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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아무도 시은이 못 건드려요

  • 밖에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어 박찬우는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노크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하는 수 없이 옷을 챙겨입었다. 이때 불쑥 박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망할 놈!”
  • ‘아빠가 여길 오셨다고?’
  • 박찬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정신이 해롱해롱한 하시은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이제 막 문을 열자 서늘한 한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 바람이 새어 들어와 지하실의 얇은 침대 시트가 살짝 들렸다.
  • “읍...”
  • 하시은은 추위를 못 견뎌 신음을 냈다.
  • “너 이 녀석!”
  • 박건호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아채고는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흰머리가 이따금 흔들리자 커다란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 박건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 돌려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 “당장 시은이 안 데려가고 뭐 해?”
  • 이때 박찬우가 문을 가로막았다.
  • “아무도 시은이 못 건드려요.”
  •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 이토록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있을까?
  • “이젠 내 말까지 안 들어?!”
  • 박찬우는 어릴 때부터 반항심이 크고 고집이 세서 사실 박건호도 그가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하시은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박건호는 하시은에게 너무 미안했다.
  •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오늘은 박인성이 죽은 지 7일 되는 날이다. 박건호는 납골당에 가지 않고 줄곧 집에 있다가 7시에 하시은의 문자를 받았다.
  • “구해주세요, 아저씨.”
  • 곧이어 위치 공유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 박건호는 가장 먼저 박찬우가 떠올랐다.
  • 박인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박찬우에게 아빠 못지않게 큰 타격을 주었다.
  • 하지만 이 일로 하시은에게 그런 짓을 꾸밀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 박찬우는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빗물이 머릿결을 따라 흘러내려 셔츠 밑의 쇄골이 보일 듯 말 듯했고 준수한 이목구비는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그의 말투가 한없이 차가워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얘가 인성 형을 망쳤으니 나도 얘를 망치면 서로 퉁 치는 거예요.”
  • “시은이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을 애가 아니야. 너같이 똑똑한 사람이 이번엔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 박건호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 “시은이가 네 동생으로 지낸 지가 몇 년인데...”
  • 다만 박찬우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화를 냈다.
  • “바로 그것 때문에 교도소에 안 보냈어요. 그렇지 않으면 얘가 평생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빠 소리를 들으면 더 용서치 못하겠다고요! 아빠, 인성 형이 죽었어요. 더는 우리와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요. 멀쩡한 사람이 잿더미로 되었어요. 이 모든 게 하시은 때문이에요! 우리 박씨 가문이 대체 얘한테 무슨 빚을 진 거죠? 왜 이토록 시은이를 옹호하냐고요?!”
  • 그의 잇따른 질문에 박건호는 애써 가라앉혔던 비통한 심정이 다시 한번 북받쳐 올랐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당연히 괴롭기 그지없지만 가장 무고한 사람은 열 살부터 박씨 가문에서 자라온 하시은이 아니겠는가?
  • 그는 할 말이 굴뚝 같지만 전부 토해낼 수 없어 차오르는 괴로움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 일흔을 넘긴 어르신은 어두운 지하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순간, 여태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굴곡진 일들이 눈앞을 스치고 숨이 점점 가빠졌다.
  • 그는 점점 흐려지는 눈빛으로 널빤지 위에 누워있는 소녀를 바라보더니 뒤로 꼿꼿이 쓰러졌다.
  • 박찬우는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 “아빠!”
  • 뒤에 있던 부하들과 경호원들도 와르르 몰려왔다. 박건호는 애써 말을 꺼냈다.
  • “시은이...”
  • 그는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어 화를 내면 안 된다. 박찬우는 더는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 마지못해 수긍했다.
  • “알았어요, 지금 바로 시은이 내보낼게요.”
  • 기사가 어느새 차를 몰고 왔고 박찬우는 천천히 그의 몸을 움직였다.
  • “얼른 아빠를 병원으로 모셔요!”
  • 박건호는 여전히 그 이름을 불렀다.
  • “시은이...”
  • 박찬우는 마지못해 경호원더러 하시은도 차에 함께 실으라고 했다.
  • 박건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바삐 돌아치는 사이에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박찬우는 급한 마음에 더 따져볼 겨를 없이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 중환자실 입구.
  • 박건호의 수술 담당 의사는 병원에서 임상 경험이 제일 풍부한 뇌혈관 전문의지만 무려 2시간이나 지났다. 만에 하나...
  • 박찬우는 감히 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 큰형을 잃은 마당에 아빠까지 무슨 일 생기면 그의 엄마 정연도 아마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 그가 한창 초조해하고 있을 때 하시은이 나타났다.
  • 그녀는 약효가 떨어졌지만 축축한 머릿결이 두피에 달라붙고 낯빛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 “아저씨 어떻게 되셨어요?”
  • 그녀는 다리가 시큰거리고 팅팅 부어 걸을 때 약간 휘청거렸다. 몸에는 대충 셔츠를 걸쳤는데 경호원의 외투인 듯싶었다. 그리고 겉에는 지하실에서 가져온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었다. 비록 이상한 옷차림이지만 그녀의 수려한 미모는 여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 “네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 박찬우는 그녀만 보면 화가 치밀었다.
  • “아빠한테 네가 알렸지?”
  • 하시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 “네.”
  • “너 정말 악독한 인간이네! 아빠가 몸이 편찮으신 걸 뻔히 알면서도 이 일에 끌어들여? 우리 가문에서 널 몇 년이나 키웠는데 고작 너 자신을 위해서라면 누구의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거야?”
  • 박찬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 “병세가 더 엄중해졌으니 인제 속이 시원해?”
  • 하시은은 해명할 여력조차 없었다. 납골당에서 나온 후 박찬우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차에 태웠고 강제로 그 알약을 먹였다. 그때부터 하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박찬우는 너무 억압적이어서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 같았다.
  •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구조 요청을 보낼 사람은 박건호뿐이었다.
  • 이렇게 큰 J시티에서 어르신 말고 또 누가 박찬우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에 그녀는 구조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 하지만 이 일로 어르신이 몸져누울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괴로웠다. 박인성이 사고 난 후 하시은을 냉대하지 않고 처음처럼 대해준 사람이 바로 수술실에 누워있는 박건호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그 구조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 오만가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하시은은 빨간 불이 켜진 수술실 앞에 서서 해명의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 그녀는 확실히 유죄였다. 어르신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으니. 어떻게 보면 박찬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 비서실장 주영이 밖에서 달려오며 하시은의 옷차림을 보자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곧장 알아채고 가볍게 인사를 올린 후 박찬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 얘기를 들은 후 박찬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 “인성 형이 죽었는데 넌 정말 하나도 속상하지 않은가 봐?! 바로 뒷길을 찾아 나선 거야? 게다가 그런 희미한 사진으로 날 협박하려 해?”
  • 박찬우는 주영이 건넨 사진을 하시은의 얼굴에 내던졌다.
  • “나까지 해칠 생각이었어?”
  • 사진 속의 하시은은 얼굴 옆모습이 어렴풋이 나오고 잔뜩 흐트러진 몸엔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어 중요 부위가 적절하게 가려졌다.
  • 도리어 박찬우는 정면, 옆모습 그리고 뒷모습까지 낱낱이 찍혔다.
  •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
  • 박찬우가 야유에 찬 눈길로 그녀를 노려봤다.
  • “사람을 시켜 이딴 사진이나 찍은 후 인터넷에 잔뜩 도배하고 연예부 기자들한테도 슬쩍 소식을 넘겨?”
  • 하시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사진들을 쳐다보다가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수술실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