 사도운이 거들먹거리며 계단에서 걸어 내려오며 말했다. 요염한 눈매에서 호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 “풋!”
  • 하율이 고의적으로 웃은 건 아니었다.
  • 사도한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정색하며 사납게 하율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다시 사도운에게 옮겨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엄청 한가한가 보다? 내일부터 내 회사로 출근해. 계속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살 거면 본가로 기어들어가!”
  • 그러자 사도운은 차렷 자세로 경례 포즈를 취하면서 말했다.
  • “네, 각하!”
  • 몰카 사건은 그렇게 사도운의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게 되었다. 그는 하율을 향해 윙크를 날리면서 몰래 오케이라는 손동작도 지어 보였다. 이에 하율은 두 손을 맞잡고 감사의 제스처를 취했다.
  • “흠흠.”
  • 두 사람이 공공연하게 사도한의 눈앞에서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눈빛을 주고받자 사도한은 언짢은 듯 헛기침을 두 번 했다.
  • “내일 보름이니까 넌 나랑 본가로 가고.”
  • 첫 마디는 사도운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하율에게 옮겨 말했다.
  • “너는 내일 집에 가만히 있어.”
  • “내일은 일요일이고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난 쇼핑하러 가야 돼.”
  • 하율이 바로 받아치며 말했다.
  • “반항해도 소용없어. 필요한 물건들 오 씨 아주머니한테 적어주면 아주머니가 사다 주실 거야.”
  • 사도한이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 “내가 사려는 건 사적인 물건이야.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아.”
  • 하율이 용기 내어 말했다.
  • 옆에 있던 사도운은 눈을 깜박이더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형,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내가 율이 데리고 쇼핑 다녀왔다가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본가로 갈게.”
  • “넌 닥쳐!”
  • 사도한과 하율이 동시에 그를 향해 외쳤다.
  • 사도한은 그를 화를 부르는 사고뭉치라고 생각했고 하율은 분명히 자신이 개인적인 물건이라고 얘기했음에도 자진해서 따라나서겠다는 그가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 사도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라가면서 말했다.
  • “얘기한 대로 해. 필요한 거 적어주면 오 씨 아주머니가 사다 주실 거야.”
  • 사도한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하자 그녀는 두 번째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 그날 밤, 하율은 아이스크림 5개를 먹고 한 시간 동안 냉수욕을 했더니 과연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감기에 걸리는데 성공했다.
  • 사도한은 침대 옆에 서서 하율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어때요?”
  • 그는 그녀에게 링거를 놔 준 주치의 허준에게 물었다.
  • “열이 많이 나요. 지금 맞고 있는 링거 한 병 다 맞으면 깨어날 것 같습니다.”
  • 오후가 되어서야 깬 하율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사도한, 나 본죽에서 파는 해물죽 먹고 싶은데 배달 좀 시켜 줄래?”
  • 사도한은 담담한 눈빛으로 오 씨 아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 “배달 좀 시켜줘요.”
  • 사도운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말했다.
  • “율아, 푹 쉬고 있어. 우리 금방 다녀올게.”
  • 하율은 그들이 본가에 갔다 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조심히 다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