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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늙은 여우와 어린 토끼

  • ‘으잉?’
  • 모여정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을 안다면 전강현이 그녀에게 고추기름을 잔뜩 먹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 “모여정.”
  • 전강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자꾸 다른 데 보면 큰일 나는 수가 있어.”
  •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모여정은 당황하여 곁눈질로 전강현을 바라보았다.
  • 전강현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문 채,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모여정은 큰 압박감을 느꼈다.
  • 어제 다시 태어났을 때, 그의 옷을 펼쳐서 그를 깨물고 그를 책임지겠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면 참 자신이 대단하다 싶었다.
  • “대표님, 웃긴 얘기가 떠올라 웃은 거예요.”
  • 모여정이 거짓말을 했다.
  • 전강현의 싸늘한 눈빛에 모여정은 또 더럭 겁이 났다. 그의 눈빛이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거짓말을 했다.
  • “진짜 웃기는 얘기가 떠올라 웃은 거예요.”
  • “모여희가 자꾸 당신 괴롭히지?”
  • 모여정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화제가 너무 빨리 바뀐 탓에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 “겉으로는 아니겠지.”
  • 모여희는 연기에 능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모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안 뒤로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부모를 극진히 대했으며 모여정과도 사이 좋게 지냈다.
  • 그리고 종종 모여정을 데리고 각종 파티에 나갔다. 물론, 파티에서 아주 여유 넘치는 모여희와 달리, 모여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 “모여희는 당신의 부모님이 후계자로 양성한 사람이니 당신의 존재가 그녀에겐 가장 큰 위협이 될 거야.”
  • 전강현이 말했다.
  • 모여정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 “사실 전 그녀와 뭔가를 두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전 그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죠.”
  • 지난 생의 그녀는 모안그룹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 부모가 재산을 모두 그녀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그녀는 회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 부모는 두 딸을 똑같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녀는 부모가 유산을 골고루 나눠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가 최종적으로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만 남겨주고, 이로 인해 모여희가 앙심을 품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당신이 그 여자를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여자도 그러라는 법이 없지. 그래서 당신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할 거야.”
  • 모여정은 전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부부는 첫 번째 눈맞춤을 했다.
  • 그녀는 전강현이 왜 갑자기 이런 화제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 지난 생에 그녀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생에는 싸우더라도 부모님의 것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 ‘절대 모여희가 지난 생처럼 승리자가 되게 내버려둘 수 없어.’
  • 전강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웃긴 얘기가 뭔데?”
  • “모여희가 대표님을 무서워하는 걸 보고 그녀가 대표님과 자려고 꼬시다가 대표님에게 뻥 차이는 모습을 상상해서…”
  • 모여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녀는 속으로 전강현을 수백 번 욕했다.
  • ‘늙은 여우 같으니. 일부러 화제를 돌려서 내 경계를 늦추고 다시 궁금한 걸 물어봤네. 나는 저도 모르게 술술 대답해 버리고 말이야.’
  • 그녀의 대답을 들은 전강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 모여정이 목을 움츠린 것을 보고 그는 젓가락을 들어 모여정의 머리를 콩 하고 내리쳤다.
  • 모여정은 머리가 아팠지만 뭐라고 하지 못하고 맞은 곳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벌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전강현을 올려다보았다.
  • “모여정,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잊지 않았지?”
  • 모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대표님, 저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는 혼인신고를 마친 법적인 부부예요.”
  • 그녀는 혼인신고서를 꺼내려고 했지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
  • ‘내 혼인신고서 어디 갔지? 잃어버렸나? 큰일인데!’
  • “대표님, 대표님, 제 혼인신고서가 사라졌어요.”
  • 모여정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 “분명 가지고 있었는데. 깨어난 뒤에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는데… 왜 사라졌지? 하나 더 발급받을 수 있어요?”
  • 전강현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비꼬았다.
  • “혼인신고서를 잃어버렸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 “아니에요.”
  • 모여정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대표님, 한 장 더 발급받을 수 없어요? 아니면 복사라도 하러 갈까요?”
  • 혼인신고서가 사라지자 그녀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 전강현은 또 젓가락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쳤다.
  • 모여정은 아파서 숨을 들이쉬며 화나고 서운한 얼굴로 전강현을 올려다보았다.
  • “다른 남자가 당신 남편을 꼬시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야?’
  • ‘으잉? 질문이 왜 이렇게 되지?’
  •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녀는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괜찮았다. 이혼하면 그만이 아닌가?
  • “말해!”
  • 전강현은 차가운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모여정은 전강현과 함께 있을 때면 온몸에 긴장이 바짝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너무 변덕스러워.’
  • “진짜로 말해요?”
  • 모여정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테이블을 보는 게 아니라 전강현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똑똑한 전강현은 그녀의 눈빛 하나로 바로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 그가 교통사고로 하반신불수가 된 후로 외부에서는 모두 그가 남자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떠들어댔다.
  • 모여정이 말하려는 의미는 여자가 작정하고 꼬셔도 그걸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 “도련님, 수저를 가져왔습니다.”
  • 전강현은 눈짓으로 보디가드가 새로 가져온 수저를 모여정의 앞에 두게 했다.
  • “사과하러 왔으면 나랑 밥 먹고 가.”
  • 전강현은 젓가락으로 그녀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이건 왜 몸에 좋고 이건 어떤 성분이 몸에 좋고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 모여정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 “저 매운 거 못 먹어요.”
  • 하지만 전강현의 눈빛 하나에 모여정은 바로 겁을 먹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 “아니에요, 저 매운 거 먹어요. 대표님이랑 같이 하는 식사인데 아무리 매워도 먹어야죠.”
  • 고추기름으로 가득한 음식을 입에 넣자 매콤한 향이 입 안에서 확 퍼졌다. 너무 매운 나머지 모여정은 뱉아내고 싶었지만 전강현의 싸늘한 시선에 그녀는 억지로 삼키고 말았다.
  • ‘너무 매워!’
  • 그녀는 급히 물을 찾았다.
  • 전강현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살뜰히 국을 떠주었다. 하지만 국 안에도 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 전강현은 국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 “국 마시고 여기 있는 음식도 먹어. 다 먹고 꺼지든가.”
  • 모여정: “…”
  • 한 시간 뒤.
  • 모여정이 배를 끌어안고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 “대표님, 화장실 어디인가요?”
  • 전강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를 들어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 하지만 모여정은 자신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전강현 때문에 급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 다행히 보디가드가 여자 도우미 한 명을 불러와 그녀를 화장실까지 데려가라고 말했다.
  • 모여정이 매운 것을 못 먹는 이유는 장이 안 좋아서였다. 그녀는 매운 것만 먹으면 장이 꾸륵거리며 장 활동이 아주 빨라졌다.
  • 하지만 전강현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녀는 음식을 모두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화장실도 여러 번 다녀오게 되었다.
  • 그제서야 전강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 그녀가 배를 끌어안고 화장실로 뛰어가려고 할 때, 전강현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 “설사약이라도 먹었어?”