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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구원할 때

네가 나를 구원할 때

울림

Last update: 2025-02-17

제1화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 6월의 대부도는 날씨가 찌는 듯 무덥다.
  • 야자를 마친 뒤 강시연은 다른 학생들이 거의 다 하교했을 때가 되어서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외진 골목길이었다.
  • 이 길은 비록 외지긴 했지만 20분 정도를 아낄 수 있는 샛길이었다.
  • 그러나 골목을 다 나서기도 전에 민감한 후각에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 그녀는 피비린내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만약 다른 여자애들이었다면 아마 진작에 줄행랑을 쳤겠지만 하필 강시연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앞으로 향했다.
  • 아니나 다를까 5분 뒤 그녀는 무려 인적 하나 없는 골목에서 피가 튀는 싸움을 목격했다.
  • “휙…”
  • 강시연은 자전거에 탄 채로 한 발은 바닥을 짚어 중심을 잡았고 한 손은 교복 주머니에 다른 한 손은 자전거 핸들을 가볍게 잡고 있었다. 그런 뒤 휘파람을 불어 모든 이의 주의를 끌었다.
  • 앞에 있던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들은 한 남자를 에워싸고 싸우고 있었다. 이 골목에는 가로등이 없어 강시연은 달빛을 빌려 둘러싸인 남자들을 흘깃 쳐다봤다.
  • 다친 사람은 저 남자인 것 같다.
  • 강시연의 휘파람 소리를 들은 양측 모두 교복을 입은 소녀를 쳐다봤다.
  • “꺼져!”
  • 키가 크고 마른 여자인 것을 보자 선두에 있던 남자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강시연의 두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 “길 막으셨어요.”
  • “죽고 싶어?”
  • 선두에 있던 남자는 짜증이 났다. 그들은 유지훈에게 손을 쓸 기회를 이제 겨우 찾았는데… 지금은 누가 됐든 길을 막는 사람은 모두 죽일 심산이었다.
  • 남자가 눈짓하자마자 거대한 키의 남자 두 명이 강시연을 향해 다가왔다.
  • 강시연은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봤다. 벌써 10시 반이다.
  • 두 남자가 다가와 강시연을 상대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한쪽 발도 자전거 페달에 올리더니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 그 속도는 어찌나 빠른 지 몇십 초 만에 번개 같은 속도로 그중 한 남자를 자전거로 치었고 그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 그리고 강시연은 양손을 자전거 안정에 댄 채 중심을 잡고 몸을 돌리더니 양발로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을 찼다.
  • 눈앞에 있는 여자애가 자신의 무리를 공격하는 것을 보자 선두에 있던 남자가 외쳤다.
  • “둘 다 죽여버려.”
  •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만약 유지훈의 사람들이 온다면 그들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리게 될지도 모른다.
  • 이미 기진맥진해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을 듣자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유지훈이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 강시연은 싸움을 길게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만 혼내주고 갈 생각뿐이었다.
  • 그러나 유지훈을 지나칠 때 무심코 그를 흘깃 본 강시연은 그대로 멈추었다.
  • “젠장.”
  •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강시연은 멈추더니 생각을 바꾸었다.
  • ‘오늘만 좋은 사람이 되어 보자.’
  • 다음 순간, 그녀는 빠르게 자전거의 방향을 바꾸더니 십 수명의 남자들을 향해 빠르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 손에 무기가 없는 탓에 강시연은 두 남자의 손에서 단도를 빼앗았고 자전거를 보조 삼아 십수 명의 남자와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 강시연의 동작이 거세고 강한 것을 본 상대는 곧바로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 “다 죽여버려.”
  • 선두에 있던 남자는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 강시연은 빠르게 피하며 유지훈의 곁으로 다가왔다.
  • “안 죽었어요?”
  • “이 정도로 안 죽어.”
  • 두 사람에게 대화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십수 명의 남자들은 또다시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 강시연은 몸놀림이 아주 좋았다. 혼자서 십수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웠고 모든 동작이 멋있었다.
  • 그녀는 십수 명의 남자들을 전부 쓰러트린 뒤, 길을 막고 있는 자를 발로 차서 치워버렸다.
  • “갑니다, 감사 인사는 됐어요.”
  • 강시연은 여기서 더 오지랖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 자전거에 타서 시간을 확인하자 11시가 다 되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 그러나 그녀가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자전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고개를 돌려 보니 유지훈이 그녀의 자전거 뒷좌석을 잡고 있었다.
  • 예쁘게 생긴 두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 “볼 일 더 있어요?”
  • “고마워.”
  • 말을 마친 뒤 그는 그대로 기절했다.
  • “미친!”
  • 이미 바닥에 쓰러진 귀한 집 자제분을 본 강시연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결국 남자를 부축해 겨우겨우 자전거 뒷좌석에 앉힌 뒤 힘겹게 그를 골목 밖으로 끌고 나갔다.
  • 유지훈의 몸에 총상이 있는 탓에 강시연도 곧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총상은 너무 민감한 문제인 데다 그녀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 좋아 더는 과거처럼 복잡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 게다가 그의 총상을 보니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쯤에 염라대왕을 만나러 갈지도 모른다.
  • 강시연은 유지훈을 대부대학교 의학실험실로 데리고 왔다. 오는 길 내내 강시연은 잘 아는 곳인 듯 순조롭게 들어왔다.
  • 불을 켠 뒤 유지훈을 의대생들이 실험할 때 쓰는 해부대에 올렸다.
  • 방 안에 있는 한 서랍을 연 강시연은 그 안에서 수술복을 꺼내 입었다.
  • 이런 때에 마취약을 찾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기절한 마당에 아무리 아파도 유지훈이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의료용 장갑을 낀 강시연은 가위로 피가 묻은 유지훈의 셔츠를 잘랐다.
  • 총알이 있는 위치는 심장과 매우 가까이 있어 조금만 실수해도 심장이 찢어질 위험이 있었다.
  • 메스를 소독한 뒤 총알을 빼냈다.
  • 아무리 유지훈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라고 해도 메스가 피부를 깊게 벤 순간 고통에 번쩍 두 눈을 떴다.
  • 유지훈은 자신의 몸에 칼을 대고 있는 여자애를 쳐다봤다.
  • “너 누구야? 죽고 싶어?”
  • 강시연은 유지훈이 지금 깨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맨살을 그대로 베었는데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죽은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 강시연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계속해서 수술을 이어갔다.
  • “윽…”
  • 생살이 찢기는 고통에 유지훈은 신음을 냈지만 그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이어지는 수술 내내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유지훈은 수술이 끝나고 나서야 다시 기절했다.
  • “의지력 대단한데?”
  • 마취약을 쓰지 않고 맨정신으로 수술을 지켜볼 수 있다니, 이 남자의 의지력은 가히 변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그녀는 문자 하나를 작성한 뒤 눈에 띄는 이름을 찾아 보냈다.
  • 실험실 내부를 정리한 뒤에야 강시연은 가방을 메고 유지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떠났다.
  • 유지훈의 문자를 받은 김무열은 곧바로 대부대학교 의학실험실에 달려왔다.
  • 해부대 위에 누워있는 유지훈을 보자 김무열은 넋을 놓았다.
  • 누가 저렇게 목숨 귀한 줄 모르는 거지? 해부대 위에 누운 게 누구인지 모르나? 저 사람은 서울 유 씨 가문의 후계자 유지훈이란 말이다!
  • 그리고 그때 이미 깨어난 유지훈은 달려온 김무열을 쳐다봤다.
  • “유 사장, 누가 그런 거야?”
  • 누구의 간이 이렇게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울에서 유지훈은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 유지훈은 내내 쉬지 않고 주절대는 김무열을 흘깃 쳐다봤다.
  • “유 사장, 누가 유 사장을 여기로 데려온 거야?”
  • 유지훈이 실종되고 난 뒤로 지금까지 김무열은 놀라 식은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다.
  • 해부대 위에 누워있는 이 사람이 정말로 죽었다면 서울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매장될 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지금 저런 꼴이 되어 있는 것을 보자 김무열은 상대가 도대체 누구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 “그쪽에서 이번에는 사람을 시킨 걸 보면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것 같더군. 오늘 나를 구한 게 누구인지 한 번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