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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외간 남자

  • “그리고, 이 옷도 입지 마. 너무 별로야.”
  • 옷 얘기가 나오자 하시은은 화가 발끈 났다.
  • “찬우 씨, 대체 유겸이가 사준 옷들은 왜 버린 거예요?”
  • 그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 “별로라서.”
  • “이...!”
  • “왜? 아까워?”
  • 이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세게 문질렀다. 비록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시은은 여전히 아픈 듯 비명을 질렀다.
  • “아파요!”
  • “당신.”
  • 그는 천천히 손을 떼고 일부러 당신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발음하더니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 “외간 남자와 단둘이 만난 게 벌써 두 번 째야.”
  • 외간 남자라니? 남을 모욕하는 단어가 정말 한도 끝도 없었다.
  • 하지만 그의 말투가 변했다는 걸 눈치챈 하시은은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
  • 박찬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흡족한 듯 말했다.
  • “옷 몇 벌 버린 게 무슨 대수라고.”
  • “하지만 누군가 오늘 아침 고아라는 신분이 얼마나 초라한지 까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기억하고 있었죠. 그런데 새 옷을 버렸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 “옷을 버려서? 아니면 옷을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짓밟아서 마음이 아픈가?”
  • 역시 그는 다 알고 일부러 버린 게 확실했다.
  • 하시은은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더니 자기 방으로 향했다.
  • 박찬우는 딱히 말리지 않고 대신 묵묵히 뒤를 따랐다.
  • “왜 따라오는 거예요?”
  • “소독하나 확인하려고.”
  • “하지만 난 욕실로 가서...”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시은은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 “꼭 이렇게 절 몰아붙여야만 하나요?”
  • “뭐가?”
  • 박찬우가 눈썹을 까닥했다.
  • “설마 너랑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는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 “얼마나 더러운데, 적어도 찬밥 더운밥 정도는 가릴 줄 알거든?”
  • 하시은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에는 말로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가?
  • 방에 들어서자 그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 그녀는 안에서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차마 옷을 벗고 샤워할 수가 없었다.
  • “찬우 씨.”
  • 이내 고개를 빼꼼 내밀었는데, 마치 엄마 뱃속에 숨어 있던 새끼 캥거루 같았다.
  •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 박찬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 “어디가?”
  • “저 샤워해야 한다고요. 밖에 있으면 보일 텐데...”
  • 그는 또다시 아픈 곳을 찔렀다.
  • “네 몸 중에서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이라도 있어?”
  • “찬우 씨!”
  • “왜?”
  • “아니에요.”
  •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버텨봤자 결국 백기를 들게 될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하시은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욕실로 돌아갔다.
  • 각 침실에 딸린 욕실은 반투명 유리로 되어있고, 어차피 방마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됨으로 욕실 안에는 얇은 흰색 커튼만 설치했다.
  • 물론 커튼을 치든 말든 큰 차이는 없었다.
  • 그녀는 창가에 걸터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박찬우를 보자 할 말을 잃었다. 이내 눈 딱 감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 하시은은 어차피 남편인데 몸을 보여준다고 해서 안 될 건 없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욕조에 물을 가득 받기 시작했다.
  • 물은 최대한 세게 틀고 수도꼭지도 제일 뜨거운 쪽으로 돌려놓았다. 욕조 배수구 마개도 닫지 않은 채로 수증기가 욕실에 가득 채워지고 나서야 서서히 물 온도를 낮추었다.
  • 그리고 옷을 주섬주섬 벗은 뒤 속옷만 입고 욕조에 잽싸게 들어갔다.
  • 밖에 앉아 있던 박찬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 하시은이 난감해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그는 기분이 좋아졌는데, 가끔은 스스로 정신이 나간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한 여자 때문에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 그는 수증기로 뒤덮인 욕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 “세 번 샤워하는 거 까먹지 마! 지켜보고 있으니까.”
  • 콸콸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구시렁거리는 하시은의 욕설이 들리지 않았지만, 박찬우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욕하지 마. 다 들려.”
  •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 “이제 소독해.”
  • 사실 아까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욕실에서 시선을 돌린 지도 오래되었다. 그는 단지 시간과 수압이 변하는 소리를 듣고 샤워하는 과정을 추측했을 뿐이다.
  • 하시은은 뻘쭘한 듯 큰소리로 대답했다.
  • “알았어요!”
  • 그녀의 몸에 안유겸의 흔적이 더는 남아 있지 않고 심지어 잠깐 닿았던 피부조차 깨끗이 씻겨질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박찬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소독약 냄새를 맡고 나서 그녀의 침실에서 나와 서재로 갔다.
  • 방으로 걸어가는 길에 신서율이 보내는 문자를 받았다.
  • “찬우야, 오늘 밤에 녹음한 데모인데 너한테 먼저 들려줄게.”
  • 하시은의 침실을 뒤돌아본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삭제를 눌렀다.
  • 만약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내일이면 신서율과 단둘이서 저녁을 먹었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빠르게 퍼질 것이다.
  • 한창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그녀는 어떠한 이슈도 놓치려 하지 않을 텐데, 그만큼 사람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 그는 신서율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진작에 꿰뚫어 보았다.
  •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서로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 ...
  • 주영은 아까부터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마치 유령처럼 늘 박찬우의 곁에 신출귀몰하면서 독보적인 실행력, 그리고 강한 인내심과 충성심까지 겸비해 없어서는 안 될 오른팔이다.
  • “강씨네 무슨 소식 있어?”
  • 최근 몇 년 동안 강씨 일가의 전통 산업이 점차 몰락하면서 재정력이 곤두박질쳤는데, 강리나와 박인성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상류층 모임에 참석할 자격조차 없었을 것이다.
  • 따라서 박인성의 죽음은 강씨 일가에게 큰 타격이기에 박찬우는 최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 “강리나 씨가 이번 입찰 계획을 아주 중요시하더라고요. 게다가 큰 도련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둘이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본 바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한테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확인해봤는데 큰 도련님의 손을 거친 듯한 내용이 많이 있긴 했어요.”
  • 서재에는 문을 제외하고 사방에 책으로 가득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골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금테 안경을 쓴 박찬우의 모습은 점잖은 겉모습과 달리 나쁜 남자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 “그래서?”
  • “강리나 씨가 자신만만하다고 하더라고요.”
  • 주영은 난감한 듯 말했다.
  • “그리고 외부에 이미 이번 입찰 건이 조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FC에서 강씨네를 선정하는 건 이미 내정된 일이라고요.”
  • “내일 공고문을 게시해. 주로 이번 입찰의 공정성을 강조하되 구체적인 내용은 네가 알아서 하고.”
  • 박찬우는 의자에 앉아 단호하게 지시했다.
  • “형의 체면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 강씨 일가가 돈을 벌고 싶다면 실력으로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 이 시점에서 형을 들먹이는 강리나도 참 어리석군.”
  • 만약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만 급급하지 않았더라면 형을 생각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 그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 “모든 제안서는 내용을 위주로 평가해야 해. 이번처럼 초보자들이나 하는 실수는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고.”
  • 주영은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느꼈다.
  • “두 번 다시 없을 것입니다.”
  • 박인성을 향한 박찬우의 마음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주영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에 박찬우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 “누가 지하실 사진을 유출했는지는 알아냈어?”
  • 주영은 곧바로 정리된 관련 파일을 꺼내 박찬우에게 건넸다.
  • “강리나 씨의 만행이 확실합니다.”
  • 박찬우는 이미 예상했던지라 굳이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 어쨌거나 하시은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는 그가 원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 어차피 큰 논란을 일으키기는 글렀으니 강리나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 “그리고.”
  • 주영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 “전에 대표님께서 큰 도련님이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동안 뭘 했는지 조사하라고 했잖아요.”
  • 박찬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 “밥 먹는 것부터 잠잘 때까지 빠짐없이 조사했어?”
  •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희한한 일이 있는데, 큰 도련님께서 일주일 동안 무려 어떤 여자아이를 세 번이나 만나러 갔죠. 그 아이를 뒷조사 좀 해보려니까 글쎄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