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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미 볼 거 다 봤잖아

  • 뒤늦은 그의 질문은 결국 하시은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 그녀는 박인성이 박찬우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너무 잘 알았다.
  • 박건호와 정연이 회사 일에 전념할 때 박찬우보다 다섯 살 더 많은 박인성은 동생을 정성껏 보살피며 단 한순간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지 않았다. J시티의 사람들은 박인성이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지 다 알고 있다. 하시은이 박씨 가문에 들어간 것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 박인성은 박찬우에게 아버지와 같은 큰형이었다.
  • 차가 천천히 달리고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박찬우는 그 말을 한 뒤로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더이상 하시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박찬우는 휴대폰을 꺼내 배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 시간 뒤 더원 술집에서 만나.”
  • 박인성이 사망한 뒤로 그는 처음으로 친구에게 먼저 연락했다. 그와 함께 자라온 배성진은 박찬우가 드디어 아픈 기억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줄 알고 곧장 대답했다.
  • “알겠어요, 다들 바로 출발할게요.”
  • 그가 말한 모두는 다름 아닌 배진 기업의 배성진과 윤씨 가문의 도련님 윤혁재였다. 박찬우는 수년간 형제처럼 지낼만한 친구가 이들 두 명뿐이었다.
  • 짤막하게 얘기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는 하시은을 힐긋 바라봤다. 그녀의 가녀린 턱선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 “뒷좌석에 가서 옷 갈아입어.”
  • “무슨 옷을 갈아입어요?”
  • 하시은은 그에게 물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그제야 뒷좌석에 가득 찬 여성 의류 쇼핑백을 발견했다.
  • ‘설마... 날 위해 산 옷이라고?’
  • 좀 전까지 차를 몰고 떠난 박찬우를 바라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로 여겼는데 그는 결국 옷 사러 간 거였다!
  • “내일 네가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걸 보면 아빠가 또 날 혼 낼 거야.”
  • ‘그래서 이렇게 많이 샀단 말이야?’
  • 전에도 한번 박인성이 그더러 하시은을 데리고 쇼핑하러 가라고 했더니 박찬우는 귀찮은 마음에 사람을 시켜 매장의 모든 신상을 사 왔었다.
  • 이보다 더 효율적인 쇼핑은 없다면서 그녀더러 일일이 입어보고 고르라고 했다.
  • 예전 생각에 하시은은 마음이 괴로웠다. 마치 큰 돌덩어리가 박힌 것처럼 숨 막히고 답답했다.
  • “지금 입은 것도 새 옷이라 갈아입을 필요 없어요.”
  • “잔말 말고 그냥 갈아입어.”
  • “이것도 새 옷이라고요. 아까 유...”
  • 이름을 다 말하기도 전에 하시은은 불쑥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챘다. 박찬우는 자신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라 해도 일단 그와 연관 있는 자는 전부 통제해야 하고 그의 뜻에 따라야 한다. 그는 소유욕과 통제 욕구가 워낙 강하다 보니 안유겸을 언급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다.
  •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언성이 훨씬 높아졌다.
  • “다시 한번 말해봐!”
  • 하시은은 더는 그와 대치하지 않고 안전벨트를 푼 후 뒷좌석으로 갔다.
  • 그녀는 체구가 작아 충분히 기어갈 수 있었는데 마침 차가 커브를 돌다 보니 그대로 옷더미에 곤두박질쳤다. 그녀는 귀찮은 마음에 손에 잡히는 대로 가장 가까운 곳의 원피스를 잡고 쇼핑백으로 몸을 가리려 했다.
  • 바스락거리는 쇼핑백 소리가 박찬우의 고막을 가득 메웠다. 그는 비난 조로 하시은에게 쏘아붙였다.
  • “이미 볼 거 다 봤잖아. 그냥 갈아입어.”
  • 그는 어색하게 백미러 각도를 조절하며 한마디 더 보탰다.
  • “얼른!”
  • 곧이어 스위치를 누르자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검은색 유리가 천천히 가려졌다. 하시은은 부끄럽기도 하고 잇따라 짜증도 밀려왔다.
  • “왜 진작 유리를 내리지 않았어요?!”
  • 거의 다 갈아입었는데 이제야 내리다니...
  • 박찬우가 대답했다.
  • “깜빡했어.”
  • 하시은은 말문이 턱 막혔다.
  • 더원 술집은 윤혁재의 명의로 된 자산이자 J시티에서 가장 큰 클럽이다.
  • 그는 편의를 위하여 맨 위층을 세 사람이 모이는 전용 장소로 특수 처리했다.
  • 하시은도 전에 두 번 온 적이 있지만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며 구석에 버려진 채 얌전히 주스만 마셔야 했다. 그땐 박인성도 함께 있었고 다들 그녀를 박씨 가문의 꼬마 여동생으로만 대했다.
  • 마치 정말 먼지 하나 안 묻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박씨 집안의 따님처럼 대했다.
  • 다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10살 전까지 그녀는 천차만별의 삶을 살아왔다. 배불리 먹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하여 나중에 박인성한테서 받은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겼고, 진실에 관한 빙산의 일각을 보았을 때 그토록 증오한 것이다.
  • 그녀는 조만간 이 과거에서 철저히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 “찬우 형, 여기예요!”
  • 화장실에 가려던 배성진이 박찬우를 보더니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그는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점잖지 못한 바람둥이였다. J시티에서 그에게 상처받은 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그는 거침없이 말을 내뱉기로 소문났다.
  • 아니나 다를까 박찬우에게 가려진 하시은을 본 순간, 바로 그녀를 끄집어냈다.
  • “시은 씨는 여기 어쩐 일이에요?”
  • 하시은은 박인성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J시티에 소문이 파다했고 비가 내린 그 날 밤 인터넷을 도배한 사진들까지 더해 아무도 그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로 생각지 못했다.
  • 그런데 박찬우가 그런 그녀를 데리고 놀러 오다니.
  • 박찬우는 하시은의 몸에 닿은 배성진의 손을 팽개쳤다.
  • “강리나가 얘기 안 했어? 우리 둘 혼인신고했어.”
  • 강씨 가문과 배씨 가문은 서로 집도 가깝고 사업 왕래도 잦았다. 하여 강리나와 배성진은 나름대로 가까운 사이였다.
  •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해요?! 말도 안 돼!”
  • ‘인성 형이 죽었는데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 배성진은 고함을 지르며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좀 전에도 리나랑 통화했는데 아무 말 없었어요. 이렇게 큰일을 나한테 숨기다니... 사진!”
  • 배성진은 누구보다 가십거리에 열광하는 남자였다. 그는 요즘 일어난 일들을 쭉 연결해보더니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 “시은 씨 제법이네요! 그 사진들 퍼뜨렸다가 어르신께 들키는 바람에... 쯧쯧, 전엔 시은 씨를 너무 만만하게 봤네요.”
  •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또다시 박찬우에게 물었다.
  • “그런데 왜 시은 씨를 여기로 데리고 왔어요?”
  • 그토록 미운데 왜 굳이 함께 왔을까?
  • 더구나 모두가 그녀에 대한 인상이 나빠졌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여자는 마냥 역겨울 따름이니까.
  • 윤혁재도 그들이 줄곧 들어오지 않아 복도로 걸어 나왔다. 멍하니 옆에 서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하시은을 본 순간, 배성진이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는 업무상의 이유로 해외 출국이 잦았고 이 때문에 안유겸과도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둘 사이가 가깝다 보니 하시은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이토록 악랄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 “안 들어가고 뭐 해?”
  • 배성진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껄렁대며 윤혁재에게 말했다.
  • “두 사람 혼인신고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