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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첨예한 대립

  • 하시은은 조롱하듯이 비웃었다. 어찌 이렇게 변덕이 심한 남자가 다 있단 말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거절하더니 하루 만에 다시 옛사랑이 불타오른다고?
  • 아내라는 사람은 단지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건가?
  • “아.”
  • 하시은이 무심하게 말했다.
  • “보이네요.”
  • 박찬우는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 맞은편에 앉은 신서율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절대적인 주인공 대접을 받는 데 익숙해져 이런 안중에도 없는 듯한 수모를 참기가 어려웠다.
  • 하시은은 적절한 타이밍에 안유겸의 팔짱을 꼈다. 감히 박찬우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지는 못했지만 나름 당당한 기세로 맞받아쳤다.
  • “저도 다른 사람과 밥 먹으러 나와서 집에 못 들어갔어요.”
  • 사실 그가 안유겸과 스킨십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단지 그녀를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서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신서율 앞에서 더 작아질까 봐 일부러 지지 않으려고 했다.
  • 설령 과거에 신서율과 사이좋게 지냈을지언정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다.
  • 동시에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적이 되기 마련이니까.
  • “자기가 무슨 신분인지도 몰라? 남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람이 너무 막 나가는데?”
  • 말을 마친 박찬우가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자 안유겸에게 곧바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 하시은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 그녀는 안유겸이 잠금을 해제한 틈을 타 재빨리 휴대폰을 낚아채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화장실 좀 다녀올게.”
  • 안유겸은 어안이 벙벙했다.
  • “하지만 그건 내 휴대폰인데?”
  •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시은은 잽싸게 여자 화장실로 피신했다.
  •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변기에 털썩 주저앉아 방금 받은 문자를 찾아서 터치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동영상이었다.
  • 이내 허둥지둥 삭제를 누르고 완벽하게 지워졌는지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그 짧은 순간에 식은땀마저 났다.
  • 현재 같은 상황에서는 박찬우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 “꽤 빠릿빠릿하네.”
  • 밖에서 박찬우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안유겸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감상하려고 했더니 금방 눈치챌 줄이야.”
  •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꾹 참고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 박찬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벽에 밀치더니 다른 한 손으로 화장실 문을 잠갔다.
  • “뻔뻔한 사람은 너야.”
  • 분노에 가득 찬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면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 하시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 “고작 안유겸이랑 밥 먹었다고 이렇게 비열한 짓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 “너랑 비교했을 때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 박찬우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돌리더니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 “시은아? 안에 있어?”
  • 화장실 밖에서 안유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녀는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 “악!”
  • 안유겸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방금 따라 들어가는 박찬우를 발견했으나 문이 잠긴 탓에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외쳤다.
  • “왜? 왜 그래?”
  • 그녀의 모습을 본 박찬우는 피식 웃었다.
  • “이렇게 하면 오해받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안유겸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비슷한 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남자답고 한 사람은 부드러웠는데 분위기 자체가 너무 상반되었다.
  • 이는 어린 시절의 우정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 박찬우가 밖으로 나와서 그나마 안심이 된 안유겸은 딱히 추궁하지 않고 다정한 어투로 하시은에게 말했다.
  • “밖에서 기다릴게.”
  •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급히 세수했다. 거울 속에 비친 빨개진 얼굴을 바라본 순간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오르면서 짜릿한 전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하시은은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화장실을 나섰다.
  • 레스토랑에 다시 돌아갔을 때 박찬우와 신서율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한 입도 건드리지 않은 듯한 음식들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러 가면서 신서율이 앉았던 자리를 흘긋 쳐다보았는데, 예상외로 갈기갈기 찢어진 냅킨을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 “방금 뭐야?”
  • 안유겸도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 “우리가 밥 먹는 걸 일부러 지켜보러 온 거야?”
  • 하시은은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 “글쎄.”
  • 그러고는 안유겸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다만 아까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았다.
  • 눈치 빠른 안유겸은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 “유겸아.”
  • “응?”
  • “나중에 나랑 같이 보육원에 가보자.”
  • “알았어.”
  • 하시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10시가 되었지만, 평소 일 중독자인 박찬우가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 그는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무릎을 탁탁 두드리면서 신발을 갈아 신고 2층으로 올라가는 하시은을 불렀다.
  • “이리와, 나랑 밥 먹자.”
  • 하시은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 황미숙은 마침 반찬을 세팅하고 있었다.
  • 그녀는 우뚝 멈춰서더니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하시은 씨, 오늘 오후 도련님께서 하시은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하셔서 만든 거예요.”
  • 황미숙이 기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 “오늘 저녁 집에서 안 먹는 줄 알았는데, 도련님께서 기어코 하시은 씨가 돌아오면 같이 먹겠다고 하네요.”
  • 하시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태연하게 밥을 먹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하...”
  • 오늘 저녁 레스토랑에 찾아간 이유가 정말 그녀 때문이었다니? 그것도 훼방을 놓으러...
  • 이내 반으로 찢어진 냅킨이 떠오르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잊어.”
  • 박찬우가 불쑥 말했다.
  • “그녀를 데려간 이유는 바로 너를 괴롭히기 위해서야.”
  • 신서율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하시은에게 화풀이할 게 뻔했다.
  • 그는 하시은이 편히 있는 꼴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큰형이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나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냐는 말이다.
  • “참.”
  • 그는 젓가락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 이때, 조명이 접시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 “내일 남은 요리 다 먹어야 해. 이모님이 직접 만드신 거라 낭비하면 큰일 나.”
  • 황미숙이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 “도련님, 어떻게 하시은 씨한테 남은 반찬 드시라고 하겠어요?”
  • “그냥 먹으라고 하세요. 다 먹을 때까지 새로 만들 필요 없어요.”
  • 그의 말투는 차갑고 무덤덤했다. 하지만 입을 닦는 모습은 또 어찌나 우아한지 얄미울 정도였다. 박찬우는 냅킨을 살포시 휴지통에 버리고는 황미숙을 향해 말했다.
  • “앞으로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하시은한테 시켜요. 아무리 그렇다고 공짜로 먹고 자고할 수는 없잖아요.”
  • 황미숙은 고개만 끄덕일 뿐, 박찬우가 하시은에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왜 신경 쓰지 않은 척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 식탁 위의 음식은 거의 그대로였고, 여태껏 소파에 앉아 하시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냐는 말이다.
  • 황미숙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어쩌면 요즘은 다들 이런 식으로 관심을 표현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거나 그의 말이 곧 법이다.
  • 그동안 남은 음식을 보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하시은과 황미숙은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반찬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겨우 2층으로 올라가서 박찬우의 방을 스쳐 지나갔더니, 그는 마치 시간을 재고 있기라도 한 듯 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 “오늘 밤에 샤워 세 번 하고 소독하는 것도 잊지 마.”
  • 집에 의사가 직접 갖춰 둔 샤워용 소독제가 있는데, 이는 박찬우가 비싼 돈을 들여 병원 교수한테 의뢰하여 개발한 전용 제품이다.
  • 하시은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소독이요?”
  • 그는 하시은의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기, 닿았잖아.”
  • 물론 그는 안유겸을 가리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