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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입사 수속

  • 고개를 돌리자 살짝 달아오른 하시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말실수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닫고 그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 “가자, 방금 한턱낸다고 한 사람이 번복하면 안 되지.”
  • 안유겸은 한결같이 배려가 넘쳤다. 마음속에 수천 가지 의문과 불만이 있다고 해도 항상 남 생각을 먼저 한다.
  • 다만 씁쓸한 기분은 홀로 소화할 수밖에 없다.
  • 이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겪는 이루 말하기 힘든 외로움이다.
  • 하시은은 그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 “오늘 우리 학교에는 왜 왔어?”
  • “수속하러.”
  • “무슨 수속?”
  • “입사에 필요한 수속.”
  • “어? 여기서 출근하려고?”
  • “응. 다만 네가 없을 줄은 몰랐지.”
  • 그는 늘 가문의 사업에 관심이 없었다. 비록 귀국하긴 했으나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았다.
  • 반면, 학교라는 비교적 단순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좋았고, 게다가 하시은도 재직 중이기에 마침 채용 공고가 떠서 얼른 지원했지만 그녀가 해고당할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 “다시 학교에서 일하고 싶어?”
  • 하시은의 두 눈에 또다시 열망이 피어올랐다.
  • “당연하지!”
  •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 “하지만 박찬우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 아니면... 시중을 잘 들어주면 혹시 모른다.
  • 지하실에서의 그날 밤은 그녀의 첫 경험이었지만, 매우 수치스럽고 비참한 경험이었기에 악몽과 마찬가지인지라 결코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 “나만 믿어.”
  • 안유겸이 다정하게 말했다.
  •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 이내 한 마디 더 보탰다.
  • “어렸을 때 행복한 추억을 많이 안겨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 “하지만 박찬우는...”
  • 망설이고 있는 그녀를 본 안유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마음속으로부터 편안하고 믿음이 갔다.
  • “난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야. 하시은, 두려워하지 마.”
  • 그녀는 용감하고 순진하며 자유로운 여자로 남아 있어야 하되 날개가 꺾여서는 안 되었다. 더군다나 부당한 혐의로 살인자 명의를 뒤집어쓴 채 증오 때문에 빛이 가려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이 말들은 그가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걱정과 바람이었다.
  • 두 사람이 간 곳은 유명 레스토랑으로 안유겸이 유학 가기 전에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저녁에만 영업하는 이 레스토랑은 정통 프렌치 요리 전문점이며, 어디에 앉든 J시티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 게다가 멤버십 제도로 운영하고 있어 밥 먹으러 드나드는 손님은 다들 한자리하는 사람들이다.
  • 레스토랑에는 아름다운 음악을 즉석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늘 상주해 있으며, 먹음직스러운 요리까지 더해 청각, 시각,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 ...
  • 별장.
  • 박찬우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하시은의 모습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 그를 발견한 황미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 “하시은 씨는 아직 귀가 전이에요.”
  • “오후에 나갔는데 아직도 밖이라고요?”
  • “전화했더니 오늘 저녁은 친구랑 나가서 먹는다고 집에 안 온다고 했어요.”
  • “어떤 친구요?”
  • “성이 안씨라고 했던 것 같아요.”
  • 황미숙이 대답했다.
  •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꽤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요?”
  • “몇 시에 얘기해줬어요?”
  • “방금이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 그녀는 소파에 걸친 코트를 집어 들고 밖으로 쫓아나갔다.
  • “도련님, 어디 가세요? 옷이요!”
  • 그러나 박찬우는 어찌나 빠른지 차가 이미 대문 밖을 빠져나갔다.
  • 그는 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시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당장 알아내.”
  • 주영은 추진력이 강한 편이다.
  • “네.”
  • 그는 1분도 안 되어 정확한 위치를 박찬우에게 보내주었다. 곧이어 박찬우는 신서율에게 연락했다.
  • “통화 괜찮아?”
  • 그녀의 말투에는 놀라움이 묻어났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 “무슨 일인데?”
  • 박찬우가 말했다.
  • “나랑 밥 먹으러 가자. 10분 후에 너희 집까지 데리러 갈 테니까.”
  • 신서율은 즉시 대답했다.
  • “알았어.”
  •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 때문에 그녀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거울에 비친 아름답고 화려한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박찬우가 오늘 갑자기 연락한 이유에 대해 알 필요는 전혀 없었고, 그녀는 오로지 결과만 원했다. 즉, 이익을 극대화하는 그런 결과 말이다.
  • 그녀는 박찬우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물론 명예와 이익도 잃고 싶지 않았다.
  • ...
  • 하시은은 즐거운 식사를 이어갔다. 스테이크도 여느 때처럼 맛있고, 와인도 달달하니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안유겸은 잘 챙겨주는 편이라 낯선 타국에서 있었던 웃긴 에피소드를 끝도 없이 털어놓은 덕분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 이때, 메인 셰프가 큰소리로 외쳤다.
  • “박찬우 씨.”
  • 늘 도도하기로 소문난 메인 셰프가 이처럼 공손한 태도로 대하는 사람은 J시티를 통틀어 박찬우밖에 없을 것이다.
  • 이에 하시은은 고개를 돌렸다.
  • 그의 옆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신서율이 서 있었다.
  • 두 사람은 바로 옆 테이블에 멈춰 섰다.
  • 박찬우의 시선이 그녀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 안유겸한테 고정되었다.
  • “오랜만이네요.”
  • 분위기가 점점 더 싸늘해진 그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냈다. 반짝이는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조물주 같았다.
  • 다들 J시티에서 난다 긴다 하는 가문으로 서로 자연스럽게 마주쳤을 것이다. 특히 유년 시절에 스스로 의사 결정하기 힘들 때는 부모님의 손에 강제로 각종 사교 모임에 끌려다녔기에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만나게 된다.
  • 안유겸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이에요.”
  • 박찬우는 의자를 당겨 신서율을 앉히고는 메뉴판을 건넸다.
  • “먹고 싶은 거 시켜.”
  • 신서율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은 하시은을 보자 불쾌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 “그냥 시그니처 메뉴 주세요.”
  • 그녀는 오늘 신분이 탄로 나는 게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났다. 호감형 얼굴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걸려 있었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인해달라는 요구도 받았다.
  • 하시은은 그녀를 몰래 흘끔거리다 가끔 박찬우를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에 안유겸을 향해 눈짓했다.
  • 이내 무슨 뜻인지 눈치챈 안유겸은 하시은과 함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이를 본 박찬우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서 안유겸이 눈앞에서 당장 사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하시은을 향해 물었다.
  • “오늘 저녁은 왜 집에 와서 먹지 않았어?”
  • 그는 꼿꼿이 앉아서 신서율과 마주 보았는데, 하시은은 자신한테 묻는 말이라고 전혀 의식하지 못해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나서 오히려 안유겸을 향해 물었다.
  • “다 먹었으면 이만 갈까?”
  • 자기가 좋아하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같이 밥 먹는 것도 모자라 보기만 해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라서 더 부아가 치밀었다. 반면, 자신을 떠올리자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 안유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자.”
  • 레스토랑 안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 박찬우가 다시 캐물었다.
  • “내가 묻는 말 못 들었어?”
  • “네?”
  • 하시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서율 언니를 보면서 물었잖아요.”
  • “당신,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장에 있던 네 사람은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박찬우 본인마저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 호칭을 부를 줄은 몰랐다.
  • 하시은도 질세라 맞받아쳤다.
  •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방해하기라도 했나요?”
  • 박찬우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 “왜 집에서 밥 안 먹었어?”
  • “그럼 당신은 왜 집에 가서 밥을 먹지 않았는데요?”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 자칫 이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박찬우는 아슬아슬하게 목구멍으로 삼켰다.
  • “눈은 장식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