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우는 업무 스타일이 늘 독단적이었다. 18살 되던 그해 일찌감치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씨 가문의 산업을 인수하기로 시도해보았는데 짧디짧은 1년 사이에 그가 맡은 프로젝트는 전부 큰 추진과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박인성의 응원에 힘입어 박씨 가문을 벗어나 자수성가하여 자신만의 FC 회사를 설립했다.
8년 동안 회사 규모가 점점 커져 FC 그룹으로 거듭났고 박씨 가문의 오랜 산업을 뛰어넘어 정재계에서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전에는 박찬우에게 박씨 가문이란 타이틀이 달렸지만 이젠 박씨 가문에 박찬우라는 타이틀이 달린다.
1년 365일에서 그는 360일을 회사에서 보내니 이리 오란 말은 당연히 회사일 것이다.
하시은은 FC 그룹에 도착해 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보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요즘 벌어진 일들이 꿈만 같지만 그녀는 이로써 박찬우가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전에 박찬우는 박인성처럼 그녀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진 않아도 어느 정도 신경은 써줬었는데 그 사고가 있고 난 뒤 과거의 모습들이 싹 다 사라진 듯싶었다.
하시은의 앞에서 박찬우는 자상한 오빠의 신분을 가차 없이 버렸다. 일적으론 누구보다 살벌하고 남편으로선 인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하시은과 친분이 있지만 박씨 가문에서 요즘 발생한 일들을 전해 듣고는 그녀에게 통행증을 건네며 동정과 야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요행으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 뿐 결국 아무런 실속이 없었어!’
“대표님, 하시은 씨 오셨습니다.”
비서가 속으로 구시렁대며 박찬우에게 보고했다.
박찬우는 비서가 하시은을 부르는 호칭을 바로잡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그녀더러 사무실로 들어오란 얘기가 없었다.
비서가 어쩔 바를 몰라 머뭇거릴 때 하시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서는 순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아니... 시은 씨 너무 무모한 거 아니야?!’
평소에 누군가 섣불리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면 대표님은 밖으로 내쫓을 게 뻔하다!
‘제발 이번만큼은 나한테 불똥이 튀지 말아야 할 텐데.’
그녀는 묵묵히 기도했다.
다만 한참을 기다려도 방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세 면의 커튼도 전부 가장 낮게 처져 있었다.
...
사무실 면적은 무려 13평에 세 면이 오픈되어 있다. 인테리어는 아주 깔끔하게 되어있는데 사무실 책상과 5, 6미터 떨어진 곳에 소파가 하나 놓여있다. 그리고 궤짝 하나가 방 문 맞은편에 놓여있어 대화를 나눌 때 소리가 조금 울리는 편이다.
“이리 와.”
박찬우가 비난 조로 말했다.
“내 말 못 알아들어?”
하시은은 또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는 딴 남자랑 제법 가까이 있더니?”
박찬우는 증오에 찬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
“지금은 왜 또 고고한 척인데? 박 사모님?”
이 호칭을 들은 하시은은 가슴이 움찔거렸지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물었다.
“유겸이 돌아온 거 알고 있었어요?”
‘유겸이! 제법 친한가 봐!’
“전에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
사실 그는 ‘이리 와’ 라는 문자를 보낸 후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지만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기가 귀찮았다. 그런데 그녀는 의외로 똑똑하게 잘 찾아왔다. 그런 그녀가 왜 허술하게 사진이나 올리는 것인지, 모든 화살이 그녀에게 향한다는 걸 정말 몰랐던 걸까?
박찬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하시은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비록 12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는 처음 남자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박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안유겸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하시은은 벽 구석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에 박찬우가 사악한 미소를 날렸다.
“그럼 만약 안유겸이 그 생생한 영상을 본다면 어떨 것 같아?”
그는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영상은 사진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텐데...”
“박찬우 씨! 인터넷에 사진 올린 건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박찬우 씨?”
그는 호칭에 관해 더 캐묻지 않고 그녀의 턱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 사진들은 전부 내 얼굴만 정면으로 나왔어. 모든 각도에서 넌 완벽하게 얼굴을 피했지. 네가 아니면 대체 누군데?”
하시은은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박찬우는 이젠 그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하시은도 분노가 점점 가라앉아 나지막이 대답했다.
“제발 보내지 말아요.”
그런 은밀한 영상은 누가 보더라도 그녀에겐 막심한 타격이라 평생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안유겸은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하시은은 더이상 아무도 잃을 수 없다.
한편 박찬우의 눈가에 스친 분노가 더 짙어졌다.
‘너 고집 세잖아! 나랑 말도 안 섞잖아! 지금 딴 남자 때문에 나한테 사정하는 거야?!’
“제발요.”
하시은은 그의 옷소매를 꼭 잡고 절망과 애원에 찬 눈길로 말했다. 어릴 때 모습이 살짝 스치긴 했지만 박찬우는 여전히 바늘로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지하실에서도 애원하지 않더니 안유겸이 정말 이토록 소중하단 말인가?
양복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하자 박찬우는 열어보려 했다.
다만 하시은은 그가 영상을 보내려는 줄 알고 덥석 목을 붙잡더니 살며시 키스했다!
그녀는 온몸이 떨렸다.
어젯밤보다 더 떨렸다.
이번엔 맨정신으로 하는 행동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고 무언의 절망이 섞이기도 했다.
그녀의 키스는 몹시 서툴지만 또 유난히 진지했다.
박찬우는 문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하면 날 막을 줄 알고?’
그녀가 죽도록 싫지만, 제멋대로인 모습도, 풍기문란한 것도, 사악한 음모가 많은 것도 전부 다 싫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를 밀치지 않았다.
심지어 슬슬 주도권을 차지하며 더 깊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지자 박찬우는 결국 그녀를 밀치면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꺼져.”
이 키스가 그래도 작용을 일으킨 듯싶었다. 그녀는 박찬우가 잠시 이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란 걸 짐작하고는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학교의 일을 미처 해결하지 못하여 아직 떠날 수 없었다.
박찬우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기...”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증오에 담긴 그의 눈빛을 본 순간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
“또 뭐가 불만인데?”
박찬우는 손에 쥔 펜을 돌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종잇장에 가볍게 점 하나 찍었다.
“그저께 밤에 아쉬움이 남은 거야?”
하시은은 귓불이 빨개졌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 앞에 다가와 마치 그녀의 모든 걸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오늘 밤에 날 제대로 만족시키면 학교의 일은 원래대로 회복할 거야.”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하시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박찬우는 훤칠한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장난기가 섞여 있어 대체 누가 이 유혹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