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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을 보내줘

시그널을 보내줘

권양이

Last update: 2024-05-18

제1화 오늘 밤, 평생 잊지 못하게 해줄게

  • 음침하고 축축한 지하실.
  • “촤르륵!”
  • 냉수 한 대야가 그녀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 하시은은 움찔 놀라더니 박찬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 형이 직접 운전해서 널 찾으러 갔던 그 날 밤, 대체 왜 도망친 거야?”
  • 차가운 목소리에 독기가 가득 품어 있었다.
  • “교통사고가 났는데 왜 신고도 안 하고 구급차도 안 부르고 형이 죽어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기만 했냐고?!”
  • 하시은은 혀끝을 꼭 깨물며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 박인성은 그녀를 10년 동안 키웠다.
  • J시티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박씨 가문의 큰 도련님은 진작 가문을 떠나 독립한 동생 박찬우를 제외하고 가장 아끼는 사람이 바로 그녀 하시은이었다.
  • 다만 그는 이 여자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
  • “차라리 네가 죽지 그랬어?”
  • 박찬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 “오빠.”
  • 하시은은 목이 싹 말랐다. 그녀는 계속 몸을 꿈틀대다 보니 오히려 전에 없던 고혹적인 매력이 넘쳐 흘렸다. 박찬우는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 “무슨 낯짝으로 아직도 오빠라고 불러?!”
  •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아도 짤막한 이 한마디를 듣는 순간 하시은은 심장이 움찔거렸다.
  • 그의 손이 뜨거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에게 바치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해왔지만 이런 식일 줄은 전혀 몰랐다.
  • ...
  • 9월 13일 그날 밤.
  • 악몽 같은 그 기억이 하시은의 머릿속에서 자꾸만 반복재생되었다.
  • 그날 밤, 하시은은 학교의 업무를 일찍 끝내고 미리 집으로 돌아갔다. 박인성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서프라이즈를 해줄 생각에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 “시은이? 이 10년 동안 걔한테 좋은 것만 쓰이고 좋은 옷만 입혔어. 시은의 피부 상태나 미모 전부 최상의 컨디션이라 표준에 딱 부합돼.”
  • ‘표준? 무슨 표준?’
  • 하시은은 어리둥절한 채 계속 박인성의 말을 엿들었다.
  • 그때 박인성의 말투는 마냥 낯설고 야유로 가득 차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다짐하는 것 같았다.
  • “시은이는 영락없는 햇병아리라 위에서도 분명 만족할 거야... 내가 걔를 몇 년 동안 키워온 이유도 바로...”
  • 하시은은 뒷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머리가 하얘졌다.
  • 이어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났었지?
  • 아 참, 그녀는 박인성이 한 여자아이를 몸 아래에 내리깔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해 숨이 겨우 붙어있는 그 순간, 하시은이 다가가 그를 구해주려 했지만 박인성은 안간힘을 쓰며 두 손을 그녀의 목에 올려놓았다...
  • 다만 그날 밤 겪은 일을 박찬우에게 말해줘도 그가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 박인성은 그가 줄곧 존경하고 그의 수족이 되어준 큰형님이다! 한편 하시은은 현재 J시티에서 배은망덕한 천한 년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가 홧김에 집을 나가자 뒤쫓아오던 박인성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하시은은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구하지 않았다고 소문이 퍼졌다.
  • 이토록 이기적이고 비겁한 인간이 한 말을 대체 누가 믿어주겠는가?
  • 그녀마저도 믿기지 않는 것을!
  • ...
  • “형이 너를 몇 년을 길러줬는데, 어떻게 형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볼 수만 있어?!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지!”
  • 박찬우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
  • “넌 태생이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어?!”
  • 그의 눈가에 뼈에 사무치는 증오가 배어 있었다.
  • 박찬우는 수년간 박씨 가문을 떠나 밖에서 지내면서 유독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박인성뿐이었다. 박인성이 밖에서 여자아이를 주워왔고 그도 별생각 없이 정성껏 돌봤다. 그런데 인성 형이 결국 이 정체 모를 여자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 박찬우는 하시은의 얼굴이 벌게지고 애써 발버둥 치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숨이 거의 넘어가려 하자 그제야 풀어줬다.
  • “너 도망치는 거 좋아하잖아?”
  • 박찬우가 그녀의 앞에 가려진 물건을 잡아당기자 눈앞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침대 머리맡의 카메라 한 대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 “오늘 밤, 평생 잊지 못하게 해줄게.”
  • 이는 마치 피와 눈물이 담긴 선전포고 같았다.
  • 오늘부로 그녀는 더이상 행복할 자격이 없다! 이 카메라가 오늘 밤의 모든 걸 기록할 테니 박찬우는 그녀의 존엄을 모질게 짓밟을 예정이었다.
  • 준수한 그의 외모는 지옥에서 온 악마를 방불케 했다.
  • 그는 박인성의 죽음을 전부 하시은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 사람은 극도로 상심할 때 울분을 터트릴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하시은이 가장 적합했다.
  • ‘형이 널 얼마나 아껴줬는데? 너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결국 목숨을 잃었어! 오늘 널 반드시 무너뜨리고 말겠어!’
  • 약효가 점점 더 강해지자 하시은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것만 같았고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그녀는 공포가 극에 달하여 목청이 터지게 소리쳤다.
  • “오빠도 인성 오빠랑 똑같아요. 전부 나쁜 놈들이에요!”
  • 밖의 빗소리가 점점 거세져 그녀의 절망 섞인 울음소리를 뒤덮었다.
  • 그녀의 피부는 불붙은 듯 뜨거워졌다가 또다시 온몸에 얼음을 감싼 듯 확 차가워졌다.
  • 뜨거움과 차가움의 반복 속에서 하시은은 머리가 점점 어지러웠다.
  • “쾅쾅쾅.”
  • 이때 갑자기 지하실에 성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