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우의 속마음은 가히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녀도 함부로 추측하는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하시은으로 돌아갈 테니까.
...
박찬우의 아파트는 산 지 꽤 되었는데, 이 동네 고급 주택 단지 중에서도 가장 좋은 구조를 자랑했으며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전에 잘못을 저질러 박인성한테 혼나면 나름대로 가출한다고 이곳에 피신하러 왔었다.
그를 떠올리자 바늘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에 하시은은 표정이 점점 어색해졌다.
“왜? 우리 집에 있으면 안유겸이 오해할까 봐?”
“유겸은...”
“내 앞에서 걔를 언급하지 마.”
박찬우는 차를 세우고 넥타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짜증 나니까.”
하시은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묵인하자니 바람을 피웠다고 우기고, 변명하자니 언급하지 말라는 둥 짜증 난다는 둥 하질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본인이 인정한 것만 사실로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마치 그녀가 일부러 나 몰라라 하고 꿍꿍이를 꾸민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박찬우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그의 시선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보통 기분이 언짢다 하면 주위 사람들도 연루되기 마련이다.
박찬우는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하시은을 흘긋 쳐다보았다.
“나한테 시집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니, 안유겸이 돌아왔다고 하니까 걔도 놓치기 싫어?”
“그 사진을 유출한 적 없다고 몇 번을 얘기해요!”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자 하시은은 문득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안유겸은 제일 친한 친구니까 자꾸 헐뜯지...”
박찬우는 약이 잔뜩 오른 그녀를 보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건가?”
그녀가 제일 힘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곁으로 달려와 준 사람은 안유겸뿐이며, 그런 배은망덕한 일을 할 리가 절대로 없다고 위로해줬다.
따라서 그를 몇 번이고 비꼬는 박찬우를 어찌 참아줄 수 있겠는가.
“네!”
하시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불만을 한꺼번에 털어놓지 못해 안타까울 지경이라 얼굴마저 빨개졌다. 그러나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때문에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박찬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거렸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슈트는 몸에 딱 들어맞았다. 드넓은 어깨와 늘씬한 허리는 눈길을 확 끌었고, 두 개의 단추를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여자보다 예쁜 쇄골이 드러났다. 다리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은 뼈마디가 뚜렷해서 흠잡을 곳이 없을 지경이다.
그를 바라보던 하시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때, 주방에서 국수 재료를 손질하던 황미숙이 인기척을 듣고 나왔다가 하시은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이 아파트에 발을 들인 여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얼굴이 예쁘장할뿐더러 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그동안 황미숙은 그녀를 딸처럼 여겨왔다. 다만 박인성의 일도 있는지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쩐지 도련님께서 국수를 드시고 싶어 하더라니, 알고 보니 하시은 때문이었다.
“하시은 씨?”
“네?”
하시은은 재빨리 돌아서서 예전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이모님, 안녕하세요.”
황미숙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그녀와 괴리감이 있다. 생김새도 천사이고 그동안 도를 넘은 일을 한 적도 없는데, 마음이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시은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찬우한테서 입은 은혜가 있는지라 고용주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박찬우가 명확한 태도를 보이기 전에 그녀도 관망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녀는 딸아이를 지키려는 모성애를 참으며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훑어보다가 수척해진 몸을 보며 말했다.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이따가 식사하세요.”
예전에 쓰던 그녀의 개인용품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네.”
하시은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럼 잽싸게 갈아입고 나서 도와드릴게요.”
그러고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황미숙을 향해 외쳤다.
“허드렛일이라도 있으면 꼭 저한테 부탁하세요!”
이 말은 들은 황미숙은 마음이 흐뭇했다. 나이도 어린 여자가 어찌도 이리 참할 수 있지? 입만 열면 너무 사랑스러웠다.
소파에 앉은 박찬우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말투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미숙은 박찬우를 몰래 힐끔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도련님께서 하시은 씨를 이 정도로 싫어한다고? 설마 큰 도련님의 죽음이 진짜 하시은 씨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늘 유유자적하던 황미숙은 별안간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한 시간 뒤에 만들어 주세요. 일단 씻고 올게요.”
박찬우는 알레르기약이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심각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황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마침 홈웨어로 갈아입고 나온 하시은과 마주쳤다.
“내가 씻고 나서 밥 먹을 거니까 너도 먼저 가서 씻어. 모텔이 별로 깨끗하지도 않던데 네 몸에 묻은 세균 때문에 우리 집이 오염될지도 몰라.”
박찬우는 집안이 항상 깔끔하기를 원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는 하루에 한 번씩 갈고, 방안은 날마다 소독하기에 모텔 같은 곳에서 어찌 사람이 묵는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즉, 그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하시은은 눈을 흘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뭐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구먼.”
적어도 그녀가 방황할 때 안식처라도 되어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자신처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사람에게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장소는 천국과 마찬가지였다.
박찬우는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뭐라고?”
“아니요.”
하시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고개를 숙이자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뚝에 난 아토피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찬찬히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이건 뭐죠?”
박찬우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씻기 전에 나한테 손대지 마.”
그러고 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소매를 내리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뒤따르던 하시은은 자칫 코를 박을 뻔했다.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아토피를 검색하자 아까 팔에서 본 붉은 반점과 비슷한 사진이 몇 개 떴는데, 검색 결과를 보고 나서 알레르기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곰곰이 회상해보니 박찬우가 모텔 로비에 들어선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만졌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더러운 환경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겼단 말인가? 하지만 왜 기어코 올라갔단 말이지?
물론 홈닥터를 불러서 진찰받지 않은 이상 큰 문제는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하시은은 먼지 하나 없는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이내 모텔 안의 어두침침한 로비와 누렇게 변한 시트를 떠올리자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박찬우도 ‘살인범’인 그녀를 받아들이고 집까지 데려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침실로 돌아가 구석구석 씻고는 부랴부랴 아래층으로 내려가 황미숙에게 물었다.
“이모님, 구급상자가 아직도 다용도실에 있어요?”
“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주방을 정리하던 황미숙이 걸어 나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아니라...”
하시은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황미숙은 잔뜩 긴장했다.
“그럼 도련님이 아픈 건가요?”
“아니에요.”
그녀가 걱정할까 봐 하시은은 서둘러 말을 보탰다.
“사실 곧 그날이라서 진통제가 남아 있는지 좀 보려고요.”
황미숙은 그제야 안심했다.
“아, 그럼 가서 한번 찾아보겠어요? 집에 약이 거의 떨어져서 찾지 못했다면 얘기해주세요. 이따가 좀 보내 달라고 할 테니까.”
한참을 뒤적거렸지만 알레르기약은 당최 보이지 않았다.
박찬우는 샤워할 때 보통 3단계를 거치는데 적어도 한 시간 씻었다. 황미숙에게 부탁하기 미안한 하시은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선 뒤 오른쪽으로 꺾어서 1km 정도 걸으면 24시간 영업하는 무인 약국이 있었던 거로 기억했다.
그녀는 잽싸게 뛰어가 20분 만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박찬우는 마침 샤워를 마친 뒤였다.
“자, 여기요.”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직 촉촉이 젖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알, 알레르기 아닌가요?”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돌렸다.
“이거 바르면 괜찮아질 거예요.”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은 박찬우는 피부가 유난히 깨끗해 보이고 얼굴에서 잘생김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