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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너 하는 거 봐서

  • 오후에 거사를 치르고 아직 몇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 하얀 벚꽃 꽃잎이 서경천의 등에 떨어졌다. 하나를 주워 향기를 맡아보니 아주 향긋했다.
  • 그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두 손으로 석탁을 지탱한 채 날 바라보았다.
  • “이게 뭐야?”
  • “벚꽃”
  • “어디서 난 거야?”
  • “당신 등에서.”
  • 그는 내 손에 들린 벚꽃을 집어 내 입술위에 올려놓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그의 입술에서 벚꽃 향기가 느껴졌다. 아, 역시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벚꽃의 화기는 매우 짧지만 서경천이 나에게 퍼붓는 사랑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 그래, 인정한다. 어느 순간부터 난 의식이 몽롱해지더니 행여 누가 볼까 노심초사하던 마음까지 눈 녹 듯 사라졌다.
  • 벚꽃의 그의 등에 가득 떨어졌을 때에야 그는 기나긴 움직임을 멈추었다.
  • 그는 나에게 그의 코트를 던져주었다. 난 그 코트로 내 몸을 감쌌다.
  • 그는 셔츠를 입고 담배를 한 대 입에 물었다. 어두운 밤, 그의 입에 물린 담배의 불빛만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 난 갑자기 슬퍼졌다.
  • 갑자기 정원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슬픔 그리고 그가 연인의 배신을 당했다는 슬픔까지 고스란히 내 마음 속으로 전해졌다.
  • 지금쯤 서경천의 마음은 아마 호수면처럼 잔잔할 것이다. 서경천처럼 요물 같은 존재가 그렇게 바보같을 리가 없으니까.
  • 코트를 걸치고 바들바들 떨던 나는 석탁에서 내려와 하이힐을 신었다.
  • 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 “당신 양성애자예요?”
  • 내 분석에 따르면 이 사람은 여자를 돌 보듯 하는 돌부처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은 야수처럼 나한테 달려들다니. 충격을 많이 받긴 한 것 같았다.
  • 그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고개를 돌려 날 힐끗 바라보았다.
  •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
  • 내 말이 맞잖아. 왜 인정을 안 하는 거지?
  • 그는 앞으로 걷기 시작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 “어머님께서 거실에서 아주머니들이랑 카드 게임을 하고 계실 거야. 지금 이대로 들어가면 꽤 소란스러울 것 같은데.”
  •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제자리에 멈춰섰다.
  • “역시 귀찮아.”
  • 너만 아니었으면 이런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야.
  • 그런데 내 탓이라고?
  • 그는 다시 나한테로 다가오더니 날 번쩍 안아들었다.
  • 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 “지금 뭐하는 짓이야?”
  • “착각하지 마.”
  • 그는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 “너 그 정도로 매력적인 건 아니니까.”
  • 그는 나를 안고 화원의 정원을 벗어났다. 난 행여나 그가 날 바닥에 던져버릴가봐 그의 목을 꼭 안았다.
  •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담배냄새가 풍겼다. 처음 알았다. 담배냄새도 매력적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 이상했다. 서경천과 결혼한지 벌써 반 년이지만 그의 비밀을 알게된 지금, 아이러니하지만 이제서야 우리는 서로 더 가까워졌다.
  • 사실 그에게 계속 무시를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한 장소에서 뜬금없이 이런 짓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 그는 날 안고 거실로 들어갔다. 서경천의 품 속에 안긴 나를 본 아줌마들은 카드게임까지 멈춘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날 바라보았다.
  • 서경천은 인사도 하지 않고 날 안은 채 윗층으로 올라갔다. 난 그의 셔츠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등 뒤로 강렬한 눈빛세례가 느껴졌다.
  • 서경천 엄마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등을 지져버릴듯 레이저처럼 날카롭고 뜨거웠다.
  • 방에 도착한 그는 나를 침대로 던져버렸다.
  • 이것은 우리의 안방이었지만 그가 이 방에서 지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잠은 항상 다른 방에서 잤으니까.
  • 나는 샤워를 하기 위해 잠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뒤 나와보니 서경천은 여전히 내 방에 있었다.
  • 난 잠옷 옷깃을 꼭 붙잡은 채 욕실 입구에 서있었다.
  • 그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다운 모습이었다.
  • 탁자 위에 올려진 내 휴대폰에서 교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소생아, 나 오늘 산이랑 연락처 교환했다. 내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내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내가 여자애처럼 이쁘대. 하하하하. 걔 정말 너무 귀엽더라.”
  • 난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렇게 늦은 밤에 교이는 왜 나한테 전화를 걸고 난리야.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안 하고 왜 저딴 말을 하고 난리냐고.
  • 전화를 끊은 서경천은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보았다.
  • 난 가식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 “밤이 꽤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자는 거야?”
  • “오늘 저녁에 교이랑 게이바에 갔었던 거야?”
  •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 머리가 멍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응.”
  • 그는 몸을 일으켜 날 향해 걸어오더니 내 어깨를 잡고 물었다.
  • “게이에 관심이 많나봐?”
  • “어, 그게...”
  • 난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교이가 억지로 데리고 간 거야. 거기 남자들이 잘생겼다고 해서.”
  • 그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 “나보다 더 잘생겼어?”
  • 남들이 들으면 왕자병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잘생기긴 했다. 화성에서 모든 여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남자, 가장 잘생긴 남자가 바로 그였다.
  • 그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아무 말없이 방을 나갔다.
  • 난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난 결국 그를 불러세웠다. “서경천.”
  •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몸을 돌려 날 쳐다보지는 않았다.
  • “아빠가 내일 저녁에 밥 먹으러 집으로 오라네. 시, 시간 있어?”
  • 결혼하고 처갓집에 인사를 하러 갈 때 잠깐 얼굴을 비춘 뒤로는 우리 집에는 단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았다.
  • 그는 손을 문잡이에 올려두고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식은 땀이 절로 흘렀다.
  • “너 하는 거 봐서.”
  •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 내 질문에 그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방에 가서 잠옷 좀 가지고 올게. 기다려.”
  •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아까 분명 정원에서 할 거 다 한 거 아니었나?
  • 난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내 방을 걸어나가는 서경천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잠옷이 들려있었다. 그는 잠옷을 나한테 던지며 말했다.
  • “샤워할 거야. 부르면 옷 들고 들어와.”
  • “욕실 안에 옷걸이 있잖아.”
  • 내가 말했다.
  • “나도 알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잘 보일 기회 정도는 줘야겠지?”
  • 그는 흰 치아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분명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내 눈에는 악마처럼 보였다.
  • 욕구불만 변태가 욕실로 샤워를 하러 들어간 뒤 난 그의 잠옷을 품에 안은 채 초조하게 침대에서 그를 기다렸다.
  • 앞으로 나날들은 지금처럼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서경천이 결혼하던 그날 밤, 그는 나에게 계약서 한 장을 던져주었다. 우리 결혼의 유효기한은 1년이며 1년 뒤에는 각자 갈 길 가자는 말,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등등이 적혀있었다.
  • 그렇게 편안하게 1년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반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속 편히 살 수는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 내가 아직도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서경천이 욕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 “소생아!”
  • 난 스프링처럼 침대에서 튕겨오르며 잠옷을 들고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 실눈을 뜨고 살짝 보니 서경천은 욕조가 아닌 샤워실에 있었다.
  • 난 옷을 캐비닛에 올려두며 말했다.
  • “옷은 여기에 둘게요.”
  • “수건.”
  • 습기어린 샤워실에서 그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울려퍼졌다.
  • 난 캐비닛에서 수건을 꺼낸 뒤 샤워실 문을 아주 조금 열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 그런데 이때,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날 안으로 확 끌어당겼다.
  • 샤워기의 물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너머에 서있는 서경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물 속에 서있었다. 물방울이 그의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렸다.
  • 수증기속에서 그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 섹시해보였다. 난 감히 눈을 아래로 깔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바라 본 순간, 싸구려 스웨터를 입을 때 느껴지는 기분 나쁜 찌릿함이 내 온 몸을 휘감았다.
  •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얼마 못 가 유리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등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 그는 내 허리를 안은 채 내 귓가에 속삭였다.
  • “오늘 한 말 중에 한마디는 정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