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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시중

  • 이게 무슨 상황이지?
  • 이내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끌려가기 싫어서 버티려다 그만 머리를 박은 하시은은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침 한숨 돌리면서 이마를 문지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뭐 하려고요?”
  • 박찬우는 침대에 앉았다. 조명 아래에서 그의 속눈썹은 볼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검은색 실크 잠옷 너머로 복근이 보일 듯 말 듯했다.
  • 하시은은 침을 꼴깍 삼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 한편, 속으로는 못난 년이라고 끊임없이 욕했다. 마치 10살이 되던 해 박인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데리고 박찬우를 소개해줬을 때 그의 미모에 혹해서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오빠라고 더 부를 수 있을지 온종일 고민하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 그때 그녀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면 지금은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둘 다 오십보백보였다.
  • 같은 말 두 번 이상 반복하기 싫어하는 박찬우는 누가 봐도 짜증 난 모습이었다.
  • “약 바르라고.”
  • 그러고 나서 잠옷을 또 더 풀어헤쳤다.
  • “이것도 시중드는 데 속하나요?”
  • “뭐?”
  • 하시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조마조마한 듯 물었다.
  • “시중을 잘만 들어주면 일자리 다시 돌려준다고 했잖아요.”
  • 박찬우는 하시은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괜히 그녀가 양심이 없다고 한 게 아니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걱정되기는커녕 단지 그의 비위를 맞춰 줘서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서 약을 사 왔단 말인가?
  •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왠지 모르지만 매번 단둘이 있을 때마다 하시은은 가슴이 덜덜 떨리는 느낌인데, 지금은 심장이 마치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벌렁거렸다.
  •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만약 무표정으로 있는다면 위압감이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 두 사람이 이대로 침묵을 유지할 줄 알았던 찰나 박찬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아니.”
  • 하시은이 물었다.
  • “그럼...”
  • “그 동영상에 나온 것처럼 시중을 들라고, 지금 모른 척하는 거야?”
  • 박찬우는 능글맞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우아한 몸짓으로 침대에 엎드려 마사지를 즐길 준비가 된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 “휴대폰 가져와서 다시 보여줘?”
  • 깜짝 놀라 사레가 들린 하시은은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 “만약 내 말 안 들으면...”
  • 그는 눈을 감은 채 휴대폰을 흔들었다. 심지어 고개를 들지도 않았는데, 이내 베개에 파묻힌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중에 안유겸도 ‘시중’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테니까.”
  • ‘비열하고 뻔뻔한 놈!’
  • “속으로 욕하지 마. 다 들리니까.”
  • 괜히 뛰어갔다가 와서 헛수고했다는 생각에 하시은도 질세라 말했다.
  • “저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사람이 약 발라주는 건 또 괜찮아요? 같은 잠자리에 드는 게 더 싫지 않아요?”
  • 박찬우가 되받아쳤다.
  • “어차피 공짜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어?”
  • “공짜라고요? 지금 저를 뭐로…”
  • “응, 맞아.”
  • 박찬우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 “네 목숨은 우리 집에서 구해준 거야. 너무 나대지 마.”
  • 말을 마치고 나서 이내 손짓했다.
  • “얼른 발라.”
  • 아토피 때문에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여태껏 참은 것만 하더라도 대단했으니까.
  • 사건의 원흉한테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녀가 발라주지 않으면 대체 누구한테 부탁하냐는 말이다.
  • 하시은은 뚜껑을 열어 연고를 조금 짜서 손가락으로 덜어냈다.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가가 아토피가 난 부위에 조금씩 발라주었다.
  • “그냥 보육원에 남아 있었더라도 잘 살았을 거예요.”
  • 그녀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등 위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약을 발라주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박찬우는 만족스러운 듯 답변했다.
  • “너무 단순하군.”
  • 하시은은 힘을 주더니 일부러 꾹꾹 눌렀다.
  • “그렇게 많은 고아도 잘만 살잖아요.”
  • 박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 “네가 그 사람들이랑 같은 줄 알아?”
  • “뭐가 다른데요?”
  • “얼굴.”
  • 천 명 중에서 하시은 같은 얼굴로 태어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돈 많은 집에서 이런 외모는 부의 상징이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는 화근이 될 게 뻔했다.
  • 하시은이 멈칫하면서 우물쭈물 물었다.
  • “사실 제가 했던 말 다 기억하고 있었죠? 당시 큰 오빠가 저를 입양하면서 목적이 그렇게 순수하지는 않은…”
  • “닥쳐.”
  • 박찬우는 마치 아픈 곳이 찔린 듯 벌떡 일어나 잠옷을 입고 눈살을 찌푸렸다.
  • “꺼져.”
  • 하시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용기를 내서 유난히 차분한 모습으로 물었다.
  • “찬우 씨, 뭔가 알아낸 게 있죠?”
  • “똑똑.”
  • 다시 한번 구세주로 나타난 황미숙이 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 “도련님, 국수가 다 됐어요. 더 놔두면 상하게 생겼는데...”
  • 박찬우는 마지막 단추까지 채우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는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 “밥 먹어.”
  • 손가락에 아직 바르다 만 연고가 남아 있었는데, 서로 맞닿는 순간 끈적한 느낌이 전해져 오면서 은은한 한약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 하시은은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 문밖에서 기다리던 황미숙은 박찬우의 방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자 깜짝 놀랐다.
  • “하시은 씨가 왜 도련님 방에서…”
  • “저한테 볼 일 있대요.”
  • 박찬우는 침실로 사람을 거의 부르지 않는데, 설마 진짜 어디 불편하단 말인가?
  • 황미숙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방안을 바라보았다.
  • “도련님, 혹시 입맛이 없으세요?”
  • 그는 위가 나쁜 편이라 저녁을 거르면 문제가 생기기에 십상이다.
  • 황미숙은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당시 본가에서 독립할 때 그는 황미숙만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그녀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잘 먹고 잘살았기에 박찬우는 예전부터 그녀를 가족처럼 대했다.
  • 황미숙의 목소리에 박찬우는 아직 밥을 먹지 않은 탓에 그녀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팔뚝에 연고를 바르면서 얼른 대답했다.
  • “금방 갑니다.”
  • 아직 등에 몇 군데 바르지 못해서 간질거렸지만 손은 닿지 않고, 그렇다고 황미숙에게 부탁하기 민망한지라 잠깐 고민하더니 배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우리 집에 왔다 가.”
  • 벌써 새벽 한 시였고,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이던 배성진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왜요?”
  • “일 있으니까 얼른 와.”
  • 말을 마치자 박찬우는 전화를 끊었다.
  • 한밤중에 그의 단잠을 깨웠더니 그나마 기분이 좀 좋아졌다.
  • 할 말은 해야 하는 황미숙은 아래층에 단둘이 남아 있는 틈을 타서 하시은에게 물었다.
  • “도련님께서 큰 도련님의 변고 때문에 하시은 씨를 난감하게 한 건 아니죠?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 같아요. 집에 온 지도 꽤 되었는데 하시은 씨가 아직 오빠라고 부르는 걸 못 봤어요.”
  • 하물며 예전에 하시은이 오면 박찬우는 가끔 웃기도 했다. 이는 온종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하는 그에게 정말 드문 일이다.
  • 황미숙도 속으로 하시은이 박찬우한테 남다른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 하지만 오늘 박찬우의 안색이 줄곧 어두웠다.
  • “도련님은 아마도 너무 속상해서 그럴 거예요. 하시은 씨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 황미숙은 그릇에 고명을 올리면서 하시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 “큰 도련님의 죽음이 정말 하시은 씨와 관련이 있나요? 밖에 안 좋은 소문이 흉흉하거든요.”
  • 박인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 보러 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건에 대해 쉬쉬거렸다. 다들 하시은이 나 몰라라 하고 배은망덕하며 좀 살만하니까 제 주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꼬았다.
  • 재벌 집 논쟁이야말로 개나 소나 다루기 좋아하는 화제이지 않겠는가!
  • “이모님.”
  • 하시은은 쟁반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 “저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