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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볼거리

  • 윤혁재는 안유겸한테서 미리 전해 들었다.
  • “알아.”
  • 박찬우는 어디서나 주인공다운 모습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강렬한 포스가 저절로 차 넘친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다들 잇따라 룸으로 들어갔다. 윤혁재는 하시은을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어르신의 뜻이죠?”
  • 박찬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 한편 배성진은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본인만 따돌림을 당한 것 같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왜 나만 모르는데? 왜?”
  • “머리 좋은 사람이 눈치도 빨라.”
  • 박찬우는 그에게 술 한 병 내던지며 말했다.
  • “소리 그만 질러. 저번에 말한 거 내가 한번 힘써볼게.”
  • “역시 형밖에 없어요!”
  • 배성진은 술병을 따고 기분이 좋아진 듯 한잔 들이켰다.
  • 윤혁재와 박찬우는 모두 상업에 관심이 많지만 배성진은 전혀 흥취가 없다. 그는 배씨 가문에서 벌 만큼 벌었다고 생각하여 실컷 허송세월할 뿐이었다.
  • 전 재산을 여자에게 퍼부어도 여한이 없기에 남녀 사이에 관한 일에 유난히 예민하다.
  • 배성진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하시은을 쳐다봤다. 한편 박찬우는 묵묵히 술을 들이켜며 줄곧 그녀만 곁눈질했다. 이에 배성진은 좀 전에 박찬우가 대답하지 못한 그 물음이 또다시 생각났다.
  • 왜 하시은을 이곳에 데리고 온 걸까?
  • 어쩌면 박찬우가 갈피를 못 잡은 게 아닐까?
  • 배성진은 문득 든 생각에 가슴이 움찔거렸다.
  • 박찬우는 그동안 어떤 여자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는데 하시은은 줄곧 그의 옆에 있었다. 그녀를 묵인한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박인성은 하시은 때문에 사망했다. 어르신이 혼인신고를 다그칠 때 박찬우는 정말 사심이 없었을까?
  • 어르신이 아무리 몰아붙인다고 해도 박찬우는 절대 고분고분하게 들어줄 리 없다. 그는 사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 그동안 모두가 하시은이 박찬우를 좋아한다고 놀려댔지만 정작 박찬우는 그녀를 여동생으로만 대한 걸까?
  • 배성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 정말 그의 생각대로 박찬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여자를 사랑한다면 이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 그는 적당한 선에서 박찬우를 말려야 한다!
  • 휴대폰 진동 소리와 함께 문자 한 통이 전송됐다.
  • 이제부터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생겨났다.
  • 배성진은 사악한 미소를 날리며 눈알을 굴렸다. 이를 본 윤혁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매번 그가 이렇게 사악한 미소를 지을 때마다 어김없이 나쁜 일이 벌어지곤 한다.
  • 배성진이 하시은을 대하던 태도를 생각하자 윤혁재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 룸 안은 매우 널찍했고 각종 오락 시설이 갖춰져 그들 세 남자의 취미에 완전히 부합했다. 윤씨 가문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서 그들도 모일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전에는 만날 때마다 거의 밤을 새우며 놀았는데 오늘은 왠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박찬우는 홀로 묵묵히 술만 마셨고 가끔 한두 마디 곁들일 뿐이었다. 한편 배성진은 줄곧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하시은을 훑어보다가 그녀와 박찬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윤혁재는 사고뭉치 배성진이 무슨 사달을 낼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 네 사람 가운데 하시은만 허리를 곧게 펴고 탁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 전에도 이곳에 수없이 왔지만 지금처럼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은 처음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고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 그녀는 더이상 모두가 사랑하는 박씨 가문의 막내딸이 아니었다. 사악하기 그지없고 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 않는 악독한 여자일 뿐이었다.
  • 하시은은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만에 하나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이 박찬우라면...
  • “형, 왜 이렇게 따분해졌어요?”
  • 배성진은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잔을 들고 박찬우의 곁에 다가갔다.
  • “우릴 불러놓고 왜 지루하게 혼자 술 마셔요?”
  • 그는 고개를 돌리고 윤혁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혁재 형, 여자애 두 명 불러줘요. 나 너무 외롭단 말이에요!”
  • 그는 일부러 간드러진 콧소리를 냈다.
  • 윤혁재는 미간을 확 찌푸리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 “넌 여자 없이 못 사는 그 버릇 대체 언제 고칠 거야?”
  • “실은.”
  • 배성진이 술잔을 들고 박찬우와 살짝 잔을 부딪쳤다.
  • “시은 씨도 괜찮은데 그냥 시은 씨한테 노래 좀 불러 달라고 할까요?”
  • 배성진은 전에도 이렇게 하시은을 자주 놀렸었는데 그때마다 박찬우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하시은을 괴롭히는 걸 박인성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질책당할 거라면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 하여 배성진도 전에는 분수를 잘 지켰다.
  • 다만 하시은은 워낙 미모가 수려했다. 도화안에 맑고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기 그지없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예리한 느낌을 더 실어주었다.
  • 오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은 인형을 방불케 했다.
  • 배성진은 미녀를 수없이 봐왔지만 하시은처럼 청순하고 고혹적인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 고고하면서도 절제된 그 매력이 너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 한편 하시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배성진을 쳐다봤다.
  • 전에는 그래도 성진 오빠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었는데 인제 와서 아가씨 역할이나 하란 말인가? 대체 그녀를 뭐로 본 걸까...
  • 하시은은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박인성이 살아있을 때 모두가 그녀를 챙겨주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야 알아챘다. 사실 모두가 챙겨준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 뒤에 있던 박인성이었다는 것을.
  • 혹은 박인성을 존경하는 박찬우를 챙겼을지도 모른다.
  • 하시은은 이젠 박찬우에게 미운털이 박혔으니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그녀를 멀리했다.
  • 그녀는 저도 몰래 박찬우를 바라보며 촉촉한 눈길로 구조 신호를 보냈다.
  • “안 오고 뭐 해? 성진이가 한 말 못 들었어?”
  • 박찬우는 그녀의 무고한 눈빛을 바라보더니 짜증이 확 밀려와 마이크를 힘껏 탁자에 내리쳤다.
  • “노래 불러 당장!”
  • 윤혁재는 늘 행동파였다. 아까 배성진이 그 요구를 제기하자마자 그는 얼른 여자애들을 불러왔다. 안유겸의 체면을 봐서라도, 박씨 가문의 사모님인 하시은을 봐서라도 일을 너무 궁지로 몰아가고 싶지 않았다.
  • 하물며... 그녀는 전에 그를 혁재 오빠라고 불러줬으니까.
  • 하시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침 여자애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 그녀는 아리따운 소녀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몰래 한숨을 돌렸다.
  • 윤혁재는 하시은의 사소한 표정과 행동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안유겸은 그녀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어느덧 윤혁재도 슬슬 의심이 생겨났다. 아주 작은 상황에서도 속수 무책해지고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여자가 정말 사람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박인성을 바라보며 그녀는 일부러 구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구하고 싶은데 힘이 닿지 않아 골든 타임을 놓친 걸까?
  • 한편... 그토록 신중한 박찬우가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 아니면 일부러 이 점을 간과한 것일까?
  • “찬우 씨, 화 풀어요.”
  • 더원 술집의 인기녀 채영이 기회를 노리고 박찬우의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녀는 이참에 자신의 사장님과 박찬우의 앞에서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 그녀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과 많이 달라진 하시은을 흘겨보며 포도를 뜯었다.
  • “찬우 씨, 포도 드시면서 화 좀 식혀요.”
  • 채영의 가슴은 밖으로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박찬우에게 미친 듯이 들이댔다.
  • 이때 룸 문이 열렸다. 룸 안엔 귀청이 째질 듯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져 아무도 그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지만 박찬우는 마침 고개를 들어 문 앞에 서 있는 하시은을 바라보다가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발견했다.
  • 이제 막 자리를 뜨려던 박찬우는 갑자기 머리를 홱 돌리고 채영의 손에 있던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