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끌려가기 싫어서 버티려다 그만 머리를 박은 하시은은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침 한숨 돌리면서 이마를 문지르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려고요?”
박찬우는 침대에 앉았다. 조명 아래에서 그의 속눈썹은 볼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검은색 실크 잠옷 너머로 복근이 보일 듯 말 듯했다.
하시은은 침을 꼴깍 삼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속으로는 못난 년이라고 끊임없이 욕했다. 마치 10살이 되던 해 박인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데리고 박찬우를 소개해줬을 때 그의 미모에 혹해서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오빠라고 더 부를 수 있을지 온종일 고민하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그녀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면 지금은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둘 다 오십보백보였다.
같은 말 두 번 이상 반복하기 싫어하는 박찬우는 누가 봐도 짜증 난 모습이었다.
“약 바르라고.”
그러고 나서 잠옷을 또 더 풀어헤쳤다.
“이것도 시중드는 데 속하나요?”
“뭐?”
하시은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조마조마한 듯 물었다.
“시중을 잘만 들어주면 일자리 다시 돌려준다고 했잖아요.”
박찬우는 하시은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괜히 그녀가 양심이 없다고 한 게 아니었다. 알레르기 때문에 걱정되기는커녕 단지 그의 비위를 맞춰 줘서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어가서 약을 사 왔단 말인가?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왠지 모르지만 매번 단둘이 있을 때마다 하시은은 가슴이 덜덜 떨리는 느낌인데, 지금은 심장이 마치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벌렁거렸다.
그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만약 무표정으로 있는다면 위압감이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두 사람이 이대로 침묵을 유지할 줄 알았던 찰나 박찬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니.”
하시은이 물었다.
“그럼...”
“그 동영상에 나온 것처럼 시중을 들라고, 지금 모른 척하는 거야?”
박찬우는 능글맞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우아한 몸짓으로 침대에 엎드려 마사지를 즐길 준비가 된 것처럼 느긋하게 말했다.
“휴대폰 가져와서 다시 보여줘?”
깜짝 놀라 사레가 들린 하시은은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만약 내 말 안 들으면...”
그는 눈을 감은 채 휴대폰을 흔들었다. 심지어 고개를 들지도 않았는데, 이내 베개에 파묻힌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중에 안유겸도 ‘시중’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테니까.”
‘비열하고 뻔뻔한 놈!’
“속으로 욕하지 마. 다 들리니까.”
괜히 뛰어갔다가 와서 헛수고했다는 생각에 하시은도 질세라 말했다.
“저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사람이 약 발라주는 건 또 괜찮아요? 같은 잠자리에 드는 게 더 싫지 않아요?”
박찬우가 되받아쳤다.
“어차피 공짜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어?”
“공짜라고요? 지금 저를 뭐로…”
“응, 맞아.”
박찬우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네 목숨은 우리 집에서 구해준 거야. 너무 나대지 마.”
말을 마치고 나서 이내 손짓했다.
“얼른 발라.”
아토피 때문에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여태껏 참은 것만 하더라도 대단했으니까.
사건의 원흉한테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녀가 발라주지 않으면 대체 누구한테 부탁하냐는 말이다.
하시은은 뚜껑을 열어 연고를 조금 짜서 손가락으로 덜어냈다.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가가 아토피가 난 부위에 조금씩 발라주었다.
“그냥 보육원에 남아 있었더라도 잘 살았을 거예요.”
그녀의 손가락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등 위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면서 약을 발라주었는데 의외로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박찬우는 만족스러운 듯 답변했다.
“너무 단순하군.”
하시은은 힘을 주더니 일부러 꾹꾹 눌렀다.
“그렇게 많은 고아도 잘만 살잖아요.”
박찬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그 사람들이랑 같은 줄 알아?”
“뭐가 다른데요?”
“얼굴.”
천 명 중에서 하시은 같은 얼굴로 태어난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돈 많은 집에서 이런 외모는 부의 상징이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는 화근이 될 게 뻔했다.
하시은이 멈칫하면서 우물쭈물 물었다.
“사실 제가 했던 말 다 기억하고 있었죠? 당시 큰 오빠가 저를 입양하면서 목적이 그렇게 순수하지는 않은…”
“닥쳐.”
박찬우는 마치 아픈 곳이 찔린 듯 벌떡 일어나 잠옷을 입고 눈살을 찌푸렸다.
“꺼져.”
하시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용기를 내서 유난히 차분한 모습으로 물었다.
“찬우 씨, 뭔가 알아낸 게 있죠?”
“똑똑.”
다시 한번 구세주로 나타난 황미숙이 문을 살며시 두드렸다.
“도련님, 국수가 다 됐어요. 더 놔두면 상하게 생겼는데...”
박찬우는 마지막 단추까지 채우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밥 먹어.”
손가락에 아직 바르다 만 연고가 남아 있었는데, 서로 맞닿는 순간 끈적한 느낌이 전해져 오면서 은은한 한약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하시은은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황미숙은 박찬우의 방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자 깜짝 놀랐다.
“하시은 씨가 왜 도련님 방에서…”
“저한테 볼 일 있대요.”
박찬우는 침실로 사람을 거의 부르지 않는데, 설마 진짜 어디 불편하단 말인가?
황미숙은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방안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혹시 입맛이 없으세요?”
그는 위가 나쁜 편이라 저녁을 거르면 문제가 생기기에 십상이다.
황미숙은 그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당시 본가에서 독립할 때 그는 황미숙만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그녀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잘 먹고 잘살았기에 박찬우는 예전부터 그녀를 가족처럼 대했다.
황미숙의 목소리에 박찬우는 아직 밥을 먹지 않은 탓에 그녀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팔뚝에 연고를 바르면서 얼른 대답했다.
“금방 갑니다.”
아직 등에 몇 군데 바르지 못해서 간질거렸지만 손은 닿지 않고, 그렇다고 황미숙에게 부탁하기 민망한지라 잠깐 고민하더니 배성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에 왔다 가.”
벌써 새벽 한 시였고, 한창 꿈나라에서 여행 중이던 배성진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요?”
“일 있으니까 얼른 와.”
말을 마치자 박찬우는 전화를 끊었다.
한밤중에 그의 단잠을 깨웠더니 그나마 기분이 좀 좋아졌다.
할 말은 해야 하는 황미숙은 아래층에 단둘이 남아 있는 틈을 타서 하시은에게 물었다.
“도련님께서 큰 도련님의 변고 때문에 하시은 씨를 난감하게 한 건 아니죠?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 같아요. 집에 온 지도 꽤 되었는데 하시은 씨가 아직 오빠라고 부르는 걸 못 봤어요.”
하물며 예전에 하시은이 오면 박찬우는 가끔 웃기도 했다. 이는 온종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하는 그에게 정말 드문 일이다.
황미숙도 속으로 하시은이 박찬우한테 남다른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박찬우의 안색이 줄곧 어두웠다.
“도련님은 아마도 너무 속상해서 그럴 거예요. 하시은 씨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황미숙은 그릇에 고명을 올리면서 하시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큰 도련님의 죽음이 정말 하시은 씨와 관련이 있나요? 밖에 안 좋은 소문이 흉흉하거든요.”
박인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 보러 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건에 대해 쉬쉬거렸다. 다들 하시은이 나 몰라라 하고 배은망덕하며 좀 살만하니까 제 주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