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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

  • 박찬우는 업무 스타일이 늘 독단적이었다. 18살 되던 그해 일찌감치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씨 가문의 산업을 인수하기로 시도해보았는데 짧디짧은 1년 사이에 그가 맡은 프로젝트는 전부 큰 추진과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박인성의 응원에 힘입어 박씨 가문을 벗어나 자수성가하여 자신만의 FC 회사를 설립했다.
  • 8년 동안 회사 규모가 점점 커져 FC 그룹으로 거듭났고 박씨 가문의 오랜 산업을 뛰어넘어 정재계에서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 전에는 박찬우에게 박씨 가문이란 타이틀이 달렸지만 이젠 박씨 가문에 박찬우라는 타이틀이 달린다.
  • 1년 365일에서 그는 360일을 회사에서 보내니 이리 오란 말은 당연히 회사일 것이다.
  • 하시은은 FC 그룹에 도착해 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보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 요즘 벌어진 일들이 꿈만 같지만 그녀는 이로써 박찬우가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전에 박찬우는 박인성처럼 그녀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진 않아도 어느 정도 신경은 써줬었는데 그 사고가 있고 난 뒤 과거의 모습들이 싹 다 사라진 듯싶었다.
  • 하시은의 앞에서 박찬우는 자상한 오빠의 신분을 가차 없이 버렸다. 일적으론 누구보다 살벌하고 남편으로선 인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 안내 데스크 직원은 하시은과 친분이 있지만 박씨 가문에서 요즘 발생한 일들을 전해 듣고는 그녀에게 통행증을 건네며 동정과 야유에 찬 표정을 지었다.
  • ‘요행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 뿐 결국 아무런 실속이 없었어!’
  • “대표님, 하시은 씨 오셨습니다.”
  • 비서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박찬우에게 보고했다.
  • 박찬우는 비서가 하시은을 부르는 호칭을 바로잡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그녀더러 사무실로 들어오란 얘기가 없었다.
  • 비서가 어쩔 바를 몰라 머뭇거릴 때 하시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비서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 ‘아니... 시은 씨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 평소에 누군가 섣불리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 대표님은 밖으로 내쫓을 게 뻔하다!
  • ‘제발 이번만큼은 나한테 불똥이 튀지 말아야 할 텐데.’
  • 그녀는 묵묵히 기도했다.
  • 다만 한참을 기다려도 방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세 면의 커튼도 전부 가장 낮게 처져 있었다.
  • ...
  • 사무실 면적은 무려 13평에 세 면이 오픈되어 있다. 인테리어는 아주 깔끔하게 되어있는데 사무실 책상과 5, 6미터 떨어진 곳에 소파가 하나 놓여있다. 그리고 궤짝 하나가 방 문 맞은편에 놓여있어 대화를 나눌 때 소리가 조금 울리는 편이다.
  • “이리 와.”
  • 박찬우가 비난 조로 말했다.
  • “내 말 못 알아들어?”
  • 하시은은 또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 “아까는 딴 남자랑 제법 가까이 있더니?”
  • 박찬우는 증오에 찬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
  • “지금은 왜 또 고고한 척인데? 박 사모님?”
  • 이 호칭을 들은 하시은은 가슴이 움찔거렸지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물었다.
  • “유겸이 돌아온 거 알고 있었어요?”
  • ‘유겸이! 제법 친한가 봐!’
  • “전에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
  • 사실 그는 ‘이리 와’ 라는 문자를 보낸 후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지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기가 귀찮았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똑똑하게 잘 찾아왔다. 그런 그녀가 왜 허술하게 사진이나 올리는 것인지, 모든 화살이 그녀에게 향한다는 걸 정말 몰랐던 걸까?
  • 박찬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 그는 하시은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비록 12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는 처음 남자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박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안유겸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 하시은은 벽 구석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 이에 박찬우가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
  • “그럼 만약 안유겸이 그 생생한 영상을 본다면 어떨 것 같아?”
  • 그는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 “영상은 사진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텐데...”
  • “박찬우 씨! 인터넷에 사진 올린 건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박찬우 씨?”
  • 그는 호칭에 관해 더 캐묻지 않고 그녀의 턱을 힘껏 잡아당겼다.
  • “그 사진들은 전부 내 얼굴만 정면으로 나왔어. 모든 각도에서 넌 완벽하게 얼굴을 피했지. 네가 아니면 대체 누군데?”
  • 하시은은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박찬우는 이젠 그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 이 사실을 깨달은 후 하시은도 분노가 점점 가라앉아 나지막이 대답했다.
  • “제발 보내지 말아요.”
  • 그런 은밀한 영상은 누가 보더라도 그녀에겐 막심한 타격이라 평생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안유겸은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 하시은은 더이상 아무도 잃을 수 없다.
  • 한편 박찬우의 눈가에 스친 분노가 더 짙어졌다.
  • ‘너 고집 세잖아! 나랑 말도 안 섞잖아! 지금 딴 남자 때문에 나한테 사정하는 거야?!’
  • “제발요.”
  • 하시은은 그의 옷소매를 꼭 잡고 절망과 애원에 찬 눈길로 말했다. 어릴 때 모습이 살짝 스치긴 했지만 박찬우는 여전히 바늘로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지하실에서도 애원하지 않더니 안유겸이 정말 이토록 소중하단 말인가?
  • 양복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하자 박찬우는 열어보려 했다.
  • 다만 하시은은 그가 영상을 보내려는 줄 알고 덥석 목을 붙잡더니 살며시 키스했다!
  • 그녀는 온몸이 떨렸다.
  • 어젯밤보다 더 떨렸다.
  • 이번엔 맨정신으로 하는 행동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고 무언의 절망이 섞이기도 했다.
  • 그녀의 키스는 몹시 서툴지만 또 유난히 진지했다.
  • 박찬우는 문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이렇게 하면 날 막을 줄 알고?’
  • 그녀가 죽도록 싫지만, 제멋대로인 모습도, 풍기문란한 것도, 사악한 음모가 많은 것도 전부 다 싫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밀치지 않았다.
  • 심지어 슬슬 주도권을 차지하며 더 깊게 키스를 퍼부었다.
  •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지자 박찬우는 결국 그녀를 밀치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 “꺼져.”
  • 이 키스가 그래도 작용을 일으킨 듯싶었다. 그녀는 박찬우가 잠시 이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고는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
  • 하지만 학교의 일을 미처 해결하지 못하여 아직 떠날 수 없었다.
  • 박찬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 “저기...”
  •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증오에 담긴 그의 눈빛을 본 순간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
  • “또 뭐가 불만인데?”
  • 박찬우는 손에 쥔 펜을 돌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종잇장에 가볍게 점 하나 찍었다.
  • “그저께 밤에 아쉬움이 남은 거야?”
  • 하시은은 귓불이 빨개졌다.
  •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 앞에 다가와 마치 그녀의 모든 걸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 “오늘 밤에 날 제대로 만족시키면 학교의 일은 원래대로 회복할 거야.”
  •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하시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박찬우는 훤칠한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장난기가 섞여 있어 대체 누가 이 유혹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그녀는 거의 도망치듯 줄행랑을 쳤다.
  • 그녀가 사무실에서 나온 그 시각, 안유겸이 문자 한 통을 받았다.
  • “시은이한테서 멀리 떨어져.”
  •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박찬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