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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속시원해

  • 지난 생에 모여희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전강현이었다.
  • “여정아.”
  • 모여희는 그녀를 가르치는 것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일에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네가 전 대표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네가 직접 사과해야지. 전씨 가문에서 너를 결혼 상대로 찍어서 말했기에 내가 널 대신해서 전 대표와 결혼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게 되었어.”
  • 모여정은 코웃음을 치고 홱 돌아섰다.
  • 모여희: “…”
  • 그녀는 다급히 장혜민을 보며 말했다.
  • “엄마, 제가 여정이를 도와 대표님께 사과하기 싫은 게 아니라 전 대표님의 성격을 엄마가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여정이가 한 잘못을 제가 사과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 “여정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니? 전씨 가문이 사람을 괴롭히는 거지. 그 집 장자는 다리가 그렇게 되었음에도 여정이를 데려가고 싶다니… 우리 여정이가 시골에서 자랐다고 무시하는 거야.”
  • 장혜민은 다른 사람이 모여정을 뭐라고 나무라는 게 싫었다.
  • 그녀는 모두 전씨 가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 서울의 재벌 아가씨들 중에서 전씨 가문은 이름을 콕 찍어 모여정을 선택했다. 그게 다 모여정이 시골에서 자라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 “엄마가 여정이 먹을 음식을 해야 하니까 여희 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
  • 모여희는 전강현이 모여정을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라고 말했지만 정작 모여희더러 모여정 대신 전강현에게 사과하라고 하니 모여희는 거절했다. 그것으로 부족해 가르치듯 모여정을 훈계했다.
  • 그래서 장혜민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 친딸은 여태까지 시골에서 살다가 상경한 지 이제 일 년 정도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상류사회에 인맥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여희는 어렸을 때부터 상류사회에 있어서 모여정보다 뛰어났다.
  • 그러나 전강현에게 사과하는 것 같은 작은 일도 모여희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 장혜민은 문득 양녀가 친딸에게 그다지 잘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장혜민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모여희도 말없이 주방에서 나갔다.
  • 주방에 나가서 보니 모여정이 가위를 들고 그녀가 아끼는 화분을 정리하고 있었다.
  • “여정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모여희가 소리를 꽥 질렀다.
  • 그 화분들은 강천호가 그녀에게 준 것으로, 평소 그녀가 아주 애지중지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꽃이 잘 자라자 그녀는 일부러 눈에 띄는 곳에 두어 부모님에게 자랑하는 중이었다.
  • ‘그런데 모여정이 커다란 가위를 들고 설쳐? 내 꽃들을 다 죽이려는 거야?’
  • “이런 잔가지들은 잘라줘야 해. 그래야 더 잘 자라지.”
  • 모여정이 고개를 돌리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또 가위질을 했다.
  • ‘참 속시원해!’
  • “여정아.”
  • 모여희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모여정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은 뒤, 다시 화분을 돌아보았다. 꽃나무는 모여정의 가위질에 볼품없이 변해버렸다.
  • 모여희는 화가 나 속이 부글거렸다.
  • 그녀는 가위로 모여정을 찌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장혜민은 모여희의 비명을 듣고 다급히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 그러자 모여정이 눈시울을 붉히는 게 아닌가?
  • “엄마, 이 꽃나무 잎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란 것 같아 잘 자라라고 조금 손본 건데 언니가 막 뭐라고 하잖아요.”
  • “여정아, 내가 이 화분에 얼마나 정성을 쏟은지 너 몰라? 요즘 꽃이 필 때라 화방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가져와 부모님이 감상하시라고 한 건데 네가 이렇게 잘라놨잖아.”
  • 모여희는 아주 화가 났다.
  • 왠지 모르게 시골에서 온 여동생이 하룻사이에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가 특별히 한 죽도 먹지 않고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는가 하면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 게다가 지금은 강천호가 그녀에게 선물한 화분까지 망가뜨리고 있었다…
  • “엄마, 전, 전 그냥 언니 돕고 싶어서… 제가 괜한 짓을 했나 봐요.”
  • 모여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장혜민은 딸을 위로하며 말했다.
  • “아니야, 화분이 죽지만 않으면 꽃을 피울 수 있어.”
  • 그녀는 또 모여희에게 말했다.
  • “여희야, 여정이가 널 돕느라고 한 거잖아. 너처럼 화분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니 너무 탓하지 마.”
  • 모여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 “더 잘 자라라고 손질한 것일 뿐, 일부러 죽일 생각은 없었어.”
  • 장혜민은 휴지를 뽑아 모여정에게 건넸다.
  • “괜찮아, 여희가 너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몸도 안 좋은 애가 울지 마. 엄마가 너에게 몸에 좋은 탕을 끓였으니 많이 먹어.”
  • “고마워요, 엄마.”
  • 모여정은 눈물을 닦았지만 휴지가 젖지 않았다. 그녀는 장혜민이 말을 걸 때 일부러 눈물을 짜낸 것이다.
  • 부모가 모여희의 진짜 모습을 알게 해야 지난 생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을 수 있었다.
  •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모여희가 아끼는 모든 것을 망가뜨릴 생각이었다. 그게 화분 하나라고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 다른 사람들은 이 분이 강천호가 모여희에게 준 것임을 모르지만 환생한 모여정은 알고 있었다.
  • 지난 생에 모여희는 승리자처럼 그녀의 앞에 서서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말해줬던 것이다.
  • “엄마!”
  • 모여희가 그녀를 불렀다.
  • “이 꽃들 제가 정말 열심히 가꾼 거란 말이에요.”
  • “네 동생이 화분 몇 개보다 못하다는 거야? 여정이가 도와주려고 그랬다잖아. 얘는 너처럼 내 옆에서 좋은 교육 받고 자라지 못해서 뭐든 다 알지 못해. 꽃들이 죽은 것도 아닌데 왜 동생한테 그래?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애가 배고픈 것도 참고 네 화분을 정리해줬는데 고맙다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 장혜민의 어두워진 얼굴에 모여희는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아니면 내일 내가 화분을 몇 개를 사줄까?”
  • 모여정이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 모여희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 밖에서 사온 화분으로 어찌 대체가 가능하겠는가? 이건 강천호가 그녀에게 사온 것이었다.
  • “아니야, 하지만 앞으로 뭔가를 하기 전에는 미리 물어볼래? 오늘 같은 일 일어나지 않게 말이야.”
  • 모여희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 화분 몇 통 때문에 모여정과 싸운다면 부모님이 그녀가 모여정을 괴롭힌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그녀는 지금 장혜민의 친딸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모씨 가문에서 아가씨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20년 넘게 키운 정을 봐줬기 때문이었다.
  • “됐어, 그만해. 여정아, 너 화분정리하는 게 좋으면 엄마 화분 한 트럭 사오라고 할 테니 마음껏 꽃가지 가꿔 봐.”
  • 모여정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고마워요, 엄마. 엄마 사랑해요.”
  • 장혜민은 모여정의 달콤한 미소와 ‘사랑해요’라는 말에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다.
  • “바보 같긴. 난 네 엄만데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어머나, 내 음식!”
  • 장혜민은 소리를 지르더니 주방으로 뛰어갔다.
  • 모경서는 집으로 들어오다 아내가 급히 주방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 “네 엄마 왜 저런다냐?”
  • “아빠, 오셨어요?”
  • 모여희는 가위를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모여정이 더 빨리 모경서의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