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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약속

  • “오늘 침대 용품을 사지 못했어.”
  • 차재운이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했다.
  • 그러고 보니 이사한 뒤, 서강예는 샤부샤부를 먹고 서현과 함께 쇼핑을 했다. 그녀는 많은 물건을 구입했지만 차재운에게 무언가를 사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서강예는 미안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 “미안, 현이랑 둘이 사는 게 익숙해져서 널 잊고 말았네.”
  • 사실 이게 전부 그녀의 탓인 건 아니었다. 둘만 살던 삶에서 익숙해진 걸 어떡하냐는 말이다. 친구랑 같이 살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친구가 모든 살림을 도맡았다.
  • “나 어디서 자?”
  • 차재운이 시선을 내리깔고 서강예에게 물었다.
  • 서강예는 생각을 해보다 서현의 침실을 가리켰다.
  • “아니면 아들이랑 하룻밤 자는 게 어때?”
  • 차재운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 “둘이 자는 게 불편해.”
  • “그래?”
  • 서강예는 의아한 얼굴로 차재운을 훑어보았다.
  • ‘둘이 자는 게 불편하다면서 내 침실에는 왜 들어오려는 건데?’
  • 그녀의 속생각을 눈치챘는지 차재운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남자랑 둘이 자는 게 싫다는 거지.”
  • “…”
  • 서강예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차재운의 표정과 여유로운 말투를 보니 그는 잘 곳이 없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꼬시고 있는 것이었다.
  • 그녀는 언짢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과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하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 “나 잘 테니까 알아서 해결해.”
  • 그녀는 노출이 전혀 없는 검은색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유독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는 아무리 단정한 잠옷을 입었다고 해도 섹시함을 감출 수 없었다.
  • ‘이승준 그 자식은 저 여자를 안아봤겠지?’
  • 생각할수록 차재운의 표정은 어둡게 변했다.
  • 침실 안.
  • 서강예는 화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 ‘10억이야. 4억이나 더 불렀다고.’
  • 그녀는 피곤한 하루를 보낸 탓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추자 서강예는 그제야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간밤에 그녀는 악몽이 없는 단잠을 잤다.
  •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서강예는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 “차재운, 왜 또 내 침대에 있는 건데!”
  • 차재운은 서강예의 목소리에 잠이 깨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다크서클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여기 내 방이거든.”
  • “그럴 리가… 나….”
  • 서강예는 실소를 터뜨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심플한 인테리어와 하얀색 시트, 다른 가구나 장식품이 없어 단조로운 방을 보니 그녀의 방이 아닌 게 분명했다.
  • ‘내가 왜 차재운의 방에 있는 거지?’
  • 그녀가 차재운에게 물으려고 할 때, 차재운은 눈을 크게 뜨고 옅은 미소를 띄며 말했다.
  • “어젯밤에 누가 몽유병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 쫓아도 나가지 않던가? 이봐요, 고용주 님. 당신 자꾸 이러면 돈 더 추가해야 해.”
  • 서강예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남의 침대에 떡하니 앉아 있지 않은가? 결국 할 말이 없어진 서강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만데?”
  • 차재운은 이미 그녀의 사람이 되었겠다, 간밤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크게 당황할 건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것에 의아할 뿐이었다.
  • ‘예전에는 그런 병 없었던 것 같은데?’
  • 그러나 예상과 달리 차재운은 고개를 저었다.
  • “돈은 필요없어.”
  •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선물? 차? 집?”
  • 서강예가 물었다.
  • “약속 하나만 해주면 돼.”
  • 차재운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친 서강예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도 바보가 아닌지라 약속 같은 것을 쉽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거절하려고 했다.
  •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 “내가 널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아이를 빼앗아 가지 마.”
  • “그게 다야?”
  • 서강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얼마나 어려운 걸 말하나 했네.’
  • 그녀는 차재운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 크게 없었다. 그가 예전에 하던 일만 그만둔다면 다른 쪽으로 그녀를 속였다고 해도 적당히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 서현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서강예는 아들이 아빠를 아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아이의 친아버지가 바로 옆에 있는 이상, 그의 과거가 아무리 수치스럽다고 해도 그녀는 아이가 또다시 아빠를 잃는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 생각을 해본 서강예가 대답했다.
  • “현이에게 못된 것만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른 건 다 용서할 수 있어.”
  • “그래.”
  • 차재운은 그녀가 괜찮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 “요 며칠 할 일이 있어서 나갈 거야. 이틀 뒤에 돌아올 거고.”
  • 그는 지금 한 여자에게 자신의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가 또 외박을 하겠다는 말을 듣자 서강예의 안색은 바로 어두워졌다.
  • “과거의 손님들과 연락 끊으라고 했잖아. 현이 아빠로 되었으면 아빠로서의 모습을 보여야지, 이러면 안돼.”
  • 그녀는 차재운이 자신과 아이를 내버려 두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차재운 역시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구겨졌다.
  •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 차재운이 화를 내자 서강예도 자신의 간섭이 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 “일찍 들어와.”
  • 그리고 돌아서서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야. 깜짝 놀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