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좋지 않다고? 올해 정기검진 할 때도 괜찮다고 했는데 할머니를 어떻게 모셨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차재운이 차가운 얼굴로 나지막하게 호통쳤다.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어서 오세요.”
차재운은 소름 끼치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어서 주치의에게 지금 바로 간다고 전화해.”
차재운은 전화를 끊은 뒤, 자리에 돌아왔다. 서강예와 서현은 그가 오는 줄도 모르고 새우만두 하나를 두고 아웅다웅 다투고 있었다.
서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 더 먹으면 안돼. 이거 다 먹으면 어제 금방 산 여름 한정 원피스가 안 들어갈지도 몰라!”
서강예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서현에게서 만두를 빼앗으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이거 다 먹고 운동장 뛸 거야!”
“흥.”
서현은 콧방귀를 뀌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둘의 모습을 본 차재운은 초조하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말했다.
“나 좀 바빠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오늘 밤 못 돌아올 것 같으니 데려다줄게.”
‘또 간다고?’
서강예는 그의 말을 듣고 무의식결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밥 제대로 먹은 거야? 천천히 가.”
서현은 이 기회에 서강예의 앞접시에 있는 소고기를 집어서 날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빠, 안녕!”
차재운은 따뜻한 눈빛으로 ‘응’이라고 한 뒤, 뒤돌아서 떠났다.
서강예는 그가 떠나는 곳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첫날부터 외박이라고? 내가 돈을 이렇게 많이 주는데 다시 그 일 하는 거 아니야?’
차재운은 다급히 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그는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재운아, 드디어 왔구나.”
고정임은 손자가 들어온 것을 보고 인자한 얼굴에 미소를 담고 말했다.
차재운은 멍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여자는 이십 대 초반인 듯했는데 예쁘고 귀여웠다.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는 표정이 구겨졌지만 손님 앞에서 할머니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쉬지 않고 왜 나와 계세요?”
“그냥 고질병이지. 의사가 와서 봐도 소용없어.”
고정임은 손을 흔들고는 연약한 척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다 마음의 병이지 뭐.”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재운은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그의 머릿속은 두 모자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 둘은 길도 잘 모르기에 집으로 가는 게 걱정이 되었다.
“내가 언제 괜찮다고 했어?”
고정임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보았다.
“오자마자 간다고 하다니. 네 눈에 이 할미가 있기는 한 거야? 얼른 와서 앉아.”
고정임이 크게 화를 내자 차재운도 뭐라고 하기 무엇해서 할머니의 옆에 앉았다.
그는 밖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자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기에 할머니의 말이라면 곧 잘 따랐다.
고정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재운아, 내가 소개해줄게. 이 아가씨는 임서원이라고 임씨 가문의 장녀야. 오늘 특별히 식사 같이 하자고 집에 초대했어. 서로 알고 지내면 좋겠지?”
차재운도 임씨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들은 게 있었다. 지금 한창 권력가로 떠오르는 재벌가였고 또 이씨 가문과 손을 잡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임씨 가문에 줄을 대려고 했다. 얼마 전에 임씨 가문은 운해그룹과 협력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 이렇게 어린 딸이 있을 줄이야.
남들이 보기에는 가문끼리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고정임이 이렇게 급히 나서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임서원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얌전하고 차분한 게 딱 봐도 좋은 집안에서 자란 티가 났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임서원이에요.”
차재운이 입을 열기 전에 고정임이 재빨리 말했다.
“대표님은 무슨. 듣기에도 너무 딱딱하잖아. 그냥 이름 불러.”
“네, 할머니 말씀대로 따를게요.”
임서원은 몰래 차재운의 눈치를 살피고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서 차재운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그에게서 풍기는 강압적인 포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남자를 내 거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안녕하세요.”
차재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의 심드렁한 반응에 임서원 얼굴의 미소가 점차 옅어졌다.
그녀는 예전에 차재운과 파티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차재운은 그녀의 머리에 콕 박힌 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재운은 평소 파티에도 잘 나가지 않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도 적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서야 그가 차씨 가문 후계자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정임은 몰래 그에게 눈을 흘겼으나 차재운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답답한 손자의 모습에 고정임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얘도 왔으니 같이 밥 먹으면 얘기를 나누자꾸나.”
“할머니, 제가 모실게요.”
임서원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고정임을 부축했다. 둘은 그렇게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앞에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