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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쫓겨나다

  • 하시은은 요리 솜씨가 서툴렀다. 그동안 박인성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다. 또한 박인성은 그녀가 주방에서 힘든 일하는 걸 싫어했다. 한번은 본가에서 고용인과 함께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처음으로 화를 버럭 냈었다.
  • 사람의 기억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본가의 모든 건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녀가 박찬우의 집을 즐겨 찾는 이유는 박인성의 절대 금지령 때문이었다.
  • 이곳에 있으면 그녀는 자유를 느낀다.
  • 특히 박찬우가 신서율과 헤어졌을 때 유난히 자주 놀러 왔는데, 다름이 아니라 가슴이 아팠기에 최선을 다해 그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다.
  •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오로지 박찬우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황미숙한테서 제일 간단한 요리인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박찬우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국수 요리라고 해도 맛 기준이 엄격했다. 어떤 종류의 면을 쓰고, 어느 정도로 익혀야 하며, 어떠한 고명을 올리는지에 대해 명확한 원칙이 있다.
  • 하시은은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했고, 황미숙이 했던 모든 말을 몽땅 메모해서 지령처럼 여겨 달달 외우지 못해 아쉬울 지경이었다.
  • 하지만 요리에 소질도 없고 생소한지라 적당한 식감을 살리기 위해 국수를 삶는 데만 냄비를 몇 개나 썼는지 모른다.
  • 마지막으로 삶은 국수는 보기에 그럴싸했지만, 자만심에 빠진 나머지 실수로 소금을 많이 넣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소금 지옥에서 재탄생한’ 국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맛도 별로일 텐데, 그는 그릇을 싹 다 비웠다.
  • 심지어 빈 그릇을 들고 꽤 나쁘지 않다는 평까지 남겼다.
  •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를 은이라고 부르는 대신 풀네임을 불렀다. 말할 때마다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는데, 마치 그 순간부터 신서율은 과거가 된 듯싶었다.
  • 나중에 그는 틈만 나면 물잔을 들고 물을 마셨다. 비서실장 주영이 업무 보고를 위해 집에 왔을 때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혹여나 식중독이 걸린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며 홈닥터를 불렀었다.
  • 국수 요리는 그들에게 색다른 의미가 있었다. 하시은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본인뿐만이 아니라고 여겼다.
  • 하지만 오늘 박찬우는 집에 오자마자 국수를 먹겠다고 했고, 심지어 황미숙의 요리가 너무 싱겁다고 했는데, 이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센서 등에도 불이 들어왔다.
  • 하시은은 팔을 뻗어 눈 부신 불빛을 차단하고는 잠시 적응한 뒤 문틈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 남자는 침대 옆에 서서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 “왜 노크 안 해요?”
  • 하시은은 두 팔을 포함해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 그녀의 손목에는 아직 멍이 남아 있는데, 요즘 치료할 시간이 딱히 없었다.
  • 박찬우는 상처에서 눈을 뗐다. 이내 잔뜩 경계하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불 밖으로 빼꼼 내민 자그마한 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 “내 집인데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해? 노크를 왜 해야 하지?”
  • 하시은은 눈을 부릅뜨며 세상 태연한 얼굴로 억지 부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 “이건 억지잖아요!”
  • “억지라고?”
  • 박찬우가 피식 웃었다.
  • “억지가 뭔데?”
  • 하시은이 진지하게 설명을 보탰다.
  • “허락 없이 내 방에 들어오는 거예요!”
  • 박찬우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 “그래서?”
  • “그래서 잘못했다는 뜻이에요.”
  • 희한하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몸이 덜 간지러운 것 같았다.
  • 박찬우는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하여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방문을 굳게 닫고 방 안에 서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 “들어왔다?”
  • 하시은은 어이가 없었다.
  • 박찬우는 연고를 다시 건넸다.
  • “발라줘.”
  • 하시은은 그와 대치하는 대신 천천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 "성진 씨는 왜 그렇게 빨리 갔대요? 금방 오지 않았어요?”
  • 이는 그가 난생처음 당하는 굴욕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더듬거려서 내쫓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어쨌거나 자신의 침실이 아닌지라 그는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 하시은은 그의 잠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검은색 실크 때문에 피부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는데, 감히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그녀는 침대에 무릎 꿇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바르지 못할 것 같았다.
  • 안 그래도 까탈스러운 박찬우가 잘못 발랐다고 또다시 그녀를 탓할 수도 있으니 잠깐 고민하고 나서 말했다.
  • “그냥 엎드려요. 이렇게 앉아 있으면 골고루 바르기 힘드니까.”
  • 잠옷이 마침 옆에 있었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자 왠지 모르게 아직 입양되기 전 상황이 떠오른 나머지 코끝이 찡해 서둘러 할 일을 찾았다.
  • “등에 연고를 제대로 바르지도 않았네요. 다 뭉쳐 있어요.”
  • 배성진이 박찬우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장면을 상상한 그녀는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 “성진 씨가 발라줬죠?”
  • 어쩐지 빨리 간다 했더니 알고 보니 쫓겨난 거였다.
  • 웃음기가 베인 그녀의 말투에 박찬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 “웃어?”
  • 하시은이 감히 찍소리도 못 내자 방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 밀폐된 공간 속에서 여자의 차가운 손끝이 남자의 등 위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빙글빙글 문질렀다.
  • 극도로 편안한 느낌에 박찬우는 꿈나라에 빠졌다.
  • 하시은은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천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를 깨우자니 차마 용기가 나지는 않았고, 그냥 놔두자니 본인은 어디에 가서 자야 하냐는 말이다.
  • 늦은 시간에 황미숙을 찾아간다는 것도 꽤 민폐였다. 박찬우의 허락 없이 감히 그의 방에서 자지는 못했으며, 다른 방은 아직 정리하기 전이었다.
  • 결국 고민 끝에 장롱에서 여분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누웠으나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눈을 감을 때마다 박인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게슴츠레 뜬 눈과 기괴하게 꺾인 목, 그리고 피로 잔뜩 물든 두 손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 예전에 두 형제는 그녀에게 영예 또는 은혜와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눈앞의 하이에나와 뒤를 노리는 호랑이 같았다.
  •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니 벌써 새벽 5시였다.
  • 밖에는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왔다. 하시은은 일어나 이불을 조심스레 치우고 박찬우의 몸을 훑어보았다. 아토피는 대부분 가라앉았고, 여전히 깊은 잠이 든 그를 보자 그제야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돌이 내려앉은 듯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그녀는 다시 바닥에 눕는 대신 침대맡에 서서 박찬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어둠 속에서 적응된 두 눈은 빛이 없더라도 실루엣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 오뚝한 콧날과 남자다운 턱선은 그의 강인함을 한껏 더 돋보이게 했다.
  • 그나마 잠이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한동안은 시중이니 뭐니 언급하지는 않을 테니까.
  • 잠이 들기 전에 하시은은 또다시 지하실의 끔찍한 그 날 밤을 떠올렸다. 정신이 나간 듯한 박찬우,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남긴 박찬우, 증오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박찬우…
  • 머릿속에서 또다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나한테 왜 그랬죠?”
  •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의문이었다.
  • 어두운 방 안에서 박찬우의 기다란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