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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이거 놓으세요

  • “서경천 당신과 이혼할래요.”
  • 이 한마디가 입가에 머물러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 역사가 다시 재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여비서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서경천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탁자 위의 종이를 구겨서 나한테 뿌렸는데 마침 나의 미간에 맞혔다.
  • 서경천은 운동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골프와 당구에 능하니 나를 조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 나는 아픈 눈썹을 만지며 생각했다.
  •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어. 하지만 누가 나한테 두 번씩이나 들키래?
  • 다만 이 어색한 상황에 난 어떡해야 하지?
  • 백우가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소시 아가씨, 저랑 서 씨는…”
  • “제 탓이에요. 뭐, 저번 일을 경험 삼았어야 했는데.”
  • 내가 어떻게 서경천의 귀염둥이한테서 사과를 받겠어.
  • 난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 “다음에는 아무리 급해도 노크하고 들어올게요.”
  • “사실 소시 아가씨가 본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 그의 얼굴은 더 빨개졌고 나까지 부끄러워졌다.
  • “아니에요, 아니에요.”
  •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당신이 서경천의 엉덩이를 만지는 것도요.”
  • “백우!”
  • 서경천의 광기 어린 목소리는 폭풍우 전의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 백우와 여비서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방안에 나와 서경천 오직 둘만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공기는 음침했고 금방이라도 번개가 칠 것만 같았다.
  • 나는 침을 꼴깍 삼켰고 나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서경천을 바라보았다.
  • “방해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보죠.”
  • 나는 눈치껏 재빨리 빠져나가려 했다.
  • 내가 돌아서자마자 서경천은 한 손으로 문을 막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을 잠갔다. 달칵하고 잠겨지는 소리에 나는 소름 끼칠 정도로 긴장해났다.
  • 그는 웃고 있었다.
  • 서경천은 유난히 인격이 분열된 사람이다. 그가 웃는다 해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 그가 화를 낼 땐 당연히 화난 것이다.
  • 그의 셔츠 단추는 제대로 잠겨있지 않았다. 슬쩍 곁눈질해도 커다란 가슴근육과 초콜릿 복근이 한 눈에 보였다.
  • 다행히 그가 양성애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니었다면 그 얼굴이 정말 아까웠을 것이다.
  • “오늘은 나와 백우의 불륜을 제대로 잡은 거네?”
  • 그의 웃음에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 나는 그의 눈에서 거꾸로 된 내가 보였지만 그의 깊은 눈망울 속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 “이건 당신 입으로 말한 거예요.”
  •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 “제가 비밀로 해줄게요. 저의 무덤까지 가져가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을게요.”
  • 그의 손이 나의 어깨를 움켜쥐었고 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 보아하니 그가 나의 어깨를 산산조각 낼 셈인데. 고통의 압력하에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 “누가 당신더러 문을 잠그지 않고 그런 짓을 하래요? 제가 고의적으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저는 이런 장면 보기가 정말 껄끄러워요. 거이 물은 전혀 안 보거든요.”
  • “너 동성애를 차별하는 거야?”
  • 그가 음흉하게 웃었다.
  • “저에게 그런 큰 누명은 씌우지 말아요, 감당 못하겠으니까요.”
  • 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 “제가 노크 안 하고 들어온 것은 당신에게 사과할게요. 그런데 그전에도 한번 봤었으니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아요.”
  •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은 듯해 보였다. 너무 화나서 돌았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 그는 나를 놓아주고 사무실 책상 뒤에 앉아 시가 담배를 한대 피웠다.
  • 청색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우리 둘 사이를 갈라 놓았다. 순간 나는 안전감을 느꼈다.
  • 나는 목소리를 다듬었다. 왔던 바에 할 말은 해야지.
  • “있잖아요, 서경천씨.”
  •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 “당신이 기분 좋아할 만한 일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 그가 시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서 흡입하지 않는 모습이 변태처럼 보였다.
  • 옷차림이 단정하고 맵시 있는 것이 마치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았다.
  • 그가 반응이 없자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서경천씨, 우리 이혼해요!”
  • 나의 말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지 못했다. 솜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서경천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그는 시가 담배를 한 모금 물더니 동그란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 연기는 점점 가까이 오면서 커지더니 내 목에 걸릴 것 같았다.
  •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 “네가 말한 기분 좋은 일은?”
  • “이거예요.”
  • 그는 또 눈썹을 치켜세웠다.
  • “이런 일이라면 네가 더 기쁠까 내가 더 기쁠까?”
  • “우리 둘 다요!”
  • 그의 손은 잠시 멈칫하자 나는 서경천이 시가 담배를 나에게 던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시가 담배가 비싸서 나는 던지기도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던지지 않았다.
  • 그는 차로 시가 담배의 불을 끄더니 이내 재떨이에 던져버리고는 컴퓨터를 켰다. 그러고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내게 말했다.
  • “우리 계약 기한이 아직 남았어. 아직도 반년이 남으니까 꺼져.”
  • “알아요, 하지만 저는 우리의 결혼을 반년 더 늘릴 필요가 없다고 봐요.”
  • “그럴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정해.”
  • 컴퓨터의 빛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어 마치 화장을 한 기생오라비가 따로 없었다.
  • 잘생긴 사람은 어떤 얄미운 말을 해도 쉽게 용서가 된다. 난 사무실 책상에 두 손을 올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 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 “제가 아까 당신을 화나게 한 것은 알아요. 하지만 우리 이렇게까지 끌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 “이유는.”
  • 그가 갑자기 말했다.
  • “무슨 이유요? 이혼하려는 이유요?”
  • 나는 말문이 막힌 채 한참을 생각했다.
  • “없어요.”
  • “난 이혼하지 않을 이유가 있어.”
  • “뭔데요?”
  • “너의 몸이 아주 만족스러워, 반년 더 쓸 생각이야.”
  • 그가 나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나는 냉큼 옷깃을 가렸다. 오늘은 칼라가 있는 셔츠를 입었지만 아예 다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저는 가구도 아닌데요.”
  • “난 널 가구로 생각해.”
  • 그는 다시 머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 “나가, 나 일하는 중이야.”
  • 서경천과 담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교이의 경고를 듣고서 더 이상 질질 끌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인지 분노한 나는 담대해졌다.
  • “서경천씨, 당신이 저랑 이혼하지 않으면 당신과 백우 사이의 일을 모두 할머니께 말씀드리겠어요.”
  • 마우스를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추자 나의 심장도 그의 손과 함께 멈출 것만 같았다.
  • 괜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오늘 이 사무실에서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 “너 방금 뭐라 했어?”
  • 죽어도 다시 말하지 못하겠는데, 에라 모르겠다. 오늘 기세도 배짱도 없는데.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고 얘기해야지.
  • 내가 돌아서자 서경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 “거기 서.”
  • 여기서 멈추면 내가 바보지. 내가 돌아서지 않자 서경천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다가왔다.
  • 내가 급하게 문을 향해 달려가자 서경천이 나를 와락 잡아당겼다.
  •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나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긴 것이다.
  • 아, 너무 민망해. 민망해서 미치겠다고.
  • 내가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나의 브래지어 끈이 마치 활처럼 당겨져 있었다. 나의 온몸의 무게가 이 약한 끈에 실려있었던 것이다.
  •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끈이 투명한 브래지어를 입고 뛰쳐나왔다. 이런 끈은 쉽게 끊어질뿐더러 나의 무게를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 “이거 놓으세요.”
  • 나는 너무 창피해서 겨우 말했다.
  • “팍”하는 소리와 함께 브래지어 끈이 끊어졌다. 끝부분이 나의 어깨에 부딪히고 가슴팍이 시리더니 나의 속옷은 셔츠에서 흘러내렸다. 마침 나와 서경천의 두 발 사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