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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너는 덥지 않니?

  • 난감하고 쪽팔렸다.
  • 서경천이 허리를 굽혀 브래지어를 줏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 “네 거야?”
  • 말을 해도, 내 것이 아니면 설마 당신 거겠어?
  • 나는 받아 잡는 순간 피가 머리 위로 솟구쳐 얼굴이 새빨개졌다.
  • 그는 흥미진진하게 위아래로 나를 쓸어 보더니 내 가슴 부위에서 시선을 멈춰 세웠다.
  • 오늘 나는 블라우스를 대충 껴 입고 위에 코트를 걸쳤다. 지금 안에 입었던 브래지어가 없어졌고 블라우스도 비닐봉투처럼 투명해서 대충 봐도 한눈에 들어온다.
  • 나는 서둘러 코트로 몸을 감쌌다. 손에 브래지어를 들고 서있는 그 모습이 아마도 처참해 보였을 것이다.
  • 나는 단번에 자신을 불리한 쪽으로 몰아넣었다. 상황을 보니 더 이상 그와 이혼에 대해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나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의 눈빛이 방금 보다 더욱 강열해진 것을 느꼈다.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코트의 깃을 꼭 쥐어 잡고 문 입구로 피했다.
  • 이때 그가 나의 코트를 잡아 챘고 코트가 찢어 지는 소리가 났다.
  •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 "코트가 브랜드가 아니라서 세게 잡아 당기면 찢어져요."
  • "엄연히 서 씨 집안 사모님인데 왜 이렇게 궁상맞어?"
  •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조금도 손의 힘을 늦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껏 잡아 챘다.
  • 찍 하는 소리와 함께 볼품없는 코트의 소매연결부위가 찢어져 나갔고 내 어깨가 드러 났다.
  • "어차피 네 눈엔 내가 변태 로 보이겠지."
  • 그가 손을 놓자 소매가 돼지 귀처럼 축 처졌다.
  • 이 꼴로 어떻게 나가지?
  • 바로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여비서가 말했다.
  • "소아가씨가 왔습니다."
  • 여비서가 서경천에게 겁먹어 제정신이 아닌건 아니겠지? 나 지금 여기 있는데?
  • 서경천은 몸을 돌려 자기 책상에 가 앉았다.
  • "응, 들어오라고 해."
  • 문이 열리자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 손으로는 코트 깃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브래지어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옷장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 사무실에도 옷장이 있었다. 안에는 양복과 셔츠가 줄지어 있었다.
  • 옷장 문은 울타리처럼 되어있어 나는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 문밖에서 누군가가 품위 있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얀색 원피스에 어깨에는 흰 짧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뒤태만 봐도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 바로 소시였다. 내 기억으로 그녀는 흰색 말고는 다른 색깔의 옷을 입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 “갑자기 어쩐 일로 왔어?”
  • “자태 씨를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마침 그가 시간이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하려고요.”
  • 소시의 목소리가 아주 듣기 좋은 편인데 목소리로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 자태가 누구지? 내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서경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더러 들러리가 되라는 거야?”
  • “당신이 누군가를 불러서 함께 가도 괜찮아요. 근데 당신 점심시간이 제한돼 있지 않아요?”
  • “밖에서 기다려. 금방 나갈게.”
  • 그들은 두세 마디 말로 대화를 마쳤고 소시는 사무실을 나갔다.
  • 나는 여전히 옷장 속에 갇혀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환해졌다.
  • 그는 나를 옷장에서 끌어냈고 자기의 옷을 하나씩 뒤졌다.
  • "당신 옷 하나도 더럽히지 않았어요"
  •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 "같이 점심 먹자."
  • "싫어요."
  • 나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 "나는 지금 너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지하는 거야."
  • 그는 옷장 문을 닫고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 나는 그에게 환히 비치는 블라우스와 소매가 찢어진 코트를 보여 주며 말했다.
  • "이 꼴로 어떻게 밥 먹으러 가요?"
  • 그는 책상 옆으로 가서 구내전화 버튼을 눌렀다.
  • "네 옷 한 벌 가지고 들어와. 속옷에서 겉옷까지 다 필요해."
  • "나 당신 비서 옷 안 입어요. 우린 스타일이 달라요."
  • "너는 선택할 여지가 없어. 네 몸에 있는 것을 입든지 아니면 저걸 입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선택 문제를 항상 잘 맞췄다. 아무리 많은 선택항목이 있어도 나는 항상 정답을 골랐었다.
  • 지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하나밖에 선택할 수가 없었다.
  • 여비서의 스타일은 언제나 비슷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스웨터에 짧은 치마, 그리고 긴 털 코트까지, 내가 입고 거울 앞에 서자 책상 뒤에서 서경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옷을 입고 길가에 서있지 마. 사람들이 호객행위 하는 줄 알고 가격을 물어볼지도 몰라."
  • 그는 간접적으로 내가 매춘부 같다고 넌지시 놀려 주었다. 내가 거울로 그를 노려 보니 그는 이미 책상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 "가자."
  • 서경천은 나를 끌고 나왔고 소시는 밖의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그의 사무실에서 함께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못 했는지 놀라운 눈길로 일어나며 말했다.
  • "소생아,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 "어.....”
  • 나는 코트 깃을 잡고 있었다. 나와 여비서는 사이즈가 달라 그녀의 속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안에 아무것도 없이 진공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점심은 서경천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식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나는 모든 것이 차갑게만 느껴지는 이런 서양식 레스토랑을 좋아하지 않는다.
  • 나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전골집이나 분식집에 가는 걸 제일 좋아한다.
  • 나는 소시의 남자친구를 처음 보았다. 그 사람만 보면 아주 괜찮아 보이지만 그와의 대조 인물이 서경천 이였기 때문에 나는 그때 소시가 왜 서경천을 버리고 지금 이 사람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외모나 키를 제외하고 카리스마만 봐도 서경천이 훨씬 났다.
  • 소시 남자친구의 이름은 강자태이다. 장사를 하는 집안이고 형편도 넉넉하지만 서 씨 집안과는 비교도 안 된다.
  •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투명 인간처럼 한쪽에 앉아있었다. 강자태는 소시에게 아주 극진해 보였다. 소시가 코트를 벗자 그가 얼른 받아 웨이터에게 건네며 걸러달라고 부탁했다.
  • 아마도 서경천과 소시가 연애할 때 이런 적이 없었을 것이다.
  • "소생아."
  • 소시가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 "안에 난방을 켰는데 덥지 않아?"
  • 그렇다. 들어오는 순간 나는 더운 느낌이 들었지만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스웨터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데다 이렇게 타이트하고 또 깊게 파여 조금만 허리를 굽혀도 노출될 수 있었다.
  • 나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 “안 더워. 오히려 추운걸.”
  •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서경천에게 말했다.
  • "자기 와이프한테 관심 좀 가져주면 안 돼요?"
  • 서경천은 웃는 듯 마는 듯 하며 말했다.
  • "어린애도 아닌데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으면 되는 거지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어."
  • 나는 소시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