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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돌이킬 수 없는 과거

  • “네.”
  • 황미숙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미 본가의 고용인을 통해 대충 전해 들었다.
  • 하시은은 뻘쭘하기 그지없었다. 자리를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몰라서 애꿎은 국수만 멍하니 바라보며 황미숙이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 “하지만… 하시은 씨가 그렇게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아파트 단지에 다친 길고양이 새끼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때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도 해주고 죽을 때까지 직접 키웠잖아요.”
  •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 황미숙의 말에 하시은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 매사에 진심을 다했을 때 살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은 재산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예를 들면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큰 도련님께서 하시은 씨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는데, 만약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걸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성격도 좋으신 분이 참 안 됐네요.”
  • 황미숙은 면을 건지다 말고 추억에 잠겼다.
  • “큰 도련님은 찬우 도련님의 말이라면 항상 들어주는 편인데, 진짜 보기 드문 형이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아직 주방에서 일을 돕고 있을 때 요리사들이 그러더라고요. 당시 집안에서 사업을 전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도련님이 찬우 도련님을 대신하여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한번은 목숨까지 잃을 뻔했죠.”
  • 그동안 집에서 살면서 하시은은 처음 듣는 얘기에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 “대체 무슨 사업이 목숨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황미숙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는 손으로 자기 입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 나서 하시은에게 재촉했다.
  • “하시은 씨, 제가 국수 금방 담을 테니까 얼른 요리부터 가져가세요. 도련님께서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해요.”
  • “네.”
  • 하시은은 대답했지만, 황미숙이 언급한 일을 이미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 예전에 하시은이 밥 먹으러 왔을 때 항상 집안에 인기척이 없다고 불평 불만했는데, 매번 어디에는 꽃을 장만하는 게 좋고 어디에는 뭐가 변했다고 재잘거렸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수다가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학교에서 낙엽을 주운 일마저 한나절 동안 생생하게 설명했다.
  • 하지만 지금은 어찌나 조용한지 식탁에서 음식을 씹는 소리만 들리자 어딘가 어색할 지경이다.
  • 국수도 간이 딱 맞았는데 딱 봐도 그녀가 만든 게 아니었다.
  • 그는 문득 ‘소금 지옥에서 재탄생’한 면이 은근 그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국수를 만든 여자아이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 입안에서 국수 맛이 점점 무뎌지자 그는 황미숙에게 그릇을 건넸다.
  • “소금 좀 넣어주세요.”
  • “싱거워요?”
  • 황미숙은 처음으로 자기 음식 솜씨에 의구심을 가졌다. 박찬우의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소금을 추가할 때는 저울로 몇 그램인지 정확하게 맞춰서 넣었고, 오늘도 문제없을 텐데 말이다.
  • 고개를 푹 숙이고 국수를 먹던 하시은은 갑자기 사레에 걸려 급히 그릇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 이내 고개를 들자 그녀를 바라보는 박찬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 “네, 좀 싱겁네요.”
  • 그녀의 귀는 왠지 모르게 후끈 달아올랐다.
  • 식사를 마치고 나서 황미숙은 식탁을 치우고 올라가서 쉬었다. 하시은도 2층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 “누가 왔나?”
  • 대체 이 시간에 누가 온단 말이지?
  • 하시은이 창밖으로 내다보니 유독 튀는 노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 ‘배성진이네?’
  •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아파트로 들어선 그는 신발장에서 자기 슬리퍼를 찾아서 갈아신고 현관에 들어서자 그제야 하시은을 발견했다.
  •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어벙한 얼굴로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취생몽사하는 외로운 용자는 이미 윤혁재의 일깨움 덕분에 기고만장해졌다. 마침 어떻게 하면 박찬우에게 잘 보여서 속죄할까 고민하던 찰나 한참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한 마디 내뱉었다.
  • “형수님이 왜 여기에 있죠?”
  • 윤혁재는 박찬우가 혼인신고에 대해 먼저 언급했다고 했다. 따라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확실하므로 자기가 부른 호칭에 확신이 있었다.
  • 그러나 하시은과 박찬우는 둘 다 넋을 잃고 말았다.
  • ‘병신.’
  • 박찬우는 면전에서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어떻게 만나는 사람마다 형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
  •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배성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 “하긴, 자기 집인데 당연히 오고 싶을 때 오겠죠.”
  • 그나마 조상들의 재산이 두둑했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배성진처럼 필터링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은 사람은 진작에 두들겨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 오늘 오후에 그는 하시은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었다. 하시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침실로 피신했다.
  • 미인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배성진은 히죽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 “오늘 밤 소인을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 박찬우는 배성진의 머리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 “약 발라줘.”
  • 배성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 “약을 발라요?”
  • 박찬우는 그를 위층으로 데려갔다.
  • “알레르기인가 봐.”
  • “어디 더러운 곳에 갔어요?”
  • “어, 자그마한 모텔에 다녀왔어.”
  • “헐!”
  • 배성진은 참지 못하고 큰소리쳤다.
  • “형이 어떤 체질인지 몰라요? 어렸을 때부터 매번 더러운 환경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겼잖아요. 소독 안 한 곳에 잘못 갔다가 알레르기가 심해지면 질식할 수도 있다고요!”
  • 말을 이어가던 와중에 그제야 요점을 파악했다.
  • “하지만 왜 그런 작은 모텔에 갔대요? 거기 부지를 매수하려고요?”
  • “주제넘게 굴지 마.”
  • 박찬우는 옷을 벗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 손을 세 번이나 씻은 배성진은 그제야 연고를 손에 짜서 그의 등에 발라주었다.
  • “엄청 매끄럽네요.”
  •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 박찬우는 문득 그를 부른 게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도 윤혁재가 편했지만, 차마 한밤중에 그를 귀찮게 할 수는 없었다.
  • “얼른 바르고 꺼져.”
  • 배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늦게 박찬우가 안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신 야릇한 신음을 내면서 마음껏 즐겼다.
  • 어쩌면 밤이라서 속마음을 털어놓기 쉬운지, 아니면 배성진의 생존 욕구가 너무 강해서인지 모르지만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
  • “야밤에 형처럼 잘생긴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 그는 붉은 반점이 생긴 부위에 연고를 바르는 게 아니라 무턱대고 손으로 등을 문질렀다.
  • 그녀의 손은 분명 다른 촉감이었다. 뼛속까지 시원한 느낌은 편안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는데 말이다.
  • 박찬우가 문득 말했다.
  • “배성진, 1분 줄 테니까 우리 집에서 나가.”
  • 배성진은 어리둥절한 듯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바르는 게 불편했어요? 예전에 의사 선생님이 왔을 때 이렇게 발라주는 걸 봤는데, 손에 약을 덜어서...”
  • 박찬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도 너처럼 만지작거리지는 않았어.”
  • 심지어 그의 허리마저 놓치지 않는다니.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원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끝으로 배성진은 정말 1분 만에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 사실 잘 발라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박찬우가 얼굴은 물론 피부까지 이렇게 좋을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 ...
  • 하시은은 뜬 눈으로 시간을 보냈다.
  • 박인성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게다가 오늘 밤은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불면증을 악화하는 데 박찬우도 한몫했다. 하시은은 박찬우의 의도를 계속 추측했다.
  • 지하실에서 그녀를 온갖 방법으로 모욕하고, 그런 영상을 찍어 시도 때도 없이 협박하며, 그녀의 일까지 훼방을 놓다니. 박찬우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는 순간, 그는 피부 알레르기를 참으면서 모텔에 찾아와 자신을 데리고 친구들이 모이는 사적인 자리에 가질 않겠는가, 심지어 즉석에서 전 여친에게 거리낌 없이 화내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 그리고 첫 끼로 국수까지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