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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 그녀를 본 간호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신지은은 멋쩍은 듯 웃으며 설명했다.
  • “처리해야 할 것들은 다 처리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랑 시간을 조금 보내려고요.”
  • “착하기도 해라!”
  • 간호사는 그녀를 칭찬했다. 하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간호사는 또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 윤혜숙은 이미 석 달째 이곳에 입원해 있었다. 그녀는 폐암 말기였고, 지금으로서는 그저 별다른 수 없이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 듣기로는 자식이 세 명이나 있다고 했지만, 자주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손녀인 신지은뿐이었다.
  • “할머니, 저 왔어요.”
  • 신지은은 할머니의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윤혜숙은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놀란 듯한 기색을 보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왜 오늘 같은 날 여길 왔어?”
  • “괜찮아요. 처리해야 할 건 다 했어요.”
  • 신지은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답했다. 그러자 윤혜숙이 중얼거렸다.
  • “아쉽구나. 내가 몸만 성했다면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을 텐데.”
  • 신지은은 눈시울을 붉혔다. 임씨 가문은 윤혜숙이 아프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말기 암 환자가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 불길하다며 윤혜숙이 결혼식에 오는 것을 거부했었던 것이다.
  • 더욱이 안시훈은 병원이 재수가 없다며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 “걱정 마세요, 할머니.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요.”
  • 하지만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또 한 번 울음을 꾹 참은 채 할머니에게 장담할 수밖에 없었다.
  • 신지은은 다음날 해가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 신아영이 일부러 그녀에게 못된 말들을 해댔다.
  • “시훈 오빠한테 차였으니 메이크업 비용은 누가 대신 내줘?”
  • 이에 신지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아영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호텔은 모두 안씨 가문에서 비용을 대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머리가 너무 복잡했던 터라 그녀는 이런 문제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 심지어 그녀는 안시훈과 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씨 가문이 예약한 호텔 측에서 그녀가 신랑을 바꾸는 것을 받아들일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 “걱정 마세요, 지은 아가씨. 강재욱 님께서 절 보내신 거예요.”
  •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얼른 나서서 설명했다. 그러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 “여보세요?”
  • “강재욱입니다.”
  • “그쪽이…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 그녀는 분명 어제 그와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없었다.
  •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제가 고용한 사람이니까, 마음 놓고 맡기세요. 호텔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 강재욱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 “후회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 잠시 망설이던 신지은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녀는 그 또한 어제 홧김에 충동적으로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 하지만 하룻밤 동안이면 다시 냉정을 되찾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만약 그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전 단 한 번도 후회할 일은 한 적이 없습니다.”
  •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 같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 이에 신지은은 잠시 휴대폰을 손에 든 채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 ‘지금 나한테 화낸 거야? 됐다. 일단 결혼부터 하자. 안 그러면 오늘 수습할 방법이 없어.’
  • “엄마, 언니가 입은 웨딩드레스 너무 예쁘다. 나 결혼할 때도 저런 드레스 입고 싶어.”
  • 신지은이 메이크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그녀가 입은 예쁜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본 신아영이 조성희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챙겨 온 것으로, 꽤 안목이 있는 모양인지, 드레스가 신지은을 더 예뻐 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부러워할 게 뭐 있어. 안씨 가문한테 파혼이나 당하고, 창피해 죽겠어. 급하게 어떤 남자를 찾아온 건지도 모르잖아. 나중에 봤는데 너희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지.”
  • 조성희가 비꼬듯 말했다. 그러자 신지은은 몸을 돌려 조성희를 쳐다보며 설명했다.
  • “안씨 가문에서 파혼 얘기를 꺼낸 게 아니라 제가 파혼한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젊으니까 안심하세요. 창피하실 일 없을 거예요.”
  • “쳇, 그 말을 누가 믿겠어.”
  • 조성희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 “와! 엄청 거창하잖아.”
  • 그러던 그때 갑자기 건물 아래에서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지은 아가씨, 웨딩카가 도착했어요.”
  •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에게 알렸다. 이에 신지은이 문을 나서려는데, 조성희가 신아영을 이끌고 그녀보다 한발 앞서 문밖으로 비집고 나갔다.
  • 하지만 아래로 내려온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롤스로이스를 선두로 뒤따르는 들러리 차량들조차 전부 다 비싼 차들로 이루어진 웨딩카 행렬이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 “보나 마나 늙은 남자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 좋은 차들을 빌릴 돈이 어디 있겠어?”
  • 조성희는 거의 확신했다.
  • “차에서 내린다, 엄마.”
  • 신아영이 잔뜩 신이 난 채 말했다. 그녀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늙은 남자가 차에서 내려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차에서 내린 남자는 꽤 젊었다. 게다가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진하고 날카로운 얼굴형, 그리고 시원하게 뻗은 눈매의 남자는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감히 범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엄청난 분위기였다.
  • 차에서 내린 그는 간단히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