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7화 좋아하는 음식

  • 하시은은 무려 점심때까지 푹 잤다. 심지어 병원 복도에서 잠들었을 때보다 더 잘 잔 듯싶었다.
  • 그녀는 텅 빈 침대를 바라보며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황미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 “도련님께서 이 카드를 쓰라고 주셨어요.”
  • 그러고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인 듯 머뭇거렸다.
  • 하시은은 이내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 “괜찮아요. 뭐라고 했든 그대로 전해주시면 돼요.”
  • “도련님이 그렇게 초라하게 다니지 말라고, 이젠 고아가 아니라며 벌써 몇 년을 키워줬는데 뼛속까지 궁상맞은 건 여전하다고 하시네요.”
  • 하시은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은행 카드를 건네받으면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냈다.
  • 그녀는 지금 단지 돈이 절실히 필요할 뿐, 박찬우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 모텔 숙박비를 결제하고 나서 안유겸이 사준 옷을 챙긴 뒤 박찬우가 준 카드로 안유겸에게 한턱낼 예정이다.
  • 이제 그곳에 다시 가볼 때도 된 듯싶었다.
  • 박찬우는 오전에 회사로 나가 한참을 바삐 보내고 나서야 잠깐 짬이 생겼는데, 여유가 있자마자 눈앞에서 하시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 나머지 결국 황미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 “카드 받았어요?”
  • “네.”
  • “별다른 말은 없던가요?”
  • 황미숙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 “다른 건 없고요?”
  • “네.”
  • “지금 집에 있어요?”
  • “아까 나갔어요.”
  • 황미숙이 물었다.
  • “무슨 일 있어요? 직접 전화하시면 되잖아요.”
  • “아니에요.”
  • 박찬우는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말했다.
  •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을게요.”
  • 그동안 일이 바쁘고 접대하는 일도 많았기에 그가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은 거의 손꼽을 정도였다.
  • “네.”
  • 황미숙이 대답했다.
  • “뭐 드시고 싶으세요?”
  •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해주세요.”
  • 어두워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면서 황미숙은 한참을 생각하다 그제야 그녀가 하시은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모텔에 다시 찾아간 하시은은 누군가 이미 숙박비를 결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대체 누가 이런 좋은 일을 했냐는 궁금증을 안고 사장님한테 방에 있는 새 옷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지만, 전에 계산하러 왔던 사람이 다 가져갔다는 대답만 들려왔다.
  • “키가 크고 말랐는데, 그날 손님을 끌고 간 남자와 비슷했어요. 몸에 걸친 옷만 하더라도 싸지는 않겠더라고요.”
  • 사장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사람이 통도 어찌나 큰지, 몇십만이나 더 챙겨줬다니까요?”
  • “혹시 스포츠머리에 눈이 작고 기계처럼 말하는 남자였어요?”
  •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그리고 같이 온 사람이 그를 주… 주 뭐시기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 박찬우의 심복인 주영이였다.
  • 그렇다면 안유겸이 사준 옷들이 휴지통에 처박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 ‘괜찮아, 침착해.’
  • 하시은은 연신 심호흡을 했다. 박찬우와 시비를 따져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제멋대로 하는 데 적응된 사람인지라 본인이 순응해야만 했다.
  • 이제 공돈도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 그녀는 스스로 위로하면서 천천히 걸어갔는데, 어느새 교문 앞에 도착했고 마침 보고 싶은 사람을 마주쳤다.
  • 그녀는 잔뜩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
  • “유겸아!”
  •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안유겸이 서둘러 뛰어왔다.
  • “여기 왜 왔어?”
  • 그는 시계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 “지금은 출근해야 하지 않아?”
  • 하시은이 직장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는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단결근할 사람도 아니었다.
  • 하시은은 풀이 죽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 잘렸거든.”
  • 안유겸은 깜짝 놀랐다.
  • “왜?”
  • 하시은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 “이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 매번 업무를 언급할 때마다 하시은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기에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해고당할 지경에 이른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이때, 안유겸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 “박찬우가 그랬어?”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 냈다.
  • “응.”
  • “이유는?”
  • 왜 그녀가 좋아하는 일자리를 박탈하고, 그녀와 결혼하고도 막대하냐는 말이다. 안유겸은 박찬우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점점 사라졌다. 하시은을 잘 챙겨줄 수는 있을까? 정녕 사랑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이 결혼했나?
  • 그렇다면 하시은은?
  • 걱정이 드는 반면 마음속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하시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박찬우가 무슨 일을 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걸 봤어?”
  • 안유겸은 허리를 살짝 굽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 “하시은, 떠나고 싶어?”
  • 그녀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철렁 내려앉았다.
  • “어디로?”
  • 당황하면서 무의식중으로 경계하는 그녀의 표정을 순간 포착한 안유겸은 문득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녀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 “농담이야.”
  • 저 멀리 훌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안유겸에게 들킬 뻔한 줄 알고 하시은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깜짝이야.”
  • 앞으로 계획하는 일에 안유겸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다. 박찬우는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비록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소유욕이 너무 강했다.
  • 사람이든 일이든 손아귀에 꽉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해야만 성에 찼다.
  • 박찬우는 전국의 경제 명맥을 쥐락펴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안유겸이 그녀 때문에 박찬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면 안유겸의 집안마저 연루될 것이므로 죄인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비록 겉으로는 가족들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으므로 영원히 죄책감에 시달릴 게 뻔했다.
  • 그녀는 안우겸을 난감한 상황에 빠뜨리기 싫었다.
  • 안유겸이 불쑥 물었다.
  • “박찬우가 무서워?”
  • “아니야.”
  • 하시은은 목을 긁적이며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 “자, 그만하고, 일단 밥 먹으러 가자. 네가 옷도 사줬는데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잖아.”
  • “지난번에 이미 고맙다고 했잖아.”
  •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하시은의 처사에 안유겸은 살짝 불만이 생겼다.
  • “게다가 너한테 밥 사줄 돈이 어딨어? 내가 얼마나 비싼 음식을 먹는지 알아?”
  • 하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가방에서 검은색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냈다.
  • “이제 돈 있지! 걱정하지 마, 나만 믿고 따라와! 확실하게 만족시켜줄 테니까.”
  • “네 물건은 박찬우네 본가에 있지 않아?”
  • 안유겸이 의아한 듯 물었다.
  • “설마 박찬우가 줬어?”
  • 그제야 하시은이 입은 옷을 찬찬히 뜯어본 그는 어제 봤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본인이 사줬던 디자인도 아니었고, 하나같이 꽤 고급져 보였다.
  • “어제 나랑 만나고 나서 박찬우도 만났어?”
  • “응.”
  • 하시은이 대답했다.
  • “날 데리고 본가가 아닌 별장으로 돌아갔거든. 정연 아줌마도 집에 가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 그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 하시은과 박찬우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진짜라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든 말든 이미 결혼했다는 점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 안유겸이 비아냥거렸다.
  • “내가 옷 사줘서 고맙다고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거야? 남남으로 취급하는 것과 뭐가 달라?”
  • 말 속에 말이 있는 만큼 듣는 사람도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하시은은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 “그게 아니라...”
  • 그런데 그의 말이 또 사실인 듯싶었다.
  •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어찌 됐든 오빠라고 부른 세월이 있는데, 그 사람이 돈을 줬다고 해도 어렸을 때 용돈 받아서 쓰는 것과 똑같지, 뭐.”
  • 인간의 본성은 고치기 힘들었다. 대부분 일과 개념은 시간이라는 영향을 받아 마치 지령처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게 된다.
  • “하지만 지금은 부부잖아.”
  • 안유겸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했기에 그의 진심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