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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왜 안 들어와요?

  • 안유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린 후 곧바로 문자를 지웠다.
  • 하시은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강리나와 정연이 여전히 안에 있었다. 그녀는 병실 문밖에 서서 안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저 자신이 하찮게 느껴졌다.
  •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확 난처해진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 하지만 박건호가 이제 막 위험에서 벗어나 그녀는 줄곧 신경이 쓰였다.
  • 주변을 쭉 둘러보니 복도 끝에 긴 벤치가 놓여있었다. 하시은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자 다리가 시큰거렸다. 앉아서 잠시 휴식하려던 참이었는데 결국 바로 잠들어버렸다.
  • 박찬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시은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채 쿨쿨 자고 있었다.
  • ‘역시 눈에 뵈는 게 없는 여자였어! 어디서든 이렇게 잘 자다니!’
  • 그는 불쑥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손을 살짝 내리치며 그녀를 깨웠다.
  • 하시은은 흠칫 놀라더니 비몽사몽한 채로 박찬우를 쳐다봤다. 순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 ‘설마 진짜... 나더러 오늘 밤을 책임지라는 거야?’
  •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병실 문이 열리고 강리나가 나왔다.
  • 그녀는 박찬우가 문밖을 스쳐 지나가는 걸 진작 발견했지만 웬일인지 줄곧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문을 열고 나왔다.
  • 그녀는 비록 박씨 가문에 시집오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이미 자신을 박씨 가문의 사람으로 여겼다.
  • 박찬우는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하시은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커다란 그림자가 마침 그녀를 뒤덮었다. 강리나의 방향에서 보니 두 사람 사이에 사뭇 애틋한 분위기가 흘렀다.
  • 박찬우는 대체 하시은에게 어떤 마음인 걸까?
  •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사망하여 하늘나라로 갔는데 하시은 저 천한 년은 왜 이렇게 잘 살고만 있는 걸까?!
  • 강리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 “왜 안 들어와요?”
  • 박찬우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홱 돌리고 반쯤 멍하니 있는 하시은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 “안 들어가고 뭐 해?”
  • 보다시피 그는 강리나가 안중에 없었다. 전에 그녀가 백화점에서 기고만장하게 직원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직접 봐왔지만 인성 형과 사이가 좋은 탓에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줄곧 강리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 강리나의 표정이 살짝 얼어붙었다.
  • 원망과 증오가 얽히고설킨 넝쿨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 퍼졌다. 강리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 “너 여기서 잠든 거야?”
  • 그녀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하시은에게 덮어주기까지 했다.
  • 박인성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강리나는 단 한 번도 하시은에게 이토록 친절한 적이 없었다.
  • 오늘 갑자기 예전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하시은은 별생각 없이 몽롱한 눈을 비비며 환하게 말했다.
  • “리나야!”
  • 강리나의 눈가에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 박찬우는 이 모든 걸 빤히 지켜보았다.
  • 강리나는 하시은을 잡아당기더니 조심스럽게 박찬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 “얼른 들어가요. 아버님, 어머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 박찬우는 꿈쩍하지 않는 하시은을 쳐다봤다.
  • “왜 안 가?”
  • 그는 마침 하시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 “팔짱 껴.”
  • 박찬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 하시은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 “왜요?”
  • “오늘 금방 결혼했으니 아빠가 보면 좋아하실 거야.”
  • 그녀는 아직 이 중요한 일을 강리나에게 알리지도 못했는데 박찬우가 아무렇지 않게 입밖에 내던졌다. 하시은은 두꺼운 옷을 걸쳤음에도 강리나가 흠칫 놀라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 ‘인성 씨가 금방 사망했는데 두 사람 결혼한 거야?!’
  • 박찬우가 하시은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방면으론 감히 상상치도 못했다. 그런데 정말 이루어지다니...
  • ‘하시은이 인성 씨를 죽였고, 그런 그녀가 죽을 만큼 미운데 결국 결혼한 거야? 이렇게 되면 시은이만 보호받는 거잖아? 게다가 박찬우가 결혼 얘기를 먼저 꺼냈다는 것은 시은이를 건드리지 말라고 일부러 나한테 경고하는 거네?’
  • 강리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시은이 교도소에 안 간 것도 다 이것 때문인 듯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박찬우의 성격에 하시은은 진작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 ‘하시은이 모든 걸 잃고 소리 없이 사라지게 하려면 간접적인 방안을 시도해야겠네.’
  • 강리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 “리나야.”
  • 하시은이 입을 열자마자 그녀가 덥석 말을 잘랐다.
  • 강리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박찬우를 빤히 쳐다봤다.
  • “두 사람... 결혼했어요?”
  • 박찬우는 하시은의 팔을 강리나한테서 빼내더니 제 팔에 걸치고는 옷 주머니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내 그녀 앞에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 그는 강리나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비록 그도 이 결혼이 탐탁지 않지만 좀 전에 하시은이 그녀에게 감쪽같이 속히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울화가 치밀었다.
  • ‘내 사람은 아무리 밉고 가증스러워도 나만 괴롭힐 수 있어. 다른 사람은 절대 끼어들지 못해.’
  • 심지어 강리나는 비겁하게 등 뒤에서 칼을 찌르려 했다.
  • 박찬우는 오늘 회사에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후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보았는데 뜻밖에도 그 사진들이 강리나가 꾸민 짓이란 걸 알게 되었다.
  • 그 의도는 너무 뻔했다.
  • 두 사람 사이에 오해를 불러일으켜 박찬우가 하시은을 더 싫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 그녀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이런 수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불쾌했다.
  • 박씨 가문에서 지낸 이 몇 년 동안 박찬우는 사실 하시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박인성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마냥 순수하고 해맑아 보였다. 그에게도 오빠라고 부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심금을 녹였다.
  • 박찬우는 그제야 알아챘다. 하시은은 한동안 그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 순간 그는 분노가 차올랐다.
  • 박찬우는 차가운 말투로 강리나에게 말했다.
  • “봤어?”
  • 그는 귀찮다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혼인신고서를 접고 자리를 떠났다. 하시은이 따라오든 말든 곧게 병실로 향했다.
  • 하시은은 그의 모습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 ‘혼인신고서를 옷 주머니에 넣고 다녀?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고?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이지? 분명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 한편 강리나는 온몸이 굳어졌다.
  • ‘박찬우가 정말 하시은 저 천한 년과 결혼했어?! 저년은 인성 씨를 죽인 범인이잖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 게다가 두 사람은 인성 씨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사람이잖아!’
  • 강리나는 순간 배신감에 휩싸였다. 박인성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워할까...
  • “리나야!”
  • 하시은이 고개 돌려 그녀를 불렀다. 차갑고 냉정한 박찬우한테서 벗어나 강리나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박찬우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다행히 강리나는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아무렇지 않게 뒤따라왔다.
  • 정연도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마친 일을 미처 모르는 듯싶었다. 하시은도 먼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일을 더 귀찮게 만들 테니까.
  • 그녀가 박찬우의 팔짱을 끼고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정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