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가 안유겸과 스킨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단지 그녀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신서율 앞에서 더 작아질까 봐 일부러 지지 않으려고 했다.
설령 과거에 신서율과 사이좋게 지냈을지언정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다.
동시에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자기가 무슨 신분인지도 몰라? 남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람이 너무 막 나가는데?”
말을 마친 박찬우가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자 안유겸에게 곧바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하시은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녀는 안유겸이 잠금을 해제한 틈을 타 재빨리 휴대폰을 낚아채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안유겸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건 내 휴대폰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시은은 잽싸게 여자 화장실로 피신했다.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변기에 털썩 주저앉아 방금 받은 문자를 찾아서 터치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동영상이었다.
이내 허둥지둥 삭제를 누르고 완벽하게 지워졌는지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그 짧은 순간에 식은땀마저 났다.
현재 같은 상황에서는 박찬우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꽤 빠릿빠릿하네.”
밖에서 박찬우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유겸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감상하려고 했더니 금방 눈치챌 줄이야.”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꾹 참고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박찬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벽에 밀치더니 다른 한 손으로 화장실 문을 잠갔다.
“뻔뻔한 사람은 너야.”
분노에 가득 찬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면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하시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고작 안유겸이랑 밥 먹었다고 이렇게 비열한 짓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너랑 비교했을 때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박찬우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돌리더니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시은아? 안에 있어?”
화장실 밖에서 안유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악!”
안유겸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따라 들어가는 박찬우를 발견했으나 문이 잠긴 탓에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외쳤다.
“왜? 왜 그래?”
그녀의 모습을 본 박찬우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하면 오해받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안유겸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비슷한 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남자답고 한 사람은 부드러웠는데 분위기 자체가 너무 상반되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우정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박찬우가 밖으로 나와서 그나마 안심이 된 안유겸은 딱히 추궁하지 않고 다정한 어투로 하시은에게 말했다.
“밖에서 기다릴게.”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급히 세수했다. 거울 속에 비친 빨개진 얼굴을 바라본 순간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짜릿한 전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시은은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화장실을 나섰다.
레스토랑에 다시 돌아갔을 때 박찬우와 신서율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한 입도 건드리지 않은 듯한 음식들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러 가면서 신서율이 앉았던 자리를 흘긋 쳐다보았는데, 예상외로 갈기갈기 찢어진 냅킨을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방금 뭐야?”
안유겸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밥 먹는 걸 일부러 지켜보러 온 거야?”
하시은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글쎄.”
그러고는 안유겸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다만 아까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았다.
눈치 빠른 안유겸은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유겸아.”
“응?”
“나중에 나랑 같이 보육원에 가보자.”
“알았어.”
하시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10시가 되었지만, 평소 일 중독자인 박찬우가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무릎을 탁탁 두드리면서 신발을 갈아 신고 2층으로 올라가는 하시은을 불렀다.
“이리와, 나랑 밥 먹자.”
하시은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황미숙은 마침 반찬을 세팅하고 있었다.
그녀는 우뚝 멈춰서더니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시은 씨, 오늘 오후 도련님께서 하시은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하셔서 만든 거예요.”
황미숙이 기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저녁 집에서 안 먹는 줄 알았는데, 도련님께서 기어코 하시은 씨가 돌아오면 같이 먹겠다고 하네요.”
하시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태연하게 밥을 먹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
오늘 저녁 레스토랑에 찾아간 이유가 정말 그녀 때문이었다니? 그것도 훼방을 놓으러...
이내 반으로 찢어진 냅킨이 떠오르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잊어.”
박찬우가 불쑥 말했다.
“그녀를 데려간 이유는 바로 너를 괴롭히기 위해서야.”
신서율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하시은에게 화풀이할 게 뻔했다.
그는 하시은이 편히 있는 꼴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큰형이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나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냐는 말이다.
“참.”
그는 젓가락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이때, 조명이 접시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내일 남은 요리 다 먹어야 해. 이모님이 직접 만드신 거라 낭비하면 큰일 나.”
황미숙이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도련님, 어떻게 하시은 씨한테 남은 반찬 드시라고 하겠어요?”
“그냥 먹으라고 하세요. 다 먹을 때까지 새로 만들 필요 없어요.”
그의 말투는 차갑고 무덤덤했다. 하지만 입을 닦는 모습은 또 어찌나 우아한지 얄미울 정도였다. 박찬우는 냅킨을 살포시 휴지통에 버리고는 황미숙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하시은한테 시켜요. 아무리 그렇다고 공짜로 먹고 자고할 수는 없잖아요.”
황미숙은 고개만 끄덕일 뿐, 박찬우가 하시은에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왜 신경 쓰지 않은 척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식탁 위의 음식은 거의 그대로였고, 여태껏 소파에 앉아 하시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냐는 말이다.
황미숙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어쩌면 요즘은 다들 이런 식으로 관심을 표현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거나 그의 말이 곧 법이다.
그동안 남은 음식을 보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하시은과 황미숙은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반찬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겨우 2층으로 올라가서 박찬우의 방을 스쳐 지나갔더니, 그는 마치 시간을 재고 있기라도 한 듯 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오늘 밤에 샤워 세 번 하고 소독하는 것도 잊지 마.”
집에 의사가 직접 갖춰 둔 샤워용 소독제가 있는데, 이는 박찬우가 비싼 돈을 들여 병원 교수한테 의뢰하여 개발한 전용 제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