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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계약결혼

자발적 계약결혼

권양이

Last update: 2024-03-11

제1화 후회

  • 모여정의 딸이 죽었다.
  • 그녀의 남편 강천호와 언니라는 인간 모여희 때문에 죽은 것이다.
  • 아기는 7개월이 되어 이제 막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것이 얼마나 인형 같고 귀여운지,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옴폭 패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아기가 그들의 ‘부주의’라는 이유로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 “모여정, 천호는 내 거야. 내 아들이야말로 천호의 진짜 핏줄이지. 네 딸은 사생아나 마찬가지야. 너 몰랐지? 천호는 너한테 손댄 적도 없어. 그날 밤의 남자는 천호가 아니거든. 네 딸의 친아빠가 누구야? 하하하, 네 딸은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종 아니야? 모여정, 네 어미아비는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내가 죽인 거야. 모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니, 평소에는 나더러 딸이라고 하면서 정작 이득 앞에서는 친딸인 너만 생각해 주잖아. 모여정, 네 사생아 딸이랑 같이 죽어버려!”
  • “응애…”
  • 모여정의 귓가에 모여희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 딸이 바닥에 떨어지며 퍼붓는 울음소리에 모여정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차 작아지자 당황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제발 딸을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빌었다. 모씨 가문의 재산이고, 강천호고 다 필요없으니 제발 딸만 살려달라고 했다.
  • 하지만…
  • 딸을 구하지 못했다.
  • 모여정은 아기의 조그마한 시신을 안고 병원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철에 내리는 비는 세상을 스산함에 휩싸이게 했다.
  • 모여정은 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눈가에서는 눈물이 마를 줄 모르고 한 방울, 또 한 방울 흘러내렸다.
  • 비가 그녀의 몸에 내려앉아 조금씩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절망감에 휩싸인 그녀는 추운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후회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 그녀는 모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친 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4년 전에 그녀를 되찾아서 모씨 가문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딸인 줄로 알고 키웠던 첫째는 모씨 가문에서 20년 넘게 산 탓에 부모님과 깊은 정을 쌓은 뒤였다.
  • 모여정의 부모는 양녀를 내보내기 아쉬워서 그렇게 두 아이 모두 한 집에서 살았다.
  • 모여정이 모씨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25살이었다. 친부모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상류사회에 발을 들이게 하고 좋은 혼사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 그때 서울의 재벌가들은 모두 모씨 가문과 사돈을 맺고 싶어했다.
  • 서울의 최고 재벌인 전씨 가문에서도 다녀갔었다. 전씨 가문은 모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 모여정을 염두에 두었다.
  • 하지만 전씨 가문의 장자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불구로 되었다. 사고 뒤로 워낙 성격이 차갑기로 소문난 그의 성격이 더더욱 까칠해졌다. 예전에 그와 결혼하려고 줄을 서던 아가씨들은 지금 하나같이 피하기 어려웠다.
  • 모여정의 부모는 전씨 가문의 미움을 사는 게 두려워 모여정더러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다.
  • 그때 모여정은 멍청하게도 강천호를 사랑하게 되어 전강현을 거절했다.
  • 부모는 그녀가 전씨 가문에 시집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강씨 가문에 들어가는 것도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어코 강천호를 고집하는 바람에 결국 부모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결혼의 길에 잘못 들어선 뒤,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 모여정은 소원대로 강천호와 결혼한 뒤에야 강천호와 모여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둘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모여정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렸다.
  • 단순한 그녀가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 함정에 빠진 것이다.
  • 부모님이 잇달아 사고로 세상을 뜬 후, 그녀를 대하는 강천호의 태도가 점점 차가워졌다. 심지어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모여희를 집으로 끌어들여 애정행각을 했다. 모여정은 결혼생활을 지키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녀는 모여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 강씨 가문에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 모여정은 멍한 얼굴로 도로에 뛰어들었다.
  • 끼익!
  • 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 퍼엉!
  • 모여정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또 빠른 속도로 길에 떨어졌다.
  • 새빨간 피가 마구 뿜어나왔다.
  • 모여정은 온몸이 아팠지만 힘들게 아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차가 그녀를 칠 때의 충격으로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멀리 날아났던 것이다.
  • “아가야…”
  • 모여정은 힘들게 앞으로 기어갔다. 아기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그녀의 손끝에는 아기가 닿지 않았다.
  • “아가야…”
  • 검은색 구두 한 쌍이 흐릿해져가는 그녀의 시선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허리를 숙이고 아기의 시신을 든 뒤,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 “아가.”
  • 모여정은 아기를 안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아기의 몸을 적셨다.
  • 상처가 심각했던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놓았다. 어둠이 그녀를 삼키기 전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도와준 남자를 보려고 했다. 그 남자는 검은색 옷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 휠체어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귀티가 흘렀다.
  • 그녀는 어제 강천호와 모여희에 의해 중상을 입은 아기를 안고 미친 듯이 길가로 뛰어나가 아무 차나 가로막고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 그 차에서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그녀더러 차를 타라고 한 뒤, 기사더러 병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 아기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지만 모여정은 그에게 감격하고 있었다.
  •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모여정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다음 생이 있다면… 난 저 남자와 결혼할 거야. 전강현.’
  • “언제 깨어난대?”
  • 차가운 목소리가 모여정의 귀를 후벼팠다.
  • “도련님, 의사가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라고 합니다. 피가 멈춰었으니 곧 깨어날 것입니다.”
  • ‘그냥 과다출혈일 뿐이야? 나는 죽는 줄 알았는데. 아가! 우리 아가!’
  • 모여정은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병원의 하얀색 천장이 아닌 새까맣고 싸늘한 눈이었다. 그 눈의 주인은 잘생긴 남자였으나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 탓에 어딘가 정이 없어 보였다.
  • 그녀가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 전강현.
  • 그녀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그녀에게 선의를 베풀어준 사람이었다.
  • “대표님…”
  • 모여정은 기쁜 얼굴로 전강현을 불렀다.
  • 서울에서 모두 전강현을 ‘대표님’이라고 불렀다.
  • 그는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장애인이지만 여전히 서울의 상업계를 쥐고 흔드는 신이었다.
  • 모여정을 바라보는 전강현의 눈은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 그는 휠체어를 밀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보디가드에게 지시했다.
  • “깨어났으니 집으로 돌려보내서 모경서에게 말해. 나 전강현은 불구가 되었지만 그댁 딸을 억지로 맞이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딸이 내 앞에서 자살소동을 부리지 않게 잘 감시하라고. 피 때문에 눈만 더럽혀졌네.”
  • ‘자살?’
  • 이 광경은 아주 익숙했다.
  • 그때 전씨 가문에서 혼사 얘기를 하러 모씨 가문에 왔을 때, 친딸인 모여정을 콕 찍어 얘기했었다.
  • 그녀는 불구가 된 전강현이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한다는 말에 몰래 전씨 가문의 저택으로 가서 팔을 그으면서까지 절대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