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은은 몰래 박찬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아까처럼 불쑥 혼인신고서를 펼쳐 보이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 그녀는 괜히 정연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밀로 유지할 수 있다면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정연은 오늘 선뜻 강리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는데 아직도 그녀를 박씨 가문의 며느리로 인정한 듯싶었다. 보아하니 정연은 아직 박찬우와 하시은의 결혼 소식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강리나가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어머님이 시은이를 더 미워할까? 저 천한 년이 잘사는 꼴을 절대 못 봐. 내가 끝까지 안 놓아줄 거야!’
지하실의 사진을 퍼뜨리면 박찬우가 하시은을 더 오해하고 증오할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휴대폰 진동에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문자를 확인했다.
“발라드 여왕 신서율 오늘 귀국!”
‘신서율이 돌아왔다고?’
강리나는 몰래 기뻐하며 조용히 TV를 켰다.
8시 정각에 J시티 연예 뉴스가 시작된다.
신서율은 국내 인기 발라드 가수로 방송국의 거의 모든 연예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하시은은 그녀의 이름을 듣더니 몇 초 동안 머뭇거린 후에야 용기 내어 박찬우를 쳐다봤다.
그의 눈가에 신서율이라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훈훈했던 병실 분위기는 뉴스 방송과 함께 고요한 정적에 빠져 버렸다.
박찬우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신서율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짧디짧은 몇 분 내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졌다.
“에헴.”
박건호가 멍하니 넋 놓고 있는 하시은을 보더니 마른기침을 해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시은이 요즘 업무 많이 바빠?”
강리나는 박건호가 일부러 하시은을 챙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TV를 끄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울상이 되어 정연의 뒤에 서 있었다.
TV를 끄자 병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박찬우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하시은은 머리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박건호에게 다가가 다리를 주물러드리려고 했다.
다만 이제 막 가까이 다가가는데 정연이 덥석 가로막았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간병인더러 마사지해드리라고 하면 돼.”
하시은은 허공에 팔을 든 채 어쩔 바를 몰라 난처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박건호는 정연의 행동이 썩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가 줄곧 정체불명의 하시은을 싫어하고, 게다가 큰아들의 사망으로 하시은에게 껄끄러움이 남아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흔들며 하시은에게 더 따지지 말라고 눈치를 줄 뿐이었다.
“나 인제 좀 피곤해.”
박건호는 TV만 빤히 쳐다보는 박찬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은이 데리고 가서 새 옷 몇 벌 사입혀. 애가 왜 계속 이 옷만 입고 다녀?”
박찬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정연은 더욱 불만 가득했지만 박건호의 몸 상태를 생각하며 더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이불을 여미어주며 말했다.
“걱정도 태산이네요! 시은이가 입을 옷이 없을까 봐요? 양심도 없는 년!”
하시은은 정연의 욕설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정수기 앞에 다가가 무언가 손에 잡히는 일을 찾아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다만 강리나가 불쑥 팔을 들자 뜨거운 물이 마침 정연의 몸에 쏟아졌다.
“눈멀었어?!”
정연이 버럭 화를 냈다.
“찰싹.”
하시은의 왼 볼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강리나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 정연의 옷을 닦아주었다.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시은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하시은에게 얼른 사과하라고 곁눈질을 해댔다.
하시은은 왼 볼이 뜨겁게 달아올라 너무 괴로웠다. 그녀는 강리나에게 묻고 싶었다. 방금 왜 자신을 밀쳤는지 말이다.
하지만 묻는 순간 정연이 더욱 화를 낼 게 뻔하니 잠자코 있었다. 책임을 회피한다고, 남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운다고 혼낼 게 뻔하다. 하시은도 이 정도쯤은 잘 알고 있다.
“아줌마, 미...”
미처 사과도 못 드렸는데 옆에서 조각상처럼 떡하니 서 있던 박찬우가 갑자기 말을 잘랐다.
“아빠, 엄마, 저 그럼 시은이 데리고 먼저 집에 갈게요. 휴식 잘하세요.”
박건호가 대답했다.
“그래, 먼저 가봐. 시은이한테 새 옷 몇 벌 사줘.”
“사긴 뭘 산다고 그래요!”
정연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하시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박찬우만 쳐다보며 말했다.
“시은이 우리 집에 절대 들이지 마!”
“안 가고 뭐 해?”
박찬우는 대충 정연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인내심이 거의 고갈되었다. 하시은은 대체 왜 이토록 멍청한 척 연기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강리나는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는데 하시은은 정말 아무런 느낌을 못 받은 걸까? 아까 분명 일부러 밀쳤음에도 끝까지 진실을 털어놓지 않다니. 억울하게 뺨을 맞고도 사과를 하다니? 설마 진짜 박찬우의 앞에서 일부러 착한 사람인 척 연기하는 걸까?
그해 인성 형이 보육원에서 하시은을 고른 이유는 그녀가 워낙 총명하고 똑똑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박씨 가문에서 수년간 함께 지내오면서도 그녀는 줄곧 얌전했고 까탈스러운 정연에게도 늘 참을성 있게 대했다.
일이 이 지경에 다다랐는데 그녀는 굳이 박찬우의 앞에서 가여운 척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
박찬우는 마냥 역겨울 따름이었다!
...
차가 평온하게 도로를 운행하여 호텔로 가득한 골목에 들어서자 하시은이 불쑥 박찬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대충 돈 계산을 하더니 호텔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서 내릴게요.”
박찬우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그녀에게서 팔을 빼내며 살짝 먼지를 털었다.
“왜?”
“여기 호텔이...”
하시은이 겨우 말을 이었다.
“조금 저렴하거든요.”
박인성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녀는 더이상 박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았고 짐도 미처 챙겨오지 못했다. 오늘 박건호가 한 말도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새로운 옷이 필요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세탁기로 빨고 드라이기로 말려서 무려 2주 동안 입고 다녔다.
꼼꼼하고 자상한 어르신을 생각하며 하시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세상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요즘 계속 여기서 지냈던 거야?”
“네.”
차가 멈추고 하시은이 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그 집은... 사모님께서 저를 안 들여보낼 거예요.”
박찬우는 차를 길옆에 세웠다. 주변에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네온사인이 따스한 노란색 차를 비추며 눈 부신 빛을 반짝였다. 이는 마치 꿈속의 한 장면 같았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박찬우의 표정도 조금 느슨해졌다.
그는 매번 외박할 때마다 200만 원 이하의 방에서 지낸 적이 없어 이토록 저렴한 방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건넸다.
“꿈에 인성 형 본 적 있어?”
하시은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날 밤은 악몽 같아 영원히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길어진 담뱃재가 도어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바람 따라 흩날려 하시은의 손에 떨어지자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렸다.
“미안한 감정은 전혀 없는 거야?”
박찬우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었다. 차 안에 짙은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인성 형이 오랫동안 널 보물처럼 소중히 다뤘어. 형이 없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대학교 선생님까지 되고 말이야! 아마 대학도 못 붙었겠지. 그렇게 널 아껴주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어.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을 때 엄청 야위었었어. 인성 형도 그때 갓 성인이 되었는데 너의 식생활을 몸소 돌보았지. 죽 한 그릇 만드는 것도 새우 껍질을 다 벗기고 내장까지 제거해서 천천히 끓여줬어. 그렇게 자상한 사람을...”
“그럼 왜 그토록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나만 골랐을까요? 정말 내가 똑똑해서 마음에 든 걸까요?”
하시은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토록 차분하게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그녀는 거울을 제 얼굴에 비치며 수려한 미모를 보여주더니 야유에 찬 미소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