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위험에서 벗어나다

  • “환자분이 제때 구조되어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 하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어르신만 무사하시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시간이 모든 걸 해명해줄 거라고 굳게 믿는 그녀였다.
  • 24시간 내내 정성껏 돌보자 박건호가 드디어 조금씩 의식을 회복했고 집사는 그의 뜻대로 하시은의 상황을 보고했다.
  • “다들... 들어오라고 해.”
  • 박건호는 말 한마디를 내뱉기가 너무 힘들었다.
  • “혼인... 혼인신고도... 함께...”
  • 집사는 그를 수년간 모셔왔기에 다 얘기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챘다.
  • “네,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분부하겠습니다.”
  • 박건호는 눈을 껌뻑이며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 박찬우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회사에서 달려왔다. 하시은도 병실 밖에서 한참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손목에 멍 자국이 남았지만 긴 소매로 가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었다.
  • 혼인신고를 해줄 구청 직원도 박찬우와 함께 도착했다.
  • “뭐 하시는 거예요?”
  • 박건호는 하시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박찬우를 가리켰다.
  • “결...혼.”
  • “장난해요 지금?”
  • 박찬우는 버럭 화를 냈다.
  • “너...”
  •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니터에서 또다시 삐비빅 소리가 났다.
  • 간병인은 차오르는 분노에 박찬우의 신분도 신경 쓸 겨를 없이 큰소리로 질책했다.
  • “환자분은 지금 충격을 받으면 안 돼요! 가족분들 제발 이해 좀 해주세요!”
  • 박찬우는 어쩔 수 없이 박건호의 뜻을 따랐다.
  • 박씨 가문은 더이상 가족을 잃을 수가 없다.
  • 모든 과정은 5분도 채 안 걸렸다.
  • 집사는 하시은과 박찬우의 혼인신고에 필요한 서류들을 집에서 챙겨왔고 구청에서 온 직원도 일 처리가 제법 효율적이었다. 혼인신고서까지 꼼꼼하게 준비해왔으니 말이다.
  • 여러 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은 후 두 사람의 이름은 나란히 한 종잇장에 묶여버렸다.
  • 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와 새하얗게 도배된 병실에서 그녀와 박찬우의 결혼 서막이 열렸다.
  • 하시은이 얇은 종잇장을 들자 혼인신고서라는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그녀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하시은은 마치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박건호의 뜻대로 했다. 다만 그녀는 박건호의 호의를 잘 알고 있었다.
  • 지금 병상에 누워 겨우 숨을 고르는 어르신은 늘 그녀를 아껴주셨다.
  • 그는 혼인신고로 하시은에게 약간의 보장이라도 쟁취해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더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 병실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난 후 하시은은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예전처럼 박건호의 다리를 주물러드렸다.
  • 그녀는 박찬우를 등지고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 박찬우는 옆에 서서 얌전하고 온순한 하시은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화가 저절로 치밀었다.
  • ‘착한 척하는 것 좀 봐! 분명 이기적이고 딴 속셈을 품고 있으면서 어디서 착한 척이야? 인성 형이 안 죽었다면 아무도 너의 본모습을 몰랐겠지?’
  • 박찬우는 이젠 거의 확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납골당에서 그녀를 차에 태운 순간부터, 하시은은 이미 자신의 뒷길을 찾아 나섰다. 인성 형이 죽었으니 그녀는 박씨 가문에 몸담을 수 없고 J시티에서도 삿대질을 당할 게 뻔하니 가장 빠른 지름길은 박찬우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는 박찬우의 침대에 오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이 몇 년 동안 하시은은 줄곧 박찬우를 짝사랑해왔으니 말이다.
  • ‘이 여자 정말 너무 뻔뻔스러워!’
  • “인성 형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으니 결혼식은 안 올릴 거예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도 않고요.”
  • 박건호도 혼인신고가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 박찬우는 지하실 사진 파문을 겨우 제압했다. 그는 키가 무려 186cm라 하시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가 더욱 작아 보였다.
  • 박찬우는 눈을 감고 휴식 중인 박건호를 바라보다가 하시은의 귓가에 경고장을 날렸다.
  • “어제처럼 자진해서 사진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일은 더는 하지 마. 결국 너만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니까.”
  • “내가 한 게 아니...”
  • 박찬우는 그녀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아 음침한 얼굴로 비난을 퍼부었다.
  • “네가 하는 모든 짓이 결국은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잖아? 날 짝사랑한 지도 몇 년은 되었는데 드디어 소원성취했네? 인성 형을 죽이고 여기까지 오니 어때? 기뻐 죽겠어?”
  • 하시은은 마음이 움찔거렸다.
  • ‘내가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날 이렇게 대하는 거야...’
  • 마지막 남은 작은 희망까지 그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하시은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애써 담담한 척하며 박건호에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 “편히 쉬고 계세요. 저는 이만 출근하러 갈게요.”
  • 박건호는 알겠다는 뜻으로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 문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박건호의 아내 정연과 동행한 강씨 가문의 딸 강리나와 마주쳤다.
  • “아줌마.”
  • 정연은 박건호가 병원에 입원한 일이 하시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모르지만 그녀가 큰아들을 죽인 범인이라고 굳게 믿었다. 박건호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연은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하시은을 교도소에 보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우선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
  • 한편 그녀 뒤에 있던 강리나는 하시은과 어깨를 스치는 순간 눈가에 사악함이 가득 차 있었다.
  • 자신이 줄곧 짝사랑해오던 박인성을 무참히 죽인 ‘단짝’ 하시은, 강리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체없이 박찬우의 침대에 기어오르다니!
  • 박인성이 이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 ‘하시은, 내가 인성 오빠를 잃은 고통을 10배로 갚아줄 거야!’
  • 어제 지하실에서 있은 사진 파문은 작은 경고장에 불과했다. 박찬우는 무조건 하시은에게 반감이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더럽혀진 여자인데 J시티의 어느 상류층 인사가 그녀를 원하겠는가?
  • 한편 강리나를 본 하시은은 오히려 마음이 든든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막역한 사이였으니까. 비록 박인성의 사망으로 둘 사이에 조금은 금이 생겼지만 강리나는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시은에게 원망 한마디 늘어놓지 않았다.
  • 하시은은 요 이틀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그녀에게 낱낱이 말해주고 싶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 “리나야...”
  • “괜찮아, 내가 있잖아.”
  • 강리나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하시은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으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강리나가 이미 병실로 들어갔다.
  • J시티에서 강씨 가문은 박씨 가문에 버금가는 존재이다. 강리나도 원래 박인성과 결혼할 적임자였고 두 사람의 사랑은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박인성이 사고 나기 전까지 그녀는 하시은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 바로 이 때문에 하시은은 더욱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다. 강리나가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 게다가 그녀 앞에서 예전에 있은 일들을 언급할 수 없었고 박인성은 감히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 그녀의 눈앞에 또다시 박인성이 사망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중도에 트럭 한 대가 들이받지 않았다면 지금 사망한 것은 영락없이 하시은이었을 것이다.
  • 그때 자동차 전조등이 박인성의 얼굴을 비추고 있어 그의 눈가에 담긴 살의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 평소 오빠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 박인성은 그해 왜 보육원에서 유독 그녀를 골랐을까? 줄곧 간과했던 이 문제가 불쑥 하시은의 뇌리에 스쳤다.
  • “뛰뛰.”
  • 앙칼진 경적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검은색 포르쉐에서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도어를 열고 머리를 쏙 내밀더니 하시은에게 미소를 지었다.
  • 하시은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활짝 미소 지었다.
  • “유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