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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혼인신고?

  • 안유겸은 차에서 내려 그녀 앞에 다가갔다. 그는 먼저 두 사람의 키를 비교해보았는데 이젠 하시은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안유겸은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처럼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 “키 컸네. 가자. 어디 가는 길이었어? 내가 데려다줄게.”
  • 안유겸은 5년 전 가족들과 사이가 틀어져 강제로 해외에 나갔다가 오늘 처음 귀국했다. 하시은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 “왜? 날 보니 너무 기뻐서 말이 안 나와?”
  • 이 한 달 동안 그녀에게 벌어진 일을 안유겸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돌아왔다. 그녀가 가장 외롭고 기댈 곳이 없을 때 그는 늘 그래왔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항상 그녀 곁에 있다고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 하시은은 코끝이 찡해지더니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엉엉 울면서 한심한 제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출근하러 가.”
  • 안유겸은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 “박인성 씨 일은... 네 탓 아니야.”
  • 오랜만에 만난 인사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5년 동안의 이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안유겸은 늘 그녀에게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한 친구였다.
  • 햇빛이 그늘을 뚫고 두 사람을 비추자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 이제 막 병실에서 나오던 박찬우가 마침 이 장면을 보았다.
  • 안유겸이 귀국했는데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고 지금 하시은의 앞에 떡하니 서 있다니.
  • ‘이 여자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 박찬우는 무심결에 주먹을 꽉 쥐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지금 당장 하시은을 해고해!”
  • 차가 평온하게 도로를 달리고 창밖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하시은은 눈물을 닦고 목을 축이며 최대한 슬프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 “나... 찬우 씨랑 방금 혼인신고했어.”
  • 박인성이 죽은 후 그녀는 오빠라는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 하여 그녀의 입에서 박찬우의 이름을 들은 안유겸은 살짝 당황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
  • 그는 1초 동안 침묵하다가 마침 사거리에 도착했고 파란 불이라 통행할 수 있었다.
  • 다만 안유겸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핸들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 “너랑 박찬우...”
  • “혼인신고했어.”
  • 하시은은 그가 이렇게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인상 속 안유겸은 항상 온화하고 자상한 이미지였다. 다만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이 일이 워낙 너무 갑작스러워 다들 믿기지 않는 거로 여겼다.
  • 그녀가 줄곧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대체 왜 이토록 슬픈 걸까?
  • 안유겸의 눈가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다시 차분히 운전했지만 하시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언제?”
  • “아까 방금.”
  • 하시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 “아저씨 병실에서.”
  • “어젯밤에 너 진짜 박찬우한테 끌려서 지하실로 갔어?”
  • 아니나 다를까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다. 치정 사건은 상류 사회에서 더욱 이목을 끌었다.
  • 게다가 누군가 일부러 손을 써서 사진 파일도 함께 퍼뜨렸다. 비록 화질이 어렴풋하지만 박찬우가 워낙 훤칠하다 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사람들은 이 모든 게 하시은의 ‘꼼수’ 라고 여겼다.
  • 박찬우가 빛의 속도로 사태를 제압하여 인터넷엔 더이상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또한 하시은의 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 하시은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 “너 다 안 거야?”
  • 안유겸이 머리를 끄덕였다. 차는 비록 평온하게 달렸지만 그는 더이상 평정심을 되찾을 수 없었다. 하루만 더 빨리 왔어도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2, 30년을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후회막심하긴 처음이었다.
  • 잠시 후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녀석 다 컸네.”
  • 안유겸은 그렇게 그녀의 난처함을 달래주었다.
  • 하시은은 또다시 감개무량해졌다.
  • “다 왔어. 바로 여기야.”
  • 그녀는 청주대학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나 작년에 졸업하고 학교에 남기로 했어.”
  • 안유겸은 머리를 끄덕이곤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와 숫자를 입력했다. 곧이어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다시 하시은의 휴대폰에 제 번호를 저장하며 간단하게 유겸이라고 입력했다.
  •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 그는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 “항상 널 위해 켜놓고 있을게.”
  • 좀 전에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 탓에 하시은은 줄곧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충 알겠다고 대답한 후 차에서 내렸다.
  • 사무실로 돌아간 후에도 두 볼이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안유겸은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 “시은 씨?”
  • 동료 하연주가 그녀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 “해고된 거 아니었어요?”
  • 하시은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 “네? 연주 씨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 “사무실에서 오늘 아침 시은 씨의 해고 통보에 관한 메일을 받았대요.”
  • 하연주는 컴퓨터를 열고 하시은에게 메일을 보여줬다.
  • “시은 씨가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하는데 상세한 내용은 따로 없었어요.”
  • 하연주는 청주대학교에서 교수로 다년간 재직하며 평소 하시은과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시은에게 물었다.
  • “누구한테 미운털 박힌 거 아니죠?”
  • “시은 씨처럼 착한 사람이 대체 누구한테 미운털이 박혀요?”
  • 또 한 명의 동료가 끼어들었다.
  • 하시은은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왠지 모르게 안유겸을 만난 뒤로 그녀는 툭하면 속상해지고 눈물의 노예가 돼버렸다. 하시은은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에 고개를 들고 애써 눈물을 삼켰다.
  • “연주 씨,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주임님한테 얘기하고 올 테니 며칠만 지나면 다 해결될 거예요.”
  • 그녀는 의자에 앉아 족히 한 시간이나 망설인 후에야 용기 내어 박찬우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 “왜 날 해고해요?”
  • 의외로 박찬우가 칼답장을 보냈다.
  • “사생활이 문란해서.”
  • “난.”
  • 그녀가 미처 답장을 보내기 전에 박찬우한테서 또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 누군가가 캡처한 30초짜리 짧은 영상이었다.
  • 영상을 클릭한 하시은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 “학교 선생님들도 이미 다 봤어요?”
  • 그녀는 반쯤 입력하다가 이 꼴이 너무 우스웠다.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박찬우의 한마디면 그녀는 바로 유죄인 것을.
  • 작년에 졸업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학교의 선생님으로 남고 싶어 치열한 경쟁을 벌였었다. 학사인 그녀는 석사들과 경쟁해야만 했다. 비록 학력은 뒤떨어지지만 실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어 파격적으로 학교에 남아 조교 선생님을 도맡았다.
  • 이 학교에서 아무도 그녀가 J시티의 갑부 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걸 몰랐고 그녀 또한 단 한 번도 그 신분을 빌미로 이득을 보려 하지 않았다.
  • 하지만 지금 박찬우가 박씨 가문의 신분을 동원하여 그녀의 4년 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그는 하시은의 동료들에게 그녀의 끔찍한 모습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선심을 베푸는 거로 여길지도 모른다.
  • “우웅.”
  • 휴대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박찬우가 보낸 문자였는데 짤막한 세 글자였다.
  • “이리 와.”
  • 하시은은 오른쪽 눈꺼풀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