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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뺨을 맞다

  • 하시은은 몰래 박찬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아까처럼 불쑥 혼인신고서를 펼쳐 보이지 말라고 눈치를 줬다. 그녀는 괜히 정연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 비밀로 유지할 수 있다면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 정연은 오늘 선뜻 강리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는데 아직도 그녀를 박씨 가문의 며느리로 인정한 듯싶었다. 보아하니 정연은 아직 박찬우와 하시은의 결혼 소식을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강리나가 머리를 굴렸다.
  • ‘어떻게 하면 어머님이 시은이를 더 미워할까? 저 천한 년이 잘사는 꼴을 절대 못 봐. 내가 끝까지 안 놓아줄 거야!’
  • 지하실의 사진을 퍼뜨리면 박찬우가 하시은을 더 오해하고 증오할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 갑작스러운 휴대폰 진동에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문자를 확인했다.
  • “발라드 여왕 신서율 오늘 귀국!”
  • ‘신서율이 돌아왔다고?’
  • 강리나는 몰래 기뻐하며 조용히 TV를 켰다.
  • 8시 정각에 J시티 연예 뉴스가 시작된다.
  • 신서율은 국내 인기 발라드 가수로 방송국의 거의 모든 연예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 하시은은 그녀의 이름을 듣더니 몇 초 동안 머뭇거린 후에야 용기 내어 박찬우를 쳐다봤다.
  • 그의 눈가에 신서율이라는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 훈훈했던 병실 분위기는 뉴스 방송과 함께 고요한 정적에 빠져 버렸다.
  • 박찬우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신서율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 짧디짧은 몇 분 내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졌다.
  • “에헴.”
  • 박건호가 멍하니 넋 놓고 있는 하시은을 보더니 마른기침을 해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 “시은이 요즘 업무 많이 바빠?”
  • 강리나는 박건호가 일부러 하시은을 챙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재빨리 TV를 끄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울상이 되어 정연의 뒤에 서 있었다.
  • TV를 끄자 병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박찬우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 하시은은 머리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 “아니요. 괜찮아요.”
  • 그녀는 말하면서 박건호에게 다가가 다리를 주물러드리려고 했다.
  • 다만 이제 막 가까이 다가가는데 정연이 덥석 가로막았다.
  • “그럴 필요 없어.”
  • 그녀는 침대 머리맡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 “간병인더러 마사지해드리라고 하면 돼.”
  • 하시은은 허공에 팔을 든 채 어쩔 바를 몰라 난처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 박건호는 정연의 행동이 썩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녀가 줄곧 정체불명의 하시은을 싫어하고, 게다가 큰아들의 사망으로 하시은에게 껄끄러움이 남아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흔들며 하시은에게 더 따지지 말라고 눈치를 줄 뿐이었다.
  • “나 인제 좀 피곤해.”
  • 박건호는 TV만 빤히 쳐다보는 박찬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 “시은이 데리고 가서 새 옷 몇 벌 사입혀. 애가 왜 계속 이 옷만 입고 다녀?”
  • 박찬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 정연은 더욱 불만 가득했지만 박건호의 몸 상태를 생각하며 더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이불을 여미어주며 말했다.
  • “걱정도 태산이네요! 시은이가 입을 옷이 없을까 봐요? 양심도 없는 년!”
  • 하시은은 정연의 욕설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정수기 앞에 다가가 무언가 손에 잡히는 일을 찾아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다만 강리나가 불쑥 팔을 들자 뜨거운 물이 마침 정연의 몸에 쏟아졌다.
  • “눈멀었어?!”
  • 정연이 버럭 화를 냈다.
  • “찰싹.”
  • 하시은의 왼 볼이 금세 빨갛게 부어올랐다.
  • 강리나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 정연의 옷을 닦아주었다.
  • “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시은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 그녀는 말하면서 하시은에게 얼른 사과하라고 곁눈질을 해댔다.
  • 하시은은 왼 볼이 뜨겁게 달아올라 너무 괴로웠다. 그녀는 강리나에게 묻고 싶었다. 방금 왜 자신을 밀쳤는지 말이다.
  • 하지만 묻는 순간 정연이 더욱 화를 낼 게 뻔하니 잠자코 있었다. 책임을 회피한다고, 남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운다고 혼낼 게 뻔하다. 하시은도 이 정도쯤은 잘 알고 있다.
  • “아줌마, 미...”
  • 미처 사과도 못 드렸는데 옆에서 조각상처럼 떡하니 서 있던 박찬우가 갑자기 말을 잘랐다.
  • “아빠, 엄마, 저 그럼 시은이 데리고 먼저 집에 갈게요. 휴식 잘하세요.”
  • 박건호가 대답했다.
  • “그래, 먼저 가봐. 시은이한테 새 옷 몇 벌 사줘.”
  • “사긴 뭘 산다고 그래요!”
  • 정연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하시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박찬우만 쳐다보며 말했다.
  • “시은이 우리 집에 절대 들이지 마!”
  • “안 가고 뭐 해?”
  • 박찬우는 대충 정연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인내심이 거의 고갈되었다. 하시은은 대체 왜 이토록 멍청한 척 연기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 강리나는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는데 하시은은 정말 아무런 느낌을 못 받은 걸까? 아까 분명 일부러 밀쳤음에도 끝까지 진실을 털어놓지 않다니. 억울하게 뺨을 맞고도 사과를 하다니? 설마 진짜 박찬우의 앞에서 일부러 착한 사람인 척 연기하는 걸까?
  • 그해 인성 형이 보육원에서 하시은을 고른 이유는 그녀가 워낙 총명하고 똑똑하여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박씨 가문에서 수년간 함께 지내오면서도 그녀는 줄곧 얌전했고 까탈스러운 정연에게도 늘 참을성 있게 대했다.
  • 일이 이 지경에 다다랐는데 그녀는 굳이 박찬우의 앞에서 가여운 척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
  • 박찬우는 마냥 역겨울 따름이었다!
  • ...
  • 차가 평온하게 도로를 운행하여 호텔로 가득한 골목에 들어서자 하시은이 불쑥 박찬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대충 돈 계산을 하더니 호텔 하나를 가리켰다.
  • “여기서 내릴게요.”
  • 박찬우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그녀에게서 팔을 빼내며 살짝 먼지를 털었다.
  • “왜?”
  • “여기 호텔이...”
  • 하시은이 겨우 말을 이었다.
  • “조금 저렴하거든요.”
  • 박인성이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녀는 더이상 박씨 가문에서 지내지 않았고 짐도 미처 챙겨오지 못했다. 오늘 박건호가 한 말도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새로운 옷이 필요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세탁기로 빨고 드라이기로 말려서 무려 2주 동안 입고 다녔다.
  • 꼼꼼하고 자상한 어르신을 생각하며 하시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 이 세상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 “요즘 계속 여기서 지냈던 거야?”
  • “네.”
  • 차가 멈추고 하시은이 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 “그 집은... 사모님께서 저를 안 들여보낼 거예요.”
  • 박찬우는 차를 길옆에 세웠다. 주변에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네온사인이 따스한 노란색 차를 비추며 눈 부신 빛을 반짝였다. 이는 마치 꿈속의 한 장면 같았다.
  •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박찬우의 표정도 조금 느슨해졌다.
  • 그는 매번 외박할 때마다 200만 원 이하의 방에서 지낸 적이 없어 이토록 저렴한 방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건넸다.
  • “꿈에 인성 형 본 적 있어?”
  • 하시은이 곧바로 대답했다.
  • “아니요.”
  • 그날 밤은 악몽 같아 영원히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 길어진 담뱃재가 도어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바람 따라 흩날려 하시은의 손에 떨어지자 뜨거운 열기가 이글거렸다.
  • “미안한 감정은 전혀 없는 거야?”
  • 박찬우는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었다. 차 안에 짙은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 “인성 형이 오랫동안 널 보물처럼 소중히 다뤘어. 형이 없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대학교 선생님까지 되고 말이야! 아마 대학도 못 붙었겠지. 그렇게 널 아껴주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어.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왔을 때 엄청 야위었었어. 인성 형도 그때 갓 성인이 되었는데 너의 식생활을 몸소 돌보았지. 죽 한 그릇 만드는 것도 새우 껍질을 다 벗기고 내장까지 제거해서 천천히 끓여줬어. 그렇게 자상한 사람을...”
  • “그럼 왜 그토록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나만 골랐을까요? 정말 내가 똑똑해서 마음에 든 걸까요?”
  • 하시은이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챘다.
  • 그녀는 단 한 번도 이토록 차분하게 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그녀는 거울을 제 얼굴에 비치며 수려한 미모를 보여주더니 야유에 찬 미소를 날렸다.
  • “나의 이 얼굴 때문 아닐까요?”
  • 담배 한 대를 거의 다 피운 박찬우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