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2화 이거 먹어

  • 신서율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찬우의 갑작스러운 애틋한 행동에 모진 고초를 겪었던 그녀는 문득 쑥스러워졌다.
  • “너랑 헤어지고 나서.”
  • 곧이어 그녀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어.”
  • 윤혁재는 분위기가 바뀌자 대충 핑계를 둘러대며 배성진을 밖으로 끌어냈다. 이 바보 멍청이가 오늘 밤에 ‘죽는’ 꼴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 박찬우도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기는 순항만 하던 그의 인생에서 처음 받은 타격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는데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는 이별했던 그 시기를 전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 박찬우는 하시은에게 포도를 건넸다.
  • “이거 먹어.”
  • 그녀가 아직 저녁을 안 먹은 걸 기억하고 있었다.
  • 하시은은 멍한 얼굴로 포도를 건네받았다. 실은 윤혁재와 배성진이 나갈 때 그녀도 함께 나가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 “미안해.”
  • 신서율은 그녀를 공기 취급하며 박찬우에게 말했다.
  • “그땐 내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너랑 함께 더 나은 삶을 살 줄 알았어. 너의 감정은 뒤로 한 채 말이야...”
  • 그녀는 조심스럽게 박찬우의 볼을 어루만지며 줄곧 참아왔던 그리움을 쏟아냈다.
  • 오늘 이곳에 오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박찬우는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 자상한 것 같지만 실은 그녀의 스킨쉽을 차단하기 위한 무언의 거절이었다.
  • “다 지난 일이야.”
  • 신서율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시은을 가리켰다.
  • “쟤 때문이야?”
  • 한창 포도를 먹던 하시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동작을 멈췄다.
  • 채 넘기지 못한 포도는 잘근잘근 씹을 수 없어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며 힘껏 목구멍에 넘겼다.
  • “말 함부로 하지 마.”
  • 박찬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신기하게도 팔에 난 붉은 습진이 또다시 가려웠다. 그는 전에 더러운 곳에 갔다가 이런 과민 증상을 일으킨 적이 있어 이번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 하지만 극심한 가려움에 그의 마음마저 괴로웠다.
  • “사람마다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해. 애초에 넌 미래와 나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했고 이젠 보란 듯이 부와 명예를 다 가졌어.”
  • 그는 마치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신서율을 힐긋 바라봤다.
  • “인제 와서 다시 날 찾는 이유가 뭐야? 설마 성진이랑 무슨 거래라도 한 거야? 예를 들자면 걔가 너한테 돈을 투자해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주고 대신 너는 걔한테 재미난 구경거리나 보여주려고 나한테 돌아온 거고?”
  • 박찬우는 배성진이 저지른 일을 거침없이 까밝혔다. 룸 안에 딴 사람도 없으니 그는 아예 신서율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정곡을 찔렀다.
  • “소원대로 일이 안 풀리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도 돼? 어떻게 사람이 점점 더 저렴해져?”
  •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서율이 좀 전에 기댔던 어깨를 먼지 털 듯 살짝 털었다.
  • 신서율은 그의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사람이 점점 더 저렴해진다는 그 말이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박찬우가 이토록 무자비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챘다.
  • “시은아.”
  • 박찬우는 하찮은 표정으로 멍하니 넋 놓고 있는 하시은을 바라봤다.
  • “집에 가자.”
  • “아니!”
  • 신서율이 그들의 앞을 덥석 가로막았다.
  • “그런 거 아니야. 성진이는 단지 여기 위치만 문자로 보냈을 뿐 우린 아무런 거래가 없었어.”
  •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요 몇 년간 그녀는 사람들 앞에 머리를 숙인 적이 극히 드물었다. 신서율은 겨우 말을 내뱉었다.
  • “나 아직 그 정도로 비겁하지 않아.”
  • 말을 마친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 “다음에 또 만나.”
  • 그녀는 거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기 위해 커다란 검은색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두 사람보다 먼저 룸 밖을 나섰다.
  • 데뷔 초창기 때도,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웃고 떠들 때도, 수천수만 명의 네티즌들에게 모진 악플이 달릴 때도 속상한 적이 없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 되면 정정당당하게 박찬우의 옆에 서게 될 줄 알았다.
  • 두 사람의 집안 배경은 더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었다.
  • 하지만 인제 드디어 부와 명예를 다 얻었는데 박찬우를 완전히 잃은 것 같았다.
  • 신서율은 이 현실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녀는 누군가에게 선뜻 양보할 사람도 아니고, 말 한마디에 뒤로 물러설 사람도 아니다.
  • ‘괜찮아, 아직 시간 많아. 나 절대 이렇게 포기 안 해.’
  • 선글라스 속에 가려진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과 활활 타오르는 야심이 가득 차 있었다.
  • “안 가고 뭐 해?”
  • 박찬우가 고개 돌려 하시은에게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 “여기서 술이라도 팔 생각이야?”
  • 어찌 됐든 그들은 이젠 혼인신고까지 마친 정정당당한 부부 사이인데 왜 그의 첫사랑을 본 순간, 하시은은 덜컥 겁에 질린 걸까? 박찬우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 예전 같으면 그녀는 진작 오빠라고 재잘거리며 졸졸 뒤따라갔을 것이다.
  • 신서율이 그와 헤어지자고 했을 때 하시은은 덩달아 불만을 토로하며 주방으로 가서 소금을 잔뜩 부은 라면을 박찬우에게 끓여줬었다.
  • 죽도록 짠맛을 기억하고 다시 새 출발을 하라는 의미였다.
  • 박찬우는 문득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하더니 마음도 한결 진정된 듯싶었다. 작은 발진도 그다지 가렵지 않았다.
  • “대체 갈 거야 말 거야?”
  • 하시은이 머리를 들자 놀란 눈빛에 볼까지 빨개졌다.
  • “오...”
  • 박찬우는 그녀의 등을 몇 번 두드렸다.
  • “포도가 목에 걸렸어?”
  • 하시은은 속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그를 오빠라고 부를 뻔했는데 다행히 박찬우가 제때 등을 두드렸다.
  • “켁켁...”
  • 그녀는 마음이 움찔거리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하여 기침으로 속내를 숨기려 했다.
  • “포도가 너무 커서...”
  • 좀 전의 상황에 그녀는 포도를 삼킬 용기가 안 났으니 목에 걸릴 만도 했다.
  • “아직도 애야?”
  • 박찬우는 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룸 밖으로 나갔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 “걔는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
  •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무렵, 하시은의 귓가에 문득 이런 말이 들렸다.
  • ‘환청일까? 방금 찬우 씨가 한 말이라고?’
  • 그녀는 속으로 중얼댔다.
  • 배성진은 일찌감치 윤혁재에게 끌려 잠시 몸을 숨겼다. 하여 두 사람이 나왔을 때 배성진과 윤혁재는 보이지 않았지만 박찬우는 절대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배성진이 요즘 눈여겨보는 모델은 아마 평생 무명의 삶을 지내야 할 것이다. 갖은 타격을 입으면 그 모델은 종일 배성진만 귀찮게 할 게 뻔하다.
  • “배는 좀 불렀어?”
  • 차에 탄 후 박찬우가 뜬금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 하시은은 그제야 알아챘다.
  • ‘배를 채우라고 포도를 준 거였어.’
  • “네, 이젠 괜찮아요.”
  •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 하시은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 “돌아가서 이모님한테 면을 끓여달라고 해. 나도 아직 저녁을 안 먹었어.”
  • 면이라...
  • 하시은은 치마에 주름 잡힐 정도로 꽉 잡았다.
  • 그녀는 전에 박찬우를 어르고 달래기 위해 면만 끓였었다.
  • 박찬우는 대체 무슨 뜻일까? 그녀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 “이모님이요? 교외에 있는 찬우 씨 아파트 말하는 거예요?”
  • 거기가 그녀의 ‘집’ 이 될 수 있을까?
  • 박찬우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엄마가 절대 널 본가에 들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한테서 지내는 수밖에 더 있겠어? 그 모텔은 다신 가지 마. 그렇게 창피한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벌써 배신이나 당하는 꼴이 되고 싶지도 않고.”
  • 하시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럼... 학교는 계속 나갈 수 있어요?”
  • 박찬우가 커브를 돌자 앞에 있던 자동차 전조등이 마침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순간 야릇한 그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 “내가 사무실에서 한 말 다 잊었어?”
  • “네?”
  • “내 시중을 잘 들어주면 학교 일도 회복할 거라고 했잖아.”
  • 순간 차 안에 또다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하시은은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그날 밤 지하실에서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