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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오프닝 댄스

  • 나는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연회장 문 입구를 보았다. 검은색 예복에 보라색 나비넥타이를 맨 서경천이 걸어 들어왔다. 어쩐지 할머니가 나에게 보라색 드레스를 입으라고 하셨는데 커플로 맞춘 것이었다.
  • 확실히 천성적으로 광채를 띤 사람들이 있다. 서경천이 바로 그러하다. 그가 등장하자 원래 눈부시고 멋진 홀 안이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나는 주변 여자들의 억눌린 비명소리까지 들었다.
  • “서경천,서경천,서경천!”
  • 리듬감이 있고 감정으로 가득한 작은 외침 소리를 들으니 내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 나는 그가 나를 보지 못했길 바라면서 사람들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 케이터링 존에 들어가니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지만 드레스가 너무 꽉 끼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불룩 튀여 나와 드레스의 허리 라인이 찢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러면 정말 큰 망신이다.
  • 내가 음식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소시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위아래로 흝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예쁘네.”
  • "고마워."
  • “내가 일부러 칭찬하러 온건 아니고, 어머님께서 물어보라고 하시더구나. 이따가 오프닝 댄스 때 자신이 없으면 내가 대신 춰 줄 수는 있어. 물론 네 자리를 뺏자는 게 아니고 서경천 어머니가 부탁하시길래.”
  • "좋아. 언니가 춰 줘."
  • 내가 바라던 바이다.
  • 소시는 말을 끝내고 돌아서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정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갑자기 허리가 시큰거려 뒤를 돌아 보니 교이가 와서 내 허리를 꼬집고 있었다.
  • "아파죽겠어. 뭐 하는 거야?"
  • "왜 오프닝 댄스를 소시에게 양보하는 거야?”
  • "오랫동안 안 춰봤는데 망신당하면 어떡해?"
  • "무슨 망신을 당해? 서경천이 리드해 줄 건데.”
  • “싫어.”
  • 나는 코를 어루만졌다.
  • “여기에 맛있는 게 많네.”
  • “정말 못났어.”
  • 교이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덤벼들어 나를 물어뜯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모습이었다.
  • 연회가 시작되었다. 불빛이 어두워졌고 사람들의 얼굴이 아까처럼 그렇게 선명하지 않았다.
  • 서경천은 시종 나와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매우 즐겁고 자유로웠다.
  • 음악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중간에 장소를 비웠고 한줄기의 조명이 연회장의 중심을 비췄다.
  • 서경천이 등장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 사회자가 센세이션 하게 소개를 했다.
  • "첫 번째로 서 씨 그룹의 대표이사 서경천 도련님께서 리드하여 춤을 추실 건데 파트너는 누구십니까?”
  • 또 다른 조명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맴돌았고 사람들은 마치 도박장에서 슬롯머신을 놀듯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 나는 그저 사람들 속에 숨어서 서경천을 훔쳐보았다. 그가 밝은 빛 아래에 서있어 나는 그의 얼굴에 비낀 미세한 표정까지 다 볼 수 있었다.
  • 그는 여전히 그렇게 침착했다. 마치 우리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침착했다.
  • 나도 서경천이 좋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변의 여자든 다른 사람들이든 서경천에 대해 언급만 하면 모두 경배를 하거나 질투를 한다.
  • 교이가 말한 것처럼 오직 나만이 서경천과 이렇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죽을 맛인 듯 살아가는 것이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교이는 나를 잘 모른다. 곁의 사람이 너무 빛나서 오히려 내가 더욱 초라해지고 광택이 없어진다는 것을.
  • 머리 위의 조명이 반짝였고 나는 사람들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 기분에 만족해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그냥 이렇게 먹다가 만찬이 끝나면 그들을 따라 들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 마침내 소시의 머리 위에서 빛이 멈추었고 백합은 사람들의 주목 하에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 그녀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눈빛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 갔다.
  •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손뼉을 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의 등이 누군가에게 힘껏 밀려서 앞으로 몇 걸음 비틀거렸다.
  • 결국 소시가 무도장에 나오기도 전에 내가 오히려 먼저 나왔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 속에서 주범을 찾던 중 교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나에게 말을 했다.
  • “너 할 수 있어.”
  • 할 수 있긴 뭘 할 수 있어!
  • 장내는 떠들썩했고 심지어 누군가가 저 여자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 이 짧은 순간에 나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 눈썹을 찌푸리고 있는 의붓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하얗게 분칠한 그녀의 얼굴이 조명을 받아 더욱 귀신같이 하얗게 보였다.
  • 옆에 있던 소시는 마치 깔보고 차갑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리고 서경천의 어머니는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나타나서 몹시 그녀를 창피하게 만든 것 같았다.
  • 만약 내가 뛰어가는데 몇 초밖에 안 걸렸으면 내가 똑바로 서지 못해서 나온 거라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저들의 시선이 나를 깊이 자극했다.
  • 교이는 나에게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 내가 오랫동안 소씨 집에서 살면서 아빠가 집에 안 계실 때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었다. 집안의 집사도 그렇고 도우미도 그렇고 정원사가 나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 외에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서경천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다만 손을 내밀어 초대의 손짓을 했고 시선은 나를 보지 않았고 소시를 보지도 않았다.
  • 나는 눈을 감았다. 사실 나는 춤을 출 줄 안다. 의붓어머니의 압박으로 인해 엄마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숨어 다니느라 나의 어린 시절은 비록 불안정했지만 엄마는 항상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선생님을 찾아가 각종 예능을 가르치게 했고 또 엄마가 춤도 잘 추셨기에 나에게 자주 가르쳐주셨다.
  •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엄마 친구가 운영하시는 댄스 학원에 가서 춤을 췄다. 수강생은 아니고 연습 파트너 아니면 강사로 일해 용돈을 조금씩 벌었다.
  • 그러나 누구도 모르고 있다.
  • 나는 교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돈이 없다고 말만 하면 엄마는 나에게 엄청난 돈을 주셨다.
  • 아빠가 항상 집에 계시지 않아 소씨 집의 집사에게 용돈을 구하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매번 아빠가 돈이 모자라지 않는가고 물을 때 나는 모자라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군 했었다.
  • 원래는 숨어 버리고 싶었지만 저렇게 나를 경멸하는 시선들이 오히려 나의 의지를 자극했고 나는 등을 곧게 세웠다.
  • 나는 서경천을 향해 걸어가 손을 그의 손바닥에 얹었다.
  •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놀라지도 않았고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내 허리를 잡으면서 물었다.
  • “왈츠 출 수 있어?”
  • 나의 특기 중의 특기가 바로 모토 왈츠이다. 엄마는 항상 내가 춤을 출 때 한 마리의 영리한 공작새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 음악소리가 계속 은은하게 들려왔고 나는 잠시 귀를 기울여 듣다가 그에게 말했다.
  • "비엔나 왈츠, 일명 모토 왈츠라고도 하죠."
  • 그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나의 손을 잡고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 “이따가 춤을 출 때도 말처럼 잘 했으면 좋겠어.”
  • 그는 내가 출 줄 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밀어 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매너가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서경천을 따라 몇 발자국 춤을 췄고 이때 서경천의 눈에 비낀 놀라움을 엿볼 수 있었다.
  •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교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춤을 잘 추는지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 나와 서경천은 홀 중앙에서 맴돌았고 나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 소시와 의붓어머니의 경악한 얼굴과 시어머니의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 그리고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의 질투가 어린 얼굴들이 다 한눈에 들어왔다. 오직 교이만이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 나는 머리를 돌려 우아하게 허리를 젖혔고 서경천이 나의 춤에 따라 허리를 굽혔을 때 나는 작은 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 “당신 한 박자 틀려서 제가 바로잡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