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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조용히 좀 해요

  • 하시은은 길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 그녀는 곧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적어도 지금은 절대 고개를 되돌릴 수 없다.
  • 와르르 무너지게 될 테니.
  • “그럼 저의 직장은...”
  •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자동차 배기가스뿐이었다.
  • 바람이 거세지자 하시은은 옷깃을 여밀 뿐 호텔로 걸어가지 않았다.
  • 이젠 더는 호텔에서 묵을 돈이 없었다.
  • 요 며칠은 줄곧 싸구려 모텔에서만 지냈다. 어두컴컴한 복도와 곰팡이로 가득한 방안, 그리고 허름한 시설까지...
  • 이 초라한 몰골을 박찬우에게 보여주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 모텔 입구에 도착하자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 그는 바로 안유겸이었다.
  • 안유겸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손에는 여성 의류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 한편 그의 앞에서 하시은은 항상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 안유겸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 “바보, J시티에서 사람 한 명 찾는 게 뭐가 어려워?”
  • “하긴, 너니까.”
  • 하시은은 계단을 가리켰다.
  • “저기 엄청 더럽고 난장판이야. 우리 근처로 나가자. 내가 야식 사줄게.”
  • “아니야, 됐어. 나 집에 또 가봐야 해.”
  • 안유겸은 쇼핑백을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오래 머물러봤자 하시은만 난처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너 오늘 입은 옷이 좀 낡은 것 같아서 새 걸로 몇 벌 사봤어.”
  • 사실 받고 싶지 않았으나 박건호가 새 옷을 사 입으라던 당부가 생각나 넙죽 받았다.
  • 안유겸은 또 한 번 무심코 그녀에게 큰 도움을 줬다.
  • 하시은은 업무가 정상으로 회복되면 새 옷 몇 벌 사서 그에게 주기로 했다.
  • 안유겸은 옷을 준 후 더 머물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
  • 사실 하시은은 새 옷 뿐만 아니라 안유겸이 현재 그녀가 박씨 가문에서 처한 난감한 입장을 캐묻지 않아서 더 감격스러웠다. 그의 신분으로 이렇게 더러운 구역은 난생처음 와봤을 텐데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 가끔은 침묵이 가장 좋은 위로였다.
  • 하시은은 쇼핑백을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녀는 모텔 모퉁이에 검은색 마이바흐가 세워져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그 차는 마치 어두운 밤의 한 마리 새처럼 구석에 조용히 있었다.
  • 박찬우는 이미 담배를 세 대나 피웠다. 그는 워낙 자율적이라 하루에 담배 한 대를 초과하지 않지만 오늘은... 뒷좌석에 덩그러니 놓인 여성 의류 쇼핑백은 미처 하시은에게 건네지도 못했다. 박찬우는 분노가 차올라 핸들을 꽉 쥐었다.
  • 모텔의 복도는 매우 좁고 불빛도 희미했다. 걸음을 내디디면 온갖 음식물 쓰레기가 밟혀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
  • 박찬우는 더이상 한 걸음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 “어머?”
  • 새 옷을 갈아입은 하시은이 세수하러 공중화장실에 가려다가 문을 연 순간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박찬우와 마주쳤다.
  • 그는 이테리 고급 양복을 입고 수제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온갖 더러운 쓰레기를 즈려밟고 온 그는 비난 조로 쏘아붙였다.
  • “딴 남자한테서 받은 옷을 그새 갈아입었어?”
  • 그 한마디에 하시은은 말문이 턱 막혔다.
  • “저는 단지...”
  • 그녀는 수건을 꽉 잡으며 생각했다.
  • ‘됐어, 어차피 똑같은 옷을 연 며칠 입어도 나한텐 전혀 신경 쓰지 않아.’
  • 박찬우는 더는 예전처럼 그녀의 갖은 애교와 투정을 받아주던 둘째 오빠가 아니었다.
  • “왜 여기서 지내?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몸에 냄새난다고 꺼릴 텐데 걱정도 안 되나 봐?”
  • “조용히 좀 해요!”
  • 하시은이 재빨리 다가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혼나요!”
  • 박찬우는 빽빽한 방문을 바라보며 방금 한 말이 부적절하다는 걸 알아챘다. 사람마다 각자의 처지가 있을 텐데 그는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다. 다만 하시은이 이곳에서 지내는 꼴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 만약 누군가에게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그는 또다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야 할 테니까.
  • 복도의 냄새가 그를 질식하게 했고 몸도 덩달아 간지러웠다.
  • 박찬우는 결벽증이 있어 이런 곳에 처음 오니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 그는 하시은의 손에 쥔 싸구려 수건을 내팽개치고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가 입은 옷을 째려보았다.
  • “당장 따라와!”
  • 하시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 “어디 가는데요?”
  • “집.”
  • 그녀는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난 집이 없어요.”
  • 하시은은 바닥에 널린 옷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 ‘대체 왜 여기로 온 거야? 왜 느닷없이 집으로 가려는 건데?’
  • 집... 그녀에겐 사치에 가까운 단어였다.
  • 10살 전까지 하시은에겐 집이 없었고 22살 때에는 가장 존경하던 사람이 집이라고 여겼던 곳을 직접 무너뜨렸다.
  • 박찬우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네가 왜 집이 없어? 여기서 지내면 안유겸과 만나는 게 편해서 그런 거 아니야?!”
  • 그의 팔엔 이미 붉은 발진이 생겼다. 박찬우는 가려움을 애써 참으며 그녀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 “나 벌써 배신당한 꼴이 되고 싶지 않거든! 기어코 날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 모텔 카운터를 지날 때 주인아줌마는 박찬우의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보더니 선뜻 가로막지 못했다. 결국 하시은은 박찬우에게 질질 끌려 주인아줌마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고급 외제 차에 들어갔다.
  •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팔을 꽉 잡은 그의 손을 보더니 불편한 듯 뒤로 내뺐다.
  • 박찬우는 눈빛이 짙어지더니 일부러인지 또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자 의외로 뜨거운 열기가 화끈거렸다.
  • 하시은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 급하게 안전벨트를 매느라 벨트가 뒤엉켜버렸다. 박찬우는 차근차근 매듭을 풀면서 두 손으로 저도 몰래 그녀의 목을 스쳤다. 하시은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는데 박인성과 쏙 빼닮은 그의 눈매를 보더니 미친 듯이 밀쳐냈다.
  • “나 다치지 말아요!”
  • 박찬우는 분노가 차올랐다.
  • “미쳤어?”
  •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닫혔다.
  • 박찬우는 넥타이를 풀고 소매 단추를 풀어 붉은 발진이 계속 퍼지는 걸 확인하더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는 담뱃불을 지피고 무심코 옆을 힐끗 쳐다봤는데 하시은이 의외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도어가 완전히 닫히지 않아 마침 틈이 하나 생겼는데 그녀의 눈물은 마치 그 틈을 따라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 인성 형이 죽은 후 처음으로 하시은이 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전에 그녀는 툭하면 눈물을 흘렸었다. 집에서 키우던 반려동물이 조금 아파도 엉엉 울었고 이에 인성 형이 어쩔 바를 몰라 그에게 전화해 여자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방법을 묻곤 했다. 그렇게 인성 형이 주로 달래고 박찬우가 보조 역할을 하며 번갈아서 그녀를 달랬다.
  • 박찬우는 박인성처럼 자상하지 못하여 늘 그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울지 말란 한마디만 내뱉을 뿐이었다.
  • 그러면 하시은은 더 세게 울음을 터트렸다.
  • 박인성이 한심한 눈길로 그를 째려보면 박찬우는 서툴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위로의 말은 끝까지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
  • 그가 괴로움에 시달릴 때면 하시은이 낄낄대며 웃기 시작한다.
  • 그 시절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하시은이 모든 걸 직접 무너뜨리다니!
  • 자신을 정성껏 돌봐준 은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어떻게 지켜보기만 하냐고?! 이보다 더 사악한 인간이 있을까?
  • 박찬우는 간만에 큰 감정 기복을 느꼈다. 몸에 난 발진도 가려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담뱃불을 끄고 운전석에 앉았다.
  • “그 가식적인 눈물은 또 뭔데? 본인이 가여워죽겠어? 인성 형이 사망한 지가 며칠인데 대체 누굴 위한 눈물인 거야?”
  • 그는 하시은이 계속 묵묵히 눈물을 흘릴 거라고 여겼지만 뜻밖에도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 “어찌 됐든 그 사람 때문은 아니에요!”
  • 좀 전에 박찬우의 손끝이 그녀의 목에 닿았을 때, 가장 믿고 존경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또다시 휘몰아쳐 눈물이 저절로 터졌다.
  • 그녀는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을 거잖아요. 그러니까 묻지 말아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 박찬우의 눈가에 미안함이 살짝 스쳤다. 그는 수납함을 힐끗 쳐다봤다. 그 안엔 최근에 받은 익명의 사진이 들어 있었는데 대체 그날의 교통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었다. 정말 그가 오해한 걸까?
  • 박찬우는 목을 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정말로 하시은이 제멋대로 집에서 뛰쳐나와 인성 형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녀는 형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