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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먼저 씻을게

  • 박찬우의 속마음은 가히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녀도 함부로 추측하는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하시은으로 돌아갈 테니까.
  • ...
  • 박찬우의 아파트는 산 지 꽤 되었는데, 이 동네 고급 주택 단지 중에서도 가장 좋은 구조를 자랑했으며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전에 잘못을 저질러 박인성한테 혼나면 나름대로 가출한다고 이곳에 피신하러 왔었다.
  • 그를 떠올리자 바늘로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에 하시은은 표정이 점점 어색해졌다.
  • “왜? 우리 집에 있으면 안유겸이 오해할까 봐?”
  • “유겸은...”
  • “내 앞에서 걔를 언급하지 마.”
  • 박찬우는 차를 세우고 넥타이를 풀어 손에 쥐었다.
  • “짜증 나니까.”
  • 하시은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묵인하자니 바람을 피웠다고 우기고, 변명하자니 언급하지 말라는 둥 짜증 난다는 둥 하질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본인이 인정한 것만 사실로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 마치 그녀가 일부러 나 몰라라 하고 꿍꿍이를 꾸민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박찬우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그의 시선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보통 기분이 언짢다 하면 주위 사람들도 연루되기 마련이다.
  • 박찬우는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하시은을 흘긋 쳐다보았다.
  • “나한테 시집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니, 안유겸이 돌아왔다고 하니까 걔도 놓치기 싫어?”
  • “그 사진을 유출한 적 없다고 몇 번을 얘기해요!”
  •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자 하시은은 문득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안유겸은 제일 친한 친구니까 자꾸 헐뜯지...”
  • 박찬우는 약이 잔뜩 오른 그녀를 보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 건가?”
  • 그녀가 제일 힘들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곁으로 달려와 준 사람은 안유겸뿐이며, 그런 배은망덕한 일을 할 리가 절대로 없다고 위로해줬다.
  • 따라서 그를 몇 번이고 비꼬는 박찬우를 어찌 참아줄 수 있겠는가.
  • “네!”
  • 하시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 그동안 쌓아두었던 불만을 한꺼번에 털어놓지 못해 안타까울 지경이라 얼굴마저 빨개졌다. 그러나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 때문에 오히려 귀엽게 느껴졌다.
  • 박찬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 그의 깊은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거렸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슈트는 몸에 딱 들어맞았다. 드넓은 어깨와 늘씬한 허리는 눈길을 확 끌었고, 두 개의 단추를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여자보다 예쁜 쇄골이 드러났다. 다리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은 뼈마디가 뚜렷해서 흠잡을 곳이 없을 지경이다.
  • 그를 바라보던 하시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이때, 주방에서 국수 재료를 손질하던 황미숙이 인기척을 듣고 나왔다가 하시은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 이 아파트에 발을 들인 여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얼굴이 예쁘장할뿐더러 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그동안 황미숙은 그녀를 딸처럼 여겨왔다. 다만 박인성의 일도 있는지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 어쩐지 도련님께서 국수를 드시고 싶어 하더라니, 알고 보니 하시은 때문이었다.
  • “하시은 씨?”
  • “네?”
  • 하시은은 재빨리 돌아서서 예전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 “이모님, 안녕하세요.”
  • 황미숙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그녀와 괴리감이 있다. 생김새도 천사이고 그동안 도를 넘은 일을 한 적도 없는데, 마음이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냐는 말이다.
  • 그렇다고 하시은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박찬우한테서 입은 은혜가 있는지라 고용주의 말대로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박찬우가 명확한 태도를 보이기 전에 그녀도 관망할 수밖에 없다.
  • 결국 그녀는 딸아이를 지키려는 모성애를 참으며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훑어보다가 수척해진 몸을 보며 말했다.
  • “얼른 가서 옷 갈아입고 이따가 식사하세요.”
  • 예전에 쓰던 그녀의 개인용품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 “네.”
  • 하시은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 “그럼 잽싸게 갈아입고 나서 도와드릴게요.”
  • 그러고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황미숙을 향해 외쳤다.
  • “허드렛일이라도 있으면 꼭 저한테 부탁하세요!”
  • 이 말은 들은 황미숙은 마음이 흐뭇했다. 나이도 어린 여자가 어찌도 이리 참할 수 있지? 입만 열면 너무 사랑스러웠다.
  • 소파에 앉은 박찬우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말투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황미숙은 박찬우를 몰래 힐끔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 ‘도련님께서 하시은 씨를 이 정도로 싫어한다고? 설마 큰 도련님의 죽음이 진짜 하시은 씨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 늘 유유자적하던 황미숙은 별안간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 “한 시간 뒤에 만들어 주세요. 일단 씻고 올게요.”
  • 박찬우는 알레르기약이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심각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 황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도련님.”
  •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마침 홈웨어로 갈아입고 나온 하시은과 마주쳤다.
  • “내가 씻고 나서 밥 먹을 거니까 너도 먼저 가서 씻어. 모텔이 별로 깨끗하지도 않던데 네 몸에 묻은 세균 때문에 우리 집이 오염될지도 몰라.”
  • 박찬우는 집안이 항상 깔끔하기를 원했다. 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는 하루에 한 번씩 갈고, 방안은 날마다 소독하기에 모텔 같은 곳에서 어찌 사람이 묵는지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 즉, 그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 하시은은 눈을 흘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 “뭐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구먼.”
  • 적어도 그녀가 방황할 때 안식처라도 되어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자신처럼 가진 게 쥐뿔도 없는 사람에게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장소는 천국과 마찬가지였다.
  • 박찬우는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 “뭐라고?”
  • “아니요.”
  • 하시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고개를 숙이자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뚝에 난 아토피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찬찬히 확인하기 위해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 “이건 뭐죠?”
  • 박찬우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 “씻기 전에 나한테 손대지 마.”
  • 그러고 나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소매를 내리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 뒤따르던 하시은은 자칫 코를 박을 뻔했다.
  •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아토피를 검색하자 아까 팔에서 본 붉은 반점과 비슷한 사진이 몇 개 떴는데, 검색 결과를 보고 나서 알레르기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그제야 곰곰이 회상해보니 박찬우가 모텔 로비에 들어선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만졌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더러운 환경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겼단 말인가? 하지만 왜 기어코 올라갔단 말이지?
  • 물론 홈닥터를 불러서 진찰받지 않은 이상 큰 문제는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 하시은은 먼지 하나 없는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이내 모텔 안의 어두침침한 로비와 누렇게 변한 시트를 떠올리자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물론 박찬우도 ‘살인범’인 그녀를 받아들이고 집까지 데려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그녀는 재빨리 침실로 돌아가 구석구석 씻고는 부랴부랴 아래층으로 내려가 황미숙에게 물었다.
  • “이모님, 구급상자가 아직도 다용도실에 있어요?”
  • “네,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 주방을 정리하던 황미숙이 걸어 나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제가 아니라...”
  • 하시은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황미숙은 잔뜩 긴장했다.
  • “그럼 도련님이 아픈 건가요?”
  • “아니에요.”
  • 그녀가 걱정할까 봐 하시은은 서둘러 말을 보탰다.
  • “사실 곧 그날이라서 진통제가 남아 있는지 좀 보려고요.”
  • 황미숙은 그제야 안심했다.
  • “아, 그럼 가서 한번 찾아보겠어요? 집에 약이 거의 떨어져서 찾지 못했다면 얘기해주세요. 이따가 좀 보내 달라고 할 테니까.”
  • 한참을 뒤적거렸지만 알레르기약은 당최 보이지 않았다.
  • 박찬우는 샤워할 때 보통 3단계를 거치는데 적어도 한 시간 씻었다. 황미숙에게 부탁하기 미안한 하시은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 아파트를 나선 뒤 오른쪽으로 꺾어서 1km 정도 걸으면 24시간 영업하는 무인 약국이 있었던 거로 기억했다.
  • 그녀는 잽싸게 뛰어가 20분 만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박찬우는 마침 샤워를 마친 뒤였다.
  • “자, 여기요.”
  • 그녀의 머리카락은 아직 촉촉이 젖어 있었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 “알, 알레르기 아닌가요?”
  •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돌렸다.
  • “이거 바르면 괜찮아질 거예요.”
  •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은 박찬우는 피부가 유난히 깨끗해 보이고 얼굴에서 잘생김이 흘러넘쳤다.
  • 그는 문틀에 기대어 피식 비웃었다. 매력적인 외모에 하시은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 갑자기 상의 단추를 천천히 풀며 탄탄한 허리를 드러낸 그는 하시은의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침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 “네가 발라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