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어 박찬우는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노크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하는 수 없이 옷을 챙겨입었다. 이때 불쑥 박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할 놈!”
‘아빠가 여길 오셨다고?’
박찬우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정신이 해롱해롱한 하시은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이제 막 문을 열자 서늘한 한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이 새어 들어와 지하실의 얇은 침대 시트가 살짝 들렸다.
“읍...”
하시은은 추위를 못 견뎌 신음을 냈다.
“너 이 녀석!”
박건호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로 알아채고는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흰머리가 이따금 흔들리자 커다란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박건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 돌려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당장 시은이 안 데려가고 뭐 해?”
이때 박찬우가 문을 가로막았다.
“아무도 시은이 못 건드려요.”
고작 이런 여자 때문에 이토록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있을까?
“이젠 내 말까지 안 들어?!”
박찬우는 어릴 때부터 반항심이 크고 고집이 세서 사실 박건호도 그가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하시은은 반드시 데려가야 했다... 박건호는 하시은에게 너무 미안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오늘은 박인성이 죽은 지 7일 되는 날이다. 박건호는 납골당에 가지 않고 줄곧 집에 있다가 7시에 하시은의 문자를 받았다.
“구해주세요, 아저씨.”
곧이어 위치 공유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박건호는 가장 먼저 박찬우가 떠올랐다.
박인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박찬우에게 아빠 못지않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 일로 하시은에게 그런 짓을 꾸밀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박찬우는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빗물이 머릿결을 따라 흘러내려 셔츠 밑의 쇄골이 보일 듯 말 듯했고 준수한 이목구비는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그의 말투가 한없이 차가워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얘가 인성 형을 망쳤으니 나도 얘를 망치면 서로 퉁 치는 거예요.”
“시은이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을 애가 아니야. 너같이 똑똑한 사람이 이번엔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박건호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은이가 네 동생으로 지낸 지가 몇 년인데...”
다만 박찬우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화를 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도소에 안 보냈어요. 그렇지 않으면 얘가 평생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빠 소리를 들으면 더 용서치 못하겠다고요! 아빠, 인성 형이 죽었어요. 더는 우리와 얘기를 나눌 수 없다고요. 멀쩡한 사람이 잿더미로 되었어요. 이 모든 게 하시은 때문이에요! 우리 박씨 가문이 대체 얘한테 무슨 빚을 진 거죠? 왜 이토록 시은이를 옹호하냐고요?!”
그의 잇따른 질문에 박건호는 애써 가라앉혔던 비통한 심정이 다시 한번 북받쳐 올랐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당연히 괴롭기 그지없지만 가장 무고한 사람은 열 살부터 박씨 가문에서 자라온 하시은이 아니겠는가?
그는 할 말이 굴뚝 같지만 전부 토해낼 수 없어 차오르는 괴로움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일흔을 넘긴 어르신은 어두운 지하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순간, 여태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굴곡진 일들이 눈앞을 스치고 숨이 점점 가빠졌다.
그는 점점 흐려지는 눈빛으로 널빤지 위에 누워있는 소녀를 바라보더니 뒤로 꼿꼿이 쓰러졌다.
박찬우는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아빠!”
뒤에 있던 부하들과 경호원들도 와르르 몰려왔다. 박건호는 애써 말을 꺼냈다.
“시은이...”
그는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어 화를 내면 안 된다. 박찬우는 더는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았어요, 지금 바로 시은이 내보낼게요.”
기사가 어느새 차를 몰고 왔고 박찬우는 천천히 그의 몸을 움직였다.
“얼른 아빠를 병원으로 모셔요!”
박건호는 여전히 그 이름을 불렀다.
“시은이...”
박찬우는 마지못해 경호원더러 하시은도 차에 함께 실으라고 했다.
박건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바삐 돌아치는 사이에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았지만 박찬우는 급한 마음에 더 따져볼 겨를 없이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중환자실 입구.
박건호의 수술 담당 의사는 병원에서 임상 경험이 제일 풍부한 뇌혈관 전문의지만 무려 2시간이나 지났다. 만에 하나...
박찬우는 감히 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 큰형을 잃은 마당에 아빠까지 무슨 일 생기면 그의 엄마 정연도 아마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한창 초조해하고 있을 때 하시은이 나타났다.
그녀는 약효가 떨어졌지만 축축한 머릿결이 두피에 달라붙고 낯빛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저씨 어떻게 되셨어요?”
그녀는 다리가 시큰거리고 팅팅 부어 걸을 때 약간 휘청거렸다. 몸에는 대충 셔츠를 걸쳤는데 경호원의 외투인 듯싶었다. 그리고 겉에는 지하실에서 가져온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었다. 비록 이상한 옷차림이지만 그녀의 수려한 미모는 여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네가 물을 자격이나 있어?”
박찬우는 그녀만 보면 화가 치밀었다.
“아빠한테 네가 알렸지?”
하시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너 정말 악독한 인간이네! 아빠가 몸이 편찮으신 걸 뻔히 알면서도 이 일에 끌어들여? 우리 가문에서 널 몇 년이나 키웠는데 고작 너 자신을 위해서라면 누구의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거야?”
박찬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병세가 더 엄중해졌으니 인제 속이 시원해?”
하시은은 해명할 여력조차 없었다. 납골당에서 나온 후 박찬우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차에 태웠고 강제로 그 알약을 먹였다. 그때부터 하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박찬우는 너무 억압적이어서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구조 요청을 보낼 사람은 박건호뿐이었다.
이렇게 큰 J시티에서 어르신 말고 또 누가 박찬우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에 그녀는 구조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일로 어르신이 몸져누울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괴로웠다. 박인성이 사고 난 후 하시은을 냉대하지 않고 처음처럼 대해준 사람이 바로 수술실에 누워있는 박건호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그 구조 문자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만가지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하시은은 빨간 불이 켜진 수술실 앞에 서서 해명의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확실히 유죄였다. 어르신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으니. 어떻게 보면 박찬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비서실장 주영이 밖에서 달려오며 하시은의 옷차림을 보자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곧장 알아채고 가볍게 인사를 올린 후 박찬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얘기를 들은 후 박찬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인성 형이 죽었는데 넌 정말 하나도 속상하지 않은가 봐?! 바로 뒷길을 찾아 나선 거야? 게다가 그런 희미한 사진으로 날 협박하려 해?”
박찬우는 주영이 건넨 사진을 하시은의 얼굴에 내던졌다.
“나까지 해칠 생각이었어?”
사진 속의 하시은은 얼굴 옆모습이 어렴풋이 나오고 잔뜩 흐트러진 몸엔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어 중요 부위가 적절하게 가려졌다.
도리어 박찬우는 정면, 옆모습 그리고 뒷모습까지 낱낱이 찍혔다.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
박찬우가 야유에 찬 눈길로 그녀를 노려봤다.
“사람을 시켜 이딴 사진이나 찍은 후 인터넷에 잔뜩 도배하고 연예부 기자들한테도 슬쩍 소식을 넘겨?”
하시은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사진들을 쳐다보다가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수술실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