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은은 요리 솜씨가 서툴렀다. 그동안 박인성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다. 또한 박인성은 그녀가 주방에서 힘든 일하는 걸 싫어했다. 한번은 본가에서 고용인과 함께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처음으로 화를 버럭 냈었다.
사람의 기억은 감정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본가의 모든 건 마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박찬우의 집을 즐겨 찾는 이유는 박인성의 절대 금지령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그녀는 자유를 느낀다.
특히 박찬우가 신서율과 헤어졌을 때 유난히 자주 놀러 왔는데, 다름이 아니라 가슴이 아팠기에 최선을 다해 그의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오로지 박찬우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황미숙한테서 제일 간단한 요리인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박찬우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국수 요리라고 해도 맛 기준이 엄격했다. 어떤 종류의 면을 쓰고, 어느 정도로 익혀야 하며, 어떠한 고명을 올리는지에 대해 명확한 원칙이 있다.
하시은은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했고, 황미숙이 했던 모든 말을 몽땅 메모해서 지령처럼 여겨 달달 외우지 못해 아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요리에 소질도 없고 생소한지라 적당한 식감을 살리기 위해 국수를 삶는 데만 냄비를 몇 개나 썼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삶은 국수는 보기에 그럴싸했지만, 자만심에 빠진 나머지 실수로 소금을 많이 넣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소금 지옥에서 재탄생한’ 국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맛도 별로일 텐데, 그는 그릇을 싹 다 비웠다.
심지어 빈 그릇을 들고 꽤 나쁘지 않다는 평까지 남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를 은이라고 부르는 대신 풀네임을 불렀다. 말할 때마다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는데, 마치 그 순간부터 신서율은 과거가 된 듯싶었다.
나중에 그는 틈만 나면 물잔을 들고 물을 마셨다. 비서실장 주영이 업무 보고를 위해 집에 왔을 때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혹여나 식중독이 걸린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며 홈닥터를 불렀었다.
국수 요리는 그들에게 색다른 의미가 있었다. 하시은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본인뿐만이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 박찬우는 집에 오자마자 국수를 먹겠다고 했고, 심지어 황미숙의 요리가 너무 싱겁다고 했는데, 이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센서 등에도 불이 들어왔다.
하시은은 팔을 뻗어 눈 부신 불빛을 차단하고는 잠시 적응한 뒤 문틈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침대 옆에 서서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왜 노크 안 해요?”
하시은은 두 팔을 포함해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의 손목에는 아직 멍이 남아 있는데, 요즘 치료할 시간이 딱히 없었다.
박찬우는 상처에서 눈을 뗐다. 이내 잔뜩 경계하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이불 밖으로 빼꼼 내민 자그마한 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집인데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해? 노크를 왜 해야 하지?”
하시은은 눈을 부릅뜨며 세상 태연한 얼굴로 억지 부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억지잖아요!”
“억지라고?”
박찬우가 피식 웃었다.
“억지가 뭔데?”
하시은이 진지하게 설명을 보탰다.
“허락 없이 내 방에 들어오는 거예요!”
박찬우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래서?”
“그래서 잘못했다는 뜻이에요.”
희한하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몸이 덜 간지러운 것 같았다.
박찬우는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하여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방문을 굳게 닫고 방 안에 서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왔다?”
하시은은 어이가 없었다.
박찬우는 연고를 다시 건넸다.
“발라줘.”
하시은은 그와 대치하는 대신 천천히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성진 씨는 왜 그렇게 빨리 갔대요? 금방 오지 않았어요?”
이는 그가 난생처음 당하는 굴욕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더듬거려서 내쫓았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침실이 아닌지라 그는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하시은은 그의 잠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검은색 실크 때문에 피부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는데, 감히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무릎 꿇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바르지 못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까탈스러운 박찬우가 잘못 발랐다고 또다시 그녀를 탓할 수도 있으니 잠깐 고민하고 나서 말했다.
“그냥 엎드려요. 이렇게 앉아 있으면 골고루 바르기 힘드니까.”
잠옷이 마침 옆에 있었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자 왠지 모르게 아직 입양되기 전 상황이 떠오른 나머지 코끝이 찡해 서둘러 할 일을 찾았다.
“등에 연고를 제대로 바르지도 않았네요. 다 뭉쳐 있어요.”
배성진이 박찬우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장면을 상상한 그녀는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성진 씨가 발라줬죠?”
어쩐지 빨리 간다 했더니 알고 보니 쫓겨난 거였다.
웃음기가 베인 그녀의 말투에 박찬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웃어?”
하시은이 감히 찍소리도 못 내자 방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여자의 차가운 손끝이 남자의 등 위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손바닥으로 꾹 누르면서 빙글빙글 문질렀다.
극도로 편안한 느낌에 박찬우는 꿈나라에 빠졌다.
하시은은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천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를 깨우자니 차마 용기가 나지는 않았고, 그냥 놔두자니 본인은 어디에 가서 자야 하냐는 말이다.
늦은 시간에 황미숙을 찾아간다는 것도 꽤 민폐였다. 박찬우의 허락 없이 감히 그의 방에서 자지는 못했으며, 다른 방은 아직 정리하기 전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장롱에서 여분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고 누웠으나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박인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게슴츠레 뜬 눈과 기괴하게 꺾인 목, 그리고 피로 잔뜩 물든 두 손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예전에 두 형제는 그녀에게 영예 또는 은혜와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마치 눈앞의 하이에나와 뒤를 노리는 호랑이 같았다.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니 벌써 새벽 5시였다.
밖에는 하늘이 어렴풋이 밝아왔다. 하시은은 일어나 이불을 조심스레 치우고 박찬우의 몸을 훑어보았다. 아토피는 대부분 가라앉았고, 여전히 깊은 잠이 든 그를 보자 그제야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돌이 내려앉은 듯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바닥에 눕는 대신 침대맡에 서서 박찬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 어둠 속에서 적응된 두 눈은 빛이 없더라도 실루엣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오뚝한 콧날과 남자다운 턱선은 그의 강인함을 한껏 더 돋보이게 했다.
그나마 잠이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한동안은 시중이니 뭐니 언급하지는 않을 테니까.
잠이 들기 전에 하시은은 또다시 지하실의 끔찍한 그 날 밤을 떠올렸다. 정신이 나간 듯한 박찬우,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남긴 박찬우, 증오로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박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